중국 5세대 '떠오르는 별' 누구인가 ② 보시라이부친·장인 국무원 부총리 역임, '태자당' 일원으로 출세가도 달려'아버지 후광' '거품론'도 대두… 비토세력 존재로 향후 입지 불투명

보시라이(薄熙來)는 5세대 지도자라기보다는 4.5세대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 듯싶다.

그는 1949년 7월생이다. 리커창(李克强)을 비롯해 현재 거론되는 다른 5세대 인물이 모두 50년대생인 것과 비교할 때 나이가 애매하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는 여섯 살 연하인 리커창과 마찬가지로 78년에 대학에 입학했다.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때문이었다. 베이징대 역사학과를 다녔으며 사회과학원에서 국제저널리즘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출발은 5세대와 비슷했지만 두각은 일찍 나타냈다. 비록 가능성은 희박하다는 전제가 붙긴 했지만 2002년 11월 16차 당대회를 앞두고 차기 총리 다크호스로 물망에 오르기까지 했다.

보시라이는 고위 간부의 자제와 인척들로 이뤄진, 전형적인 태자당(太子黨) 일원이다. 국무원 부총리를 역임한 보이보(薄一波)의 둘째아들이다.

덩샤오핑(鄧小平)의 절친한 친구인 보이보는 덩과 함께 3세대 지도부의 막후에서 최종 결정권자 역할을 했던 ‘8로(八老)’ 중 유일한 생존자이다. 1908년생으로 올해 98세이다. 보이보는 장기간 지도부에 머물면서 주로 경제부문에서 일했다. 보시라이의 장인 구무(谷牧)도 국무원 부총리를 지냈으며 역시 경제부문에서 주로 활약했다.

보시라이는 신언서판(身言書判)을 모두 갖춘 인물이다.

187cm에 달하는 훤칠한 키에 수려한 용모, 중국 관료에게서 흔히 볼 수 없는 뛰어난 유머 감각과 친화력을 지니고 있다. 또한 다롄(大連) 시장으로 오래 재직(1992~2000)하면서 다롄을 ‘북방의 상하이(上海)’라고 불릴 정도로 경제를 발전시켰을 뿐만 아니라 환경친화적 미래형 도시로 만들었다.

여기에 덩과 더불어 장쩌민(江澤民), 후진타오(胡錦濤) 체제 확립에 결정적 역할을 한 막강한 원로 보이보를 아버지로 둔 든든한 배경마저 구비, 일찌감치 장래의 총리감으로 주목되었다.

그가 랴오닝(遼寧) 성장을 거쳐 2004년 2월 국무원 상무부장에 임명되었을 때 대다수는 차기 총리를 시키기 위한 수순으로 생각했다. 지방행정 경험에 중앙의 경험을 쌓는 기회를 갖게 됐기 때문이다. 더욱이 상무부는 세계무역기구(WTO) 가입에 대처하기 위해 2003년 대외경제무역부와 국가경제무역위원회를 합쳐 신설한 부서였다. 주요 경제발전 계획 수립에 참여하고 대외경제 교섭을 담당하는 곳이니 차기 총리의 수습부서로서는 적격이었다.

하지만 당시 베이징의 권력 핵심부인 중난하이(中南海) 사정은 그리 간단한 게 아니었다. 그가 후진타오-원자바오(溫家寶) 체제가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하고 있는 ‘동북진흥 계획’의 중추 랴오닝 성의 서기를 거치지 않고 중앙으로 수평 이동한 것이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들었다. 리커창을 중앙으로 끌어 올리기 앞서 허난(河南)성 서기와 랴오닝성 서기를 거치게 한 것과 같은 통상적 인사 수순과 다른 이유에서다.

이를 두고 원쯔전(聞世震) 당시 랴오닝 서기와 불화를 들기도 하고 랴오닝 성에서 빈발한 부정부패 사건으로부터 그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분석도 나왔다. 중국은 여전히 공산당 우위이기 때문에 성의 최고책임자는 성서기이다. 그러나 보시라이는 장쩌민과 주룽지(朱鎔基)가 자신을 임명했다면서 원쯔전에게 간섭하지 말고 당무만 보라고 했다.

보시라이의 이 같은 방약무인한 태도에 원쯔전은 베이징으로 올라와 나의 사임을 받던가 아니면 그를 다른 곳으로 보내던가 하라고 강력 항의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쨌든 보시라이의 환송연에는 서기는 물론 부서기들도 대부분 참석하지 않아 썰렁했다고 한다.

이때를 전후하여 ‘보시라이 거품론’이 중화권 언론에 많이 등장했다. 다롄 시장 시절 그의 업적은 보이보의 후광을 바탕으로 외자가 집중했던 탓에 가능했다는 지적이 대표적이다. 41% 녹화 주장도 대부분 잔디를 심어 이룩한 겉치레이며 더 중요한 물 공급은 그의 재임 중 더욱 악화됐다는 비판도 나왔다. 한마디로 포장에 능할 뿐이라는 것이다.

▲ 태자당 출신으로 중국의 차기 총리 물망에 유력하게 오르내리는 보시라이 상무부장이 외자 유치 현장을 찾아가 연설하고 있다.

문혁 당시 스승을 때려죽인 곳으로 유명한 베이징 4중학교에서 ‘롄둥(聯動)’이라는 홍위병 조직의 간부를 지냈다는 보시라이로선 밝히고 싶지 않은 사실과 또 베이징대 입시에서 2점 차로 떨어졌는데 특혜 입학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많은 구설 속에 임명되었지만 그는 지난 2년간 상무부장직을 무난하게 수행해오고 있다. ‘거품론’에도 불구하고 보시라이는 여전히 차기 총리 1순위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

보시라이는 랴오닝 성장 시절부터 한국을 자주 방문했다. 지난 3월 29일에는 중국을 방문한 손학규 경기도 지사와 만나 한·중 양국의 다음 단계 발전 목표가 자유무역협정(FTA)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재준 객원기자·중국문제 전문가 hufs82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