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5세대 '떠오르는 별' 누구인가 ⑤ 링지화 권력의 핵 黨조직부장에 거명

공산당은 선전과 함께 조직이 핵심이다. 중국 공산당의 경우 중앙 조직부장이 관장하는 직책은 총 4,100개로 성 당위서기, 부서기, 성장, 부성장 그리고 성위 상무위원 등 지방의 최고 영도층 직책이 망라돼 있다. 이처럼 요직이다 보니 집권자들은 조직부장을 가장 믿을만한 사람으로 임명한다. 대표적인 경우가 쩡칭훙(曾慶紅) 현 국가부주석이다.

장쩌민(江澤民)이 1989년 총서기에 임명된 뒤 상하이(上海)에서 데려 온 유일한 자신의 측근인 쩡에게 처음 맡긴 직책은 판공청 부주임이며 이후 판공청 주임을 거쳐 조직부장에 임명하였다. 총서기일지라도 군사위주임직을 차지하지 못하고 중앙 판공청 주임과 중앙 조직부장에 자기 사람을 앉히지 못하면 진정한 실권자이라고 할 수 없다.

후진타오는 현재 군사위주석직을 보유하지만 여전히 판공청 주임과 조직부장을 자신의 사람으로 심지 못하고 있다. 후진타오의 최측근 리커창(李克强)이 판공청 주임에 임명될 것이라는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오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현재 판공청 주임은 장쩌민의 사람인 왕강(王剛)이고 조직부장 허궈창(賀國强) 역시 후진타오의 사람이 아니다.

허궈창은 장쩌민의 사람인 동시에 쩡칭훙의 측근이다. 허궈창은 마오쩌둥(毛澤東)의 셋째 부인인 허쯔전(賀子珍)의 조카로 태자당이다. 역시 태자당인 쩡칭훙과 함께 요즘 말을 갈아타고 ‘새 주군’ 후진타오의 권력강화를 위해 옛 동료인 상하이방 숙청작업에 앞장서고 있다.

하지만 그가 조직부장의 자리를 계속 유지할지 여부는 불분명하다. 일부 중화권 언론에서는 한정(韓正) 상하이 대리서기는 과도적 인물이고 허궈창이 그 자리를 맡게 될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다. 후임 조직부장으로 거명되는 인물이 현 판공청 부주임으로 있는 링지화(令計劃)이다.

▲ 후진타오 주석을 보필하는 '음지의 막료'라는 별명이 붙은 링지화의 최근 모습 사진은 관영 매체에서조차 찾기 어렵다. 사진은 링지화(윗줄 가운데)가 1985년 공청단 제1서기로 부임한 후 주석(윗줄 맨 오른쪽)과 함께 찍은 것이다.

링지화는 1956년 10월생으로 올해 꼭 50세가 된다. 여러모로 쩡칭훙을 연상시키는 구석이 많다.

중앙 공산주의청년단(共靑團)에서 일하던 1985년 공청단 제1서기로 부임한 후진타오의 눈에 띄어 그의 측근이 되었다. 보고서 등 문건 작성에서 발군의 실력을 발휘한 것이 후의 주목을 끈 요인이었다고 한다. 동료들은 그가 “두뇌회전이 빠르고 일처리가 야무지다”고 평하고 있다.

그는 후진타오가 구이저우(貴州)와 시짱(西藏) 자치구(티베트)로 내려갔을 때 따라가지 않고 베이징에 남아 있었지만 후의 가족을 통해 그와 긴밀한 연락을 취한 것으로 알려졌다.

중앙에 멀리 떨어져 있던 후진타오가 중앙의 정치 동향을 ‘손바닥 보듯이’ 정확하게 파악하고 현명하게 대처하는 데는 링지화의 역할이 컸다. 이는 후가 1992년 숱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발탁되어 후계자 위치를 차지하는 한 요인이 되었다. 후진타오는 1995년 12월 공청단에 있던 링지화를 중앙 판공청으로 끌어왔고 조장을 거쳐 1999년에 부주임으로 승진시킨 뒤 오늘에 이르렀다.

링지화는 국가주석 판공실 주임 천스쥐(陳世炬)와 더불어 ‘후의 그림자’로 불린다. 통상적으로 행사장에 두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모습을 보인 뒤 20분쯤 지나면 후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간 격(格)의 차이는 있다. 링지화보다 4세 연하인 천스쥐가 후 주석이 구이저우 서기 시절부터 그의 곁을 한번도 떠나지 않은 수행비서라면 링지화는 정치 참모이다..

장쩌민이 베이징방(幇), 차오스 등 정적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책사 역할을 한 사람이 쩡칭훙인 것처럼 링지화가 상하이방의 제거 과정에서 중요 역할을 하고 있을 개연성이 높다. 그를 조직부장으로 임명하려 한다는 사실을 통해 후진타오가 리커창과 함께 자신의 체제의 쌍두마차로 삼으려 하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링지화는 몇 가지 점에서 리커창과 현저하게 대조된다.

리커창이 베이징대 법학과 출신인 반면 그는 지방대를, 그것도 공청단 하급간부로 있으면서 졸업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리커창이 일찌감치 언론의 주목을 받고 언론과의 접촉을 마다하지 않는 반면, 그는 언론에 자신을 드러내기를 극력 꺼려 한다. 그가 이미 2002년 16대 이전부터 주목받는 존재였으나 중화권 언론에서도 제대로 된 최근 사진을 구하지 못하고 스냅사진만을 확보했을 정도다.

리커창이 양지의 측근이라면 링지화는 ‘음지의 막료’인 셈이다.


이재준 중국문제 전문 객원기자 hufs825@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