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5 재보선 또 전패로 당내 "우리당 간판으로는 안 된다" 확산정계 새판짜기 시동 예고… 친노그룹 반발·민주당과 기싸움이 변수

0 대 40. 기록적인 재보선 연전연패 스코어는 열린우리당을 해체 수순으로 몰아넣었다. 연말까지 미뤄뒀던 정계개편 논의가 전당대회 시기 논란과 맞물려 분출되면서 ‘11월 대란’이 현실화되는 분위기다. 10·25 재·보선 직후 김근태 의장은 “이번 선거결과는 한마디로 절망이다. 우리당의 기득권을 고집하지 않겠다”는 말로 여당발(發) 정치권 새판짜기의 신호탄을 쏘았다.

대세는 ‘통합론’으로 흐르고 있다. “열린우리당 간판으로는 안 된다”는 점이 확인된 이상 폐업론자들의 목소리가 가장 객관적이고 현실적인 진단으로 부각됐다. 과거회귀적 통합 반대, 우리당 정체성 강화 등 명분론에 경사된 친노(親盧)그룹의 반발은 “그럼 집권을 포기하자는 것이냐”는 반론 앞에 힘 쓸 공간이 좁은 게 현실이다.

게다가 당의 양대 주주인 김근태 의장, 정동영 전 의장이 잇따라 ‘창당 실패’를 자인했다. 리모델링이건 재건축이건 우리당의 간판 떼기는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문제는 정계개편의 동력이다. 위기에 내몰린 김근태 지도부도, 정동영 전 의장 진영도 당 안팎의 세력을 한 울타리로 모아낼 여력을 상실한 상태다.

하기에 범여권 통합의 중심으로 김대중(DJ) 전 대통령이 떠오르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김 의장, 정 전 의장이 ‘창당 실패론’을 거론할 수 있었던 것은 김 전 대통령이 “분당은 (노무현 대통령을 대선 때) 찍어준 사람들에게 승인받은 적이 없다”며 사실상 민주당과의 합당을 종용했기에 가능했다. 거의 모든 정파가 거부하기 힘든 ‘DJ의 지상명령’에서 통합론의 알리바이를 찾았다는 것이다.

게다가 북한 핵실험 국면 속에 김 전 대통령이 노무현 대통령의 ‘햇볕정책’계승 의지에 심각한 회의감을 표한 것도 차기주자 진영에선 달가운 일이다. 여권의 차기주자들에게 ‘탈(脫)노무현’은 언젠가는 반드시 거쳐야 할 수순이었다. 김 전 대통령이 햇볕정책을 고리로 노 대통령을 쫓는 사이 이들은 DJ 등에 올라타는 것만으로 노 대통령과의 차별화 효과를 충분히 거두고 있다.

▲ DJ노선에 기대기 양상

이 같은 흐름은 ‘통합론’과 ‘햇볕정책’으로 압축되는 ‘DJ 노선’이 향후 범여권 정계개편의 준거로 작용할 것임을 암시한다. 이는 지금까지 ‘민주개혁세력 연합’을 내세웠던 김근태 의장이 어느새 ‘평화수호세력 대결집’으로 슬로건을 변경한 대목에서, 여권의 또 다른 잠룡인 천정배 의원이 최근 김 의장과 함께 ‘햇볕정책 사수대’로 불리는 대목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결국 김근태, 정동영, 천정배 등 우리당 대권주자들의 행동반경은 DJ라는 안전장치 내로 규정된 셈이다. 반면 한화갑 민주당 대표, 고건 전 총리는 사뭇 다른 궤적을 그리고 있다. 한 대표는 북핵 정국의 고비에서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동참”을 주장해 김 전 대통령과 엇박자를 냈다. 고 전 총리는 “온정적인 대북정책을 원점에서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고 선언함으로써 김 전 대통령과 결별하는 모양새를 연출했다.

민주당 한화갑 대표 등 당직자들이 25일 밤 여의도 민주당사에서 재보궐선거 개표 방송을 보며 자사 후보의 선전 소식에 환호하고 있다. 신상순 기자
이들이 ‘DJ 그늘’을 이탈한 대가는 간단치 않아 보인다. 한 대표는 당 안팎에서 “평상심을 잃었다”는 비난을 받고서야 다시금 햇볕정책 적자경쟁 구도 안으로 돌아왔다. 정치적 기반이 호남인 고 전 총리 역시 최근 지지율이 휘청거려 독자생존 활로에 비상등이 켜졌다. 향후 범여권 통합 논의에서 주도권을 상실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게 된 셈이다. 이에 따라 DJ를 구심으로 전개될 정계개편에서 열린우리당-민주당-고건 전 총리의 삼각관계가 향후 어떻게 풀려갈지는 가늠이 어렵다.

▲ 통합대상 등 줄다리기 예상

다만 우리당과 민주당은 햇볕정책 줄다리기를 외피로 통합의 대상과 지분 등을 놓고 신경전을 펼 것으로 전망된다. 민주당이 ‘노 대통령과 분당 세력’까지 통합의 대상으로 용인하거나, 우리당 주류가 친노그룹과 과감히 결별하면 양당의 통합에는 큰 걸림돌이 없다. 그러나 민주당은 재·보선 이후에도 “정계개편의 중심”을 자부하며 우리당을 압박하는 기조를 유지하고 있다. 우리당 친노 세력도 조기 전당대회론으로 ‘내부 강화론’을 공론화한 상태여서 진통이 불가피해 보인다. 김근태 의장은 여전히 “분열 없는 통합신당”을 주장하며 “원칙적으로는 노무현 대통령과 함께 가야 한다”는 모호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고건 전 총리와의 관계는 더욱 묘수풀이가 어렵다. 한화갑 대표는 “고 전 총리가 민주당에 들어올 가능성에 대해선 거의 체념상태”라고 밝혔고, 우리당도 DJ 노선을 멀찌감치 이탈한 고 전 총리에 대한 연대의 명분을 찾기가 쉽지 않다. 고 전 총리측도 여전히 민주당은 물론 열린우리당과의 연대에 뻣뻣한 자세다.

▲ 잠룡들 핵심 이슈 입장차

현재는 DJ 울타리 안에 웅크리고 있지만, 우리당 대권주자들 사이의 분화 과정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북핵 문제와 더불어 또 다른 핵심 이슈인 한·미 FTA와 관련해 김근태 의장과 천정배 의원은 ‘신중론’으로 정리되는 분위기다. 반면 정동영 전 의장은 “두려움을 버리고 대외 개방을 밀고 가야 한다”는 입장이다.

김 의장과 천 의원 사이에서도 미묘한 신경전이 엿보인다. 뉴딜 구상을 여전히 자신의 브랜드로 고수하고 있는 김 의장은 대기업 규제 완화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인 반면, 천 의원은 “출자총액제한 제도가 기업투자를 위축시킨다는 재계의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라 우리당 대권주자들의 공통적 지향인 통합신당의 형식적 외피가 마련될 때까지 이들은 정책적 영역에서 각자의 노선을 지키며 국지전을 전개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는 통합신당론이 구체화될수록 신당의 정체성과 세 규합의 이념적 근거로 확산되는 경로를 거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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