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 호남 방문 등 햇볕정책 강연에 YS·JP도 꿈틀이회창도 정치재개 탐색… 내년 대선 영향줄지 주목

올드보이(Old Boy), 왕의 귀환(반지의 제왕), 석양의 건맨. 대선을 앞둔 정치권에 때아닌 명작 붐이 한창이다.

주인공은 한 시대를 풍미했던 김영삼(YS)ㆍ김대중(DJ) 전직 대통령과 김종필(JP) 전 총리 등 이른바 3김(金)과 대선 3수생인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다. 조연 격으로 여권에서 정대철, 이부영 전 의원, 한나라당의 최병렬, 서청원, 홍사덕 전 의원 등이 주목받고 있다.

일각에서는 한물 간 배우라는 평이 자자하지만 만만찮은 정치판 구력은 대선이라는 큰 장(場)에서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다. 현재 가장 왕성한 행보를 보이며 명작 붐을 일으킨 장본인은 김대중 전 대통령(DJ).

북한의 10ㆍ9 핵실험은 DJ를 영화‘왕의 남자’의 줄타는 공길(이준기 분)처럼 위기에 몰아넣었지만 호남이라는 지분을 앞세운 그의 고도의 회전 묘기는 관객들의 호응을 받으며 순회공연까지 나서고 있다. DJ는 햇볕정책 전도사를 자처하며 호남, 부산, 충청 등 전국을 돌며 강연정치를 진행 중이다. DJ의 행보는 ‘햇볕’을 방어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계개편과 대선 국면이라는 카오스적 상황에서 정치 9단의 노련함을 과시하고 있다.

DJ는 북한이 핵실험을 한 10월 9일부터 “대북 포용정책을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된다” “(민주당과의)분당에 여당의 비극이 있다”는 발언 등으로 호남 민심과 범여권 내부의 기류를 뒤흔들었다. 그러자 김근태 당의장, 정동영 전 당의장 등 우리당 양대 세력의 수장이 DJ에 동조하는 입장을 취했고, 민주당 한화갑 대표도 DJ와 차별성을 보이려다 벽에 부딪혀 곧바로 DJ품에 안겼다.

DJ는 여권이 10ㆍ25 재보선 참패로 자중지란을 벌이던 10월 28일 8년 만에 고향인 목포를 찾아 ‘무호남 무국가(無湖南 無國家)’라는 글을 남겨 ‘호남배제 불가’라는 메시지와 함께 정계개편에 관한 방향 제시를 하기도 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은 11월 4일 DJ 사저를 직접 찾아 햇볕정책을 계승하고 민주당과의 통합 가능성을 열어두는 등 호남 끌어안기에 나서 DJ의 힘을 실감케 했다. DJ가 정치의 한복판에서 태풍의 눈이 되고 있는 셈이다.

盧-DJ 회동은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종필 전 총리가 몸을 곧추세우는 데 적잖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평생 DJ와 라이벌 관계를 유지한 YS는 10월 10일 청와대 회동에서 DJ의 햇볕정책과 이를 계승한 노 대통령의 포용정책을 강도 높게 비난한 뒤 일본 등 외국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재차 공격하는 등 盧-DJ 연대에 가장 날카로운 각을 세웠다.

YS는 11월 17일 JP와 만찬 회동을 가지려다 언론의 관심에 부담을 느껴 행사를 취소했지만 DJ에게 독상은 차려주지 않겠다는 경쟁심은 상당한 듯하다. YS의 대변인 격인 박종웅 전 의원은 “어르신(YS)은 전에 JP와 만난 적도 있고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에서 만나려 한 것인데 언론이 노 대통령과 DJ 회동에 견줘 정치적으로 다루는 것 같아 취소했다”면서 “조만간 다시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

박 전 의원은 “어르신은 DJ가 강연정치를 통해 햇볕정책을 옹호하는 것을 못마땅해 하지만 DJ처럼 하지는 않을 것”이라면서 “나라의 어른답게 ‘큰 행보’로 국민에게 메시지를 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전 의원은 대선을 앞두고 YS계 인사들을 중심으로 세력화를 시도하고 있다. 일정한 규모를 갖추는데 YS가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박 전 의원은 “현재 북핵 위협과 경제난으로 국가와 국민이 고통을 받는 것은 지도자를 잘못 뽑은 데 기인한 것”이라면서 “차기 대선에서 정치 상황과 대선 후보의 면모를 파악해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지난 4월 40, 50대 오피니언 리더와 전문가그룹을 중심으로 창당한 선진한국당(대표 장석창)이 정치적 기반으로 PK(부산ㆍ경남)에 무게를 둔 것에 주목, YS계와의 연대를 점치기도 한다.

김종필 전 총리는 얼마 전 YS와 만나 국정을 논의한 데 이어 13일에는 심대평 국민중심당 공동대표와의 회동에서 “대선에서 전국을 누비며 나름의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혀 향후 JP의 행보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JP는 22일 중앙대 동창회가 주최한 ‘승당 임영신 박사 추모 강연회’에서 “최고책임자가 횡설수설하니 잠이 안 온다”며 노 대통령을 비난한 뒤 DJ에게도 “뒤에 물러 앉아 가만 있어야 할 사람이 자꾸 입을 벌리는지 모르겠다”면서“툭하면 평화주의자처럼 욕 안 먹을려고 재주 부리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올드보이의 행진에서 DJ와 함께 가장 주목받는 이는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다. 이 전 총재가 정계복귀의 수순을 밟아 대선 3수에 도전할 것이라는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전 총재는 지난 20일 창원에서 가진 강연회에서 “대권보다 중요한 것은 좌파정권이 다시 집권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라며 일단 정계복귀와는 거리를 두었다. 이 전 총재는 이어 30일 연세대 강연, 12월 5일엔 한나라당 중앙위 산하 ‘한나라포럼’에서 초청 강연을 하는 등 왕성한 대외활동에 나설 계획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정계복귀를 위한 수순밟기라는 견해가 나오고 있다. 한나라당 홍문표 의원은 "이 전 총재가 국민과 당을 위해 일을 할 때가 됐다"며 이 전 총재의 정계복귀에 힘을 실었다. 이 전 총재의 팬클럽 성격인 ‘창(昌)사랑’의 백승홍 상임고문(전 의원)과 조춘호 대표 등은 이 전 총재의 정계복귀를 추동하고 있다.

일련의 움직임들에 대해 이 전 총재의 이종구 언론특보는 “이 전 총재의 정계은퇴 입장에는 변함이 없다”며 “최근 강연은 이 전 총재께서 ‘좌파정권이 다시 집권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라고 밝혔듯이 노무현 정부의 진상과 김 대중 전 대통령의 북핵 대응 실체에 대해 국민에게 진상을 소상히 알리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특보는 “일부에서 이 전 총재께서 강연을 통해 정치적 비중을 높이고 결국 정치 재개에 나서는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는데 정계 원로로서 역할을 다하는 데 머물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정가 일각에서는 이 전 총재의 경우 당내는 물론 영남, 충청 등에서 상당한 지지세력이 있어 박근혜ㆍ이명박ㆍ손학규 트로이카 체제가 무너지거나 당이 위기에 처할 경우 직접 대선 주자로 나설 가능성도 있다고 전망한다.

한편, 최병렬 전 대표는 박근혜 전 대표를 측면 지원하며 재기를 벼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외곽에서 당 소속 의원들을 만나 박 전 대표 지지를 당부하고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8ㆍ15 광복절 특사로 복권된 서청원 전 대표는 지난 8월 중구 퇴계로에 개인 사무실을 낸 데 이어 최근 YS-JP의 회동을 주선하는 등 정치적 행보에 속도를 내고 있다.

홍사덕 전 의원은 지난달 31일 국민대 특강을 시작으로 강연정치에 나섰고, 당내 ‘책사’로 알려진 윤여준 전 의원은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가끔씩 만나 자문을 해주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권에서는 정대철 고문이 민주당 인사를 접촉하며 정계개편 방법론으로 내세운 노 대통령을 배제한 ‘헤쳐모여식 신당창당’에 전력하고 있다. 이부영 전 의장은 최근 중도노선을 표방하는 지식인 그룹인 ‘화해상생마당’의 운영위원장을 맡아 12월 1일 ‘화해·상생의 중도주의에 대한 성찰’주제로 첫 번째 포럼을 여는 등 보폭을 넓혀 주목받고 있다.


박종진 차장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