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연방보안부 대령 영국서 독살된 사건 배후 싸고 시끌시끌푸틴 대통령 이후 KGB 출신들 정·재계에 막강한 영향력 행사

KGB의 망령이 되살아 난 것일까.

전직 러시아 정보기관 간부가 최근 영국 런던에서 의문의 독살사를 당하면서 과거 정보기관을 앞세운 러시아의 국가테러가 다시 논란의 중심에 섰다. 영국 정부는 영국으로 망명한 이 전직 스파이가 러시아 정부를 줄곧 비판해 왔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에 러시아 정부가 개입했을 것이라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영국 의회는 물론, 내각 책임자까지 러시아 개입설을 주장해 자칫 영국과 러시아 간 외교분쟁으로 비화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사건이 터진 것은 지난달 1일. 국가보안위원회(KGB)가 해체된 뒤 1995년 국내분야를 넘겨받아 조직된 연방보안부(FSB)의 대령 출신으로 영국에 망명한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43)는 그날 런던의 한 일식집에서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러시아인 2명을 만나고 집에 돌아온 뒤 쓰러졌다. 바로 병원에 입원한 그는 독극물에 중독됐다는 진단을 받고 중환자실에서 치료를 받던 중 23일 사망했다.

사인은 방사능 물질인 폴로늄 210에 의한 중독. 이 물질은 세계적으로 연간 100g 정도의 소량만이 입자가속기나 원자로 등에서 추출되는 것으로 아무 곳에서나 구할 수 없는 희귀 방사능 물질이다. 퀴리 부부가 발견해 부인의 조국인 폴란드의 이름을 땄는데, 독성이 매우 강해 인체에 극미량만 투입해도 치명적이다. 이 같은 성질 때문에 그가 만약 독살됐다면 국가 차원의 지원이나 전문 암살단의 소행일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추정이다. 독살되기 직전 리트비넨코는 체첸 공화국에 대한 러시아의 무자비한 탄압을 줄기차게 비판하다 괴한의 총탄에 살해된 여기자 안나 폴리트코프스카야(48)의 사건 배후를 캐고 있었다. 러시아인들을 만난 당일도 여기자 피살 사건과 관련된 문서를 전달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폴르트코프스카야는 러시아 일간지인 노바야 가제타 소속으로 헌신적인 반전주의자였는데, 10월 7일 피격 살해되기 전까지 러시아로부터 분리독립을 주장하는 이슬람 체첸 공화국에 대한 러시아의 폭정을 고발하는 기사를 써 왔다. 러시아 반체제 여기자의 피살과 이 사건을 파헤치려는 전직 스파이의 연이은 독극물 피살이 결코 우연일 수 없다는 개연성이 러시아 정부로 의혹의 시선이 쏠리는 이유이다.

이 사건을 수사중인 런던 경찰은 아직 사건의 배후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정황상 여러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전 러시아 스파이 알렉산드로 리트비넨코의 2004년 기자회견(왼쪽)과 지난달 24일 영국 중심가의 한 병원 병상에 입원한 모습.
우선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암살을 지시했거나 러시아 정보 당국이 개입했을 가능성이다. 리트비넨코는 2002년 자신이 쓴 ‘러시아 폭파하기:내부로부터의 테러’에서 “1999년 30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러시아 아파트 폭파사건은 러시아 당국이 주장하는 체첸 무장세력의 소행이 아니라 FSB가 조종한 것”이라고 폭로했다. 또 자신이 영국으로 망명한 러시아 반체제 거물 기업가인 보리스 베레조프스키(59)를 살해하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도 공개했다. 이를 계기로 리트비넨코는 러시아 당국의 미운 털이 박혀 끊임없는 살해 위협을 받았으며, 급기야 여기자 암살 사건의 배후까지 들춰내려 하자 러시아 당국이 결행에 옮겼다는 시나리오다. 여기에는 푸틴 대통령이 대통령직에 오르게 된 결정적 계기가 체첸 반군을 철저히 무력 진압한 것이었으며, 푸틴 자신도 KGB 대령을 거쳐 그 후신인 FSB 총책임자를 지낸 정보통이라는 점도 배경으로 지목됐다. 내년에 총선과 대선을 치르는 푸틴 대통령이 정치적 논란을 피하기 위해 일찌감치 ‘문제아’ 제거에 나섰다는 시각이다.

러시아 당국이 의심받는 또 다른 이유는 리트비넨코가 죽기 수일 전 병상 인터뷰를 가졌는데, 여기서 그는 자신을 그 동안 감시해온 인물로 ‘빅토르 키로프’라는 인물을 지목했다. 공교롭게도 영국 주재 러시아 대사관에는 이와 비슷한 이름인 ‘아나톨리 키로프’라는 인물이 외교관으로 등록돼 있었다. 리트비넨코의 친구인 알렉스 골드파브는 AP 통신에 키로프가 “2003년까지 (KGB의 해외분야를 넘겨받은) 러시아 대외정보부(SVR)의 런던 책임자를 지냈고, 러시아 대사관의 외교관으로 행세해 왔다”고 주장했다.

또 다른 설은 베레조프스키 배후 가능성이다. 러시아 정가에서는 여기에 많은 무게를 두고 있는데, 베레조프스키가 반 러시아 공작용으로 리트비넨코를 역이용했다는 것이다. 베레조프스키는 1991년 소련 붕괴 후 국영기업 민영화 과정에서 막대한 부를 축적했으나 푸틴과 정치적으로 등을 지고 영국으로 망명한 반체제 인사다. 독살당한 리트비넨코와는 상당한 친분을 유지해왔다. 2000년 10월 망명 당시 그는 러시아 일간 시보드냐, 네자비스마야가제타, 코메르산트, TV_6 방송을 소유한 미디어 재벌이었는데, 체첸에 대한 무력진압을 비난하고, 러시아와 앙숙이 된 그루지야, 우크라이나에 자금을 지원하면서 푸틴 대통령과 ‘원수’가 됐다. 러시아 정부는 폴로늄 210이라는 방사능 물질은 국가가 테러 수단으로 이용하기에는 적합치 않은 희귀한 성질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이를 근거로 러시아 당국이 개입돼 있다고 말하는 것은 순진한 발상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베레조프스키의 역공작을 의심하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이번 사건과 직접 관련은 없지만 러시아의 독극물 공작의 개연성을 높여주는 사례는 또 있다. 친 서방, 탈 러시아를 표방하며 2년 전 오렌지 혁명을 통해 집권한 빅토르 유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러시아 당국에 의해 다이옥신으로 독살될 뻔 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서방 언론들은 그의 과거 깨끗했던 얼굴과 다이옥신에 중독돼 누더기처럼 변한 흉한 얼굴을 대비시켜 보도하면서 러시아 정부가 우크라이나의 이탈을 막기 위해 그를 암살하려 했다는 것을 여러 차례 시사했다.

냉전이 끝나고 소련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도 막을 내렸지만 음험한 정보기관이 러시아 정부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냉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KGB가 해체됐다고 하지만 FSB와 SVR로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러시아 정ㆍ재계에는 KGB 출신 인사들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크렘린 행정 부실장 4명 중 2명이 KGB 출신이다. 이들은 러시아 최대 국영 석유회사인 로스네프와 국영 항공사 아에로플로트의 회장을 겸하고 있다. 최대 천연가스 회사인 가스프롬 부회장도 KGB 출신이다.

러시아 당국은 정말 리트비넨코의 독살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까?


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