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5세대 '떠오르는 별' 누구인가 증시 정책 좌지우지해 투자자들 촉각… 주룽지에 의해 발탁돼 승승장구

시장경제의 진척에 따라 급성장하는 중국의 증권시장은 문자 그대로 불이 붙었다. 2006년 1월 지수 1,200선에서 출발한 상하이 종합지수(上證綜旨)는 2006년 말 2,800을 돌파했다.

올해도 중국증시는 화양연화(花樣年華), 즉 꽃피는 한 해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뜨고 있는 브릭스(BRICs) 국가 중에서도 중국은 브라질과 함께 가장 뜨거운 증시가 될 것으로 보인다. 세계 투자자들의 ‘바이 차이나(Buy China)’ 열풍에 힘입어 올 연말 상하이 종합지수가 3,300선을 돌파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문회보(文匯報)는 증시 활황에 따른 펀드 가입 열기를 ‘들판의 불길’로 표현했다. 연말에는 펀드자산 운용 규모가 1조 위안(120조원)을 넘어서리라는 분석도 있다.

장기적 전망 역시 장밋빛이긴 마찬가지다. 2016년까지 중국 증시 내 A주(내국인 전용 ) 시가총액이 5배 이상 늘어난 40조 위안(480조 원)대가 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하지만 중국 증시의 앞길이 탄탄대로만은 아니다. 중국이 공산혁명 이후 처음 증시를 외국인들에게 개방한 것은 1992년. 본격적인 국제화, 시장화 개혁에 진입한 것은 2002년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이후이다. 불과 4년 전이다.

중국 증시는 분명 웃자라고 있다. 특히 비유통 국유주의 존재는 중국 증시가 해결해야 할 고질적인 문제다. 비유통 국유주란 상장된 국유기업의 지분 중 주식시장에서 거래가 이루어지지 않는 정부보유 지분을 말한다. 이는 정부기관들이 보유한 전체 주식 가운데 3분의 2를 차지하고 있으며 증권시장 내 잠재적 매물로 인식되고 있다. 이를 시장에 내다팔면 주가는 폭락하지 않을 수 없다.

샹푸린(尙福林) 중국 증권감독관리위원회(증감위) 주석은 이처럼 웃자라고 손 데일 정도로 뜨거운 중국의 증시의 선장으로, 암초를 피해가며 장밋빛 미래로 이끌어갈 중책을 맡고 있다. 증감위 주석 직은 중국의 정부 부서 중 가장 수행하기 힘든 자리라는 말을 듣고 있다. 아울러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는 직책이기도 하다. 자본시장이 미성숙 단계에 있고 또 각종 관련 법제가 미비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중국 투자자들은 샹푸린의 입을 주시해야 한다는 말이 나오기까지 한다. 증시와 관련된 모든 중요한 결정은 샹푸린의 손에 의해 최종적으로 결정된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라는 지적이다.

중국 증권시장의 한 단계 업그레이드를 상징하는 주가지수 선물거래의 본격적인 시작 시점이 2007년 초라고 처음 밝힌 사람도 바로 샹푸린이다. 그는 지난해 10월 24일 금융파생상품 관련 세미나서 이 같은 방침을 천명했다. 주가지수 선물거래가 개시되면 중국의 투자자들은 리스크 헤지를 통해 주가가 상승할 때뿐만 아니라 주가가 하락할 때도 수익을 거둘 수 있게 된다.

지난해 9월 홍콩에서 발행되는 금융월간지 ‘아시아 머니(Asia Money)'가 아시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경제인 100인을 선정했을 때 그는 중국인으로서는 5위인 저우샤오촨(周小川) 인민은행장, 6위인 류밍캉(劉明康) 은행업 감독관리위원회 주석에 이어 9위를 차지했다. 자우샤오촨은 샹푸린에 앞서 증감위 주석을 지냈다.

1951년생인 샹푸린은 산둥(山東)성 지난(濟南) 출신이다. 문화혁명 기간에 4년 동안 군 생활을 한 뒤 베이징에 올라와 73년 인민은행 잉타오위안(櫻桃園) 지점에서 일하면서 금융계와 인연을 맺었다. 78년 대학입시가 부활하자 베이징 재무학원에 들어가 금융을 전공했다. 대학 졸업 후 인민은행 본점의 금융계획국 과장으로 복귀했다. 이후 계획자금국 국장까진 평범한 승진 코스를 걸었다.

샹푸린 인생의 전기는 93년 주룽지(朱鎔基) 부총리가 금융위기 상황에서 인민은행장을 겸임하면서 찾아왔다. 주룽지는 국유기업의 부실채권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 샹푸린을 행장조리에 승진시켰다. 이후 그는 고속승진을 거듭했다. 96년에는 인민은행 부행장에, 97년에는 중국의 금융정책 수립기구 화폐정책위원회 위원으로 선임됐으며 2000년에는 부실이 가장 심했던 농업은행 행장에 임명됐다. 1년 만에 부실의 늪에 빠져있던 농업은행을 흑자로 돌려 놓은 그는 2002년 12월 증감위 주석에 임명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바쁜 와중에 박사학위를 취득할 정도로 학구파이기도 하다.

99년과 2002년에 걸쳐 장쩌민(江澤民)과 태자당 세력들이 주룽지의 과감한 개혁정책에 제동을 걸기 위해 그의 측근들을 제거하고 좌천시키는 가운데서도 샹푸린은 금융계에 남을 수 있었다. 농업은행의 수익성을 제고하기 위해 은행설립 목적과는 동떨어진 자동차 대출금융분야에 뛰어든 그의 창조적 발상력과 부실지점 3,000개를 폐쇄하고 전체 인력의 절반인 5만 명을 구조조정한 결단력을 높이 샀기 때문이다. 샹푸린은 태자당의 저우샤오촨, 후진타오 측근인 류밍캉과 더불어 중국 금융계의 트로이카를 구축하고 있다.


이재준 객원기자 중국문제 전문가 webmaster@chinawatch.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