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러시아 대통령 주선… 성사 땐 동북아 질서에 획기적 변화 예상

노무현 대통령 임기 중에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수 있을까. 한나라당에서는 여권에서 대선 구도 반전 카드로 준비 중이라며 계속 견제하고 있지만 지금까지 정부 당국자들은 부인하는 양상이다.

그러나 6자회담에서 북한 핵문제 합의를 이끄는 데 러시아가 막후에서 큰 역할을 했고 그와 더불어 러시아의 중재로 연내 남북정상회담 가능성이 모색되고 있다는 설이 나돌고 있어 주목을 끌고 있다. 러시아는 왜 중재에 나서고 있으며 꺼져가던 ‘연내 남북정상회담 개최’ 불씨가 살아날 수 있을 지 짚어본다.

“이번 6자회담에서 가장 신세를 많이졌다고 생각하는 나라는 러시아다. 러시아로부터 대북 지원 약속을 얻어내면 다른 나라는 설득이 쉬울 것이라고 생각해 6자회담이 열리기 전 러시아에 다녀왔고 이번 회담 중에도 러시아 대표단과 오찬을 함께 하면서 대북지원 참여를 다짐받았다.”

발레리 수히닌 북한주재 러시아 대사
우리 측 6자회담 수석대표인 천영우 외교통상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2월 16일 한국언론재단이 마련한 초청포럼에서 6자회담 2ㆍ13 합의에 대해 러시아의 역할을 특별히 강조했다.

비슷한 시기, 스페인과 이탈리아를 순방 중이었던 노 대통령은 지난 15일 로마에서 열린 동포 간담회에서 미국의 대유럽 마셜플랜을 언급하면서 “대북 지원에 대해 퍼주기 비판이 있지만 우리가 다 주더라도, 우리가 다 부담하더라도 결국 남는 장사가 될 것이다”고 말해 앞으로 남북관계에 큰 변화를 예감케 했다.

2ㆍ13 합의는 2005년 9ㆍ19 공동성명의 실질적 이행 조치로 한반도는 대변화의 계기를 맞게 되었다. 즉 영변 핵시설의 폐쇄와 봉인이라는 초기단계를 지나 핵프로그램 신고와 핵시설의 실제적 ‘불능화’ 조치를 북한이 수용함으로써 ‘핵폐기’ 과정으로 진입하는 의미 있는 실천이 가능해진 것이다

2ㆍ13 합의의 실질 당사자는 미국과 북한이지만 북한을 끌어내 협상 테이블에 앉히고 합의까지 가능케 한 데는 러시아의 역할이 매우 컸다. 지난해 10ㆍ9 핵실험 이후 6자회담을 거들떠 보지도 않던 북한은 러시아가 나서면서 움직였고 미국 역시 중국을 통한 북한핵 통제가 불발에 그치자 러시아가 제시한 카드를 받아들였다.

2ㆍ13 합의가 성사되면서 미국은 대북 식량 지원을 약속했고 북한과 신경전을 벌이던 마카오 BDA(방코델타아시아) 은행 북한계좌에 대해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한국은 2ㆍ13 합의를 예상하기라도 한듯 곧바로 대규모 북한 지원을 공표하고 고위급 회담에 적극적인 행보를 보였다.

북한도 2월 16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생일에 생필품과, 식량 등을 특별 배급해야 했고 오는 4월 15일 김일성 생일에 맞춰 남한으로부터 쌀, 비료 등의 지원을 받기 위해서는 남북대화 재개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었다. 특히 미국이 F-117 스텔스 전폭기를 남한에 배치하고 한ㆍ미 합동군사훈련에 나선 것은 이라크의 예에 비춰 북한을 적잖이 압박했다..

한국·러시아 대통령 임기 전 성사 서둘러

미국ㆍ러시아ㆍ한국 정부의 임기가 내년 상반기라는 점도 2ㆍ13 합의를 이끌어내는 요인으로 작용했다는 후문이다. 부시 정부는 임기 내에 북핵 문제에 성과를 낼 필요가 있었고 노무현 정부는 남은 1년 임기 중에 정상회담 등 남북관계에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겠다는 복안을 갖고 있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은 헌법의 3기 연임 불가 규정에 따라 장기 집권이 어렵게 되자 돌파구를 마련할 필요가 있었다. 러시아가 북핵 문제의 해결사로 나선 배경이기도 하다.

푸틴 대통령이 장기집권하기 위해서는 2008년 5월 임기만료 전에 개헌을 해야 한다. 현재 추진중인 러시아-벨로루시를 통합시켜 통합국가 초대 대통령이 되는 시나리오도 있다. 하지만 이러한 방안들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지지가 필수적이고 국내외 여론도 무시할 수 없다.

푸틴 대통령이 북핵 문제를 해결해 세계 평화에 기여하고 나아가 노벨평화상까지 받게 된다면 장기 집권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다. 실제 북한에 에너지와 식량 등이 지원되고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된다면 푸틴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의 영광을 안을 수도 있다. 그 과정에 상징적인 이벤트로 등장한 것이 남북정상회담 연내 개최라는 묘수라는 것이다.

러시아가 북한을 2ㆍ13 합의 테이블에 나올 수 있게 한 카드는 극동 러시아의 에너지를 북한에 지원하고 남-북-러 3국이 극동 러시아를 개발하는 데 공동 참여하는 방안인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여기에는 한국의 대규모 북한 지원과 남북정상회담도 포함돼 있다.

그러한 프로젝트는 지난해 상반기부터 국내외에서 은밀하게 진행됐다고 한다. 한반도 문제 전문가이자 푸틴 대통령의 입으로 통하는 발레리 수히닌(57) 러시아 부대사가 8월 북한 주재 러시아 대사로 임명됐고 국가정보원을 비롯한 우리 측 관계자들과 러시아 간에 긴밀한 접촉이 이어졌다.

수히닌은 2005년 3월 15일 <주간한국>과의 인터뷰에서 러시아 극동지역에서의 남북정상회담 개최에 대해 묻자 “러시아에서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될 가능성은 충분히 있고 러시아는 언제든 도와줄 생각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수히닌은 평양으로 부임하기에 앞서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 기자가 북한 대사로 가는 배경에 대해 묻자 우회적으로 “미션(임무)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미션의 구체적인 내용을 밝히지 않았지만 극동 러시아에서 남-북-러시아가 연계된 프로젝트와 남북정상회담이 담긴 임무라는 인상을 받았다. 수히닌은 2000년 7월 여권의 최고 실세와 2차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한 논의를 시도한 적도 있다.

국가정보원을 비롯한 우리 측 관계자들의 움직임도 분주했다. 지난해 9월 그리스 아테네에서 한ㆍ러 고위 관계자들의 접촉은 주목할 만하다.

노 대통령은 지난해 9월 10~11일 핀란드 헬싱키에서 열리는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에 참석하고, 14일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에 앞서 그리스를 국빈방문했다.

그 무렵 푸틴 대통령은 남아프리카공화국과 모로코를 잇달아 방문하는 아프리카 외교에 나서면서 잠시 그리스에 들렀다. 양국 정상이 아테네에 머무는 동안 물밑에서는 핫라인이 가동된 것으로 알려졌다.

두 나라 고위 관계자들이 비밀리에 접촉, 현안뿐 아니라 한반도 문제, 특히 북한과 관련한 깊숙한 얘기를 나눴다는 후문이다. 한ㆍ러 ‘아테네 회동’을 귀띔해준 인사에 따르면 양국 고위 관계자들은 남북관계에 러시아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데 인식을 같이 했고 남북정상회담 문제도 논의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한 달여 뒤인 11월 16~18일, 모스크바에서는 한국의 동아시아재단 관계자 및 국회의원들과 러시아 외교 및 극동문제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토론회가 열렸다.

한국에서는 문정인 전 대통령자문 동북아시대위원회 위원장, 김태환 연세대 교수(국제정치), 유재건ㆍ김형주ㆍ원희룡 의원 등이 참여했고, 러시아에서는 세르게이 드카첸코 러시아 외무성 차관(동북아연구소장), 이고르 이바노프 전 외교부 장관 등 전·현직 고위관계자가 대거 참석했다.

이 모임은 올 상반기 극동 러시아 연해주에서 대규모 행사를 갖고 남-북-러 3국 간에 에너지를 실제 활용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하고 국가정책에도 반영할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해 12월 17~22일 사이 세르게이 스토르차크 러시아 재무차관과 김영길 북한 재무성 부상의 회담도 주목된다. 이 회담에서는 1960년대 이후 북한이 구 소련으로부터 빌려간 38억 루블(러시아 측은 미화로 80억 달러라고 주장) 상환 문제를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근 러시아는 한국이 구 소련과 수교하면서 제공한 대러 차관 14억7,000만 달러를 탕감하는 방안을 조심스럽게 타진하고 있다. 러시아가 북한의 부채를 탕감(30억4,000만 루블)한 만큼 한국도 대러 차관을 탕감하고 대신 러시아의 철도 레일, 화차 등을 북한에 제공하자는 것이다.

러시아 정보통에 따르면 러시아의 대북 차관 탕감은 푸틴 대통령이 결정한 것이라고 한다. 푸틴은 낙후된 극동 러시아를 발전시키려면 한반도가 안정돼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북한을 6자회담으로 끌어들여야 할 필요가 있고 그 ‘당근’으로 부채 탕감을 내놓았다는 것. 나아가 한국 자본과 극동 러시아 자원, 북한 노동력을 묶어 극동 러시아를 발전시킨다는 복안도 있다고 한다.

푸틴은 2000년 7월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과 회담한 뒤 곧바로 극동 러시아로 날아가 극동개발회의를 주최, 이 지역에 대한 발전 방안을 지시하고 한국의 투자를 적극 유치하도록 당부한 바 있다.

당시 러시아의 대북 차관과 한국의 대러 차관을 상계하면서 대러 차관의 일부를 극동 러시아 개발자금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논의됐다.

극동 러시아 발전에도 큰 역할 기대

푸틴은 지난해 12월 20일 국가안보회의에서 극동지역 대책마련을 지시한 데 이어 올 1월 27일에는 극동 러시아를 방문해 세르게이 다르킨 연해주 지사를 만나 대대적인 예산 지원을 약속했다. 점차 중요성이 더해가는 극동 러시아에 대해 영향력 확대하겠다는 의미다.

북핵 해결의 방안으로 제시되는 에너지 지원과 관련해서도 최근 극동 러시아가 주목받고 있다. 북한에 안정적인 에너지를 공급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남한도 수혜국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남북철도, 시베리야횡단철도(TSR)가 연계되면 물류혁명을 이룰 수 있다..

2월 16~17일 극동 러시아 하바로프스크에서는 푸틴 대통령의 극동지역 특사인 카밀 이사하코프 등 지역 고위 관계자와 유지들이 모여 지역 발전을 도모하는 모임이 있었다. 한국인으로는 거의 유일하게 초청을 받은 러시아 전문가 L박사는 “극동 러시아는 한국의 대규모 투자를 기대하는데 그곳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열리면 획기적인 기폭제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L박사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의 1월 방문 이후 극동 러시아 지식인들 사이에서 남북정상회담 얘기가 확산되는 분위기라고 한다.

노무현 대통령이 로마에서 언급한 ‘남는 장사’가 남북정상회담을 염두에 두고 한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실제 극동 러시아에서 푸틴 대통령의 주선으로 남북정상회담이 열린다면 남북관계, 남-북-러 3국의 연계 발전을 고려해볼 때 결코 밑지는 장사는 아닌 셈이다.

러시아 고위 정보통은 남북정상회담이 극동 러시아에서 열릴 경우 6ㆍ15 정상회담 7주년 행사 때 남북이 공동 발표한 뒤 8월 15일 광복절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뤄질 가능성이 높다고 전망했다.

어쨌던 북한이 핵폐기 프로그램 일정을 약속대로 이행한다면 한반도에는 예상밖의 변화가 몰려올 것임은 분명한 것 같다.


박종진 차장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