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찬 방북 때 수히닌 북한 주재 러시아 대사 접촉 통한 회담 시기·장소 조율설

“모든 관심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만나느냐에 있더군요. 설령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것이라 해도 ‘왜’하는지에 더 많은 관심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요?”

노무현 대통령의 정무특보인 이해찬 전 총리의 ‘평양행’배경을 놓고 정국이 시끌한 가운데 최근 극동러시아를 다녀온 러시아 전문가 L박사는 우려섞인 견해를 밝혔다. 정치권이 이 전 총리의 방북 내용보다 대선 지형의 유·불리를 먼저 따지는 정쟁에 쓴소리를 한 셈.

L박사는 “남북관계는 특정 정파를 위해서가 아니라 국익이 달린 문제로 투명하고 정직해야 한다”면서 “이 전 총리의 방북이 남북정상회담과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L박사에 따르면 2월 28일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니꼴라에프 블라디보스토크 시장을 전격 경질하는 조치를 취해 극동러시아에 충격을 주었는데 이는 지난해 말부터 본격 추진한 극동러시아 중흥을 위한 ‘극동정책’의 일환이라는 것.

푸틴의 극동정책은 중국을 비롯한 주변 강국을 견제하기 위해선 극동지역 개발이 필수다. 이를 위해 대대적인 투자와 함께 2012년 블라디보스토크에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을 유치하는 등 국제적인 이벤트 개최에 적극 나서고 있다고 한다.

이해찬 의원이 북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과 만나고 있다.
만약 극동러시아에서 올해 남북정상회담을 하게 된다면? 남ㆍ북ㆍ러 3국에 의한 극동개발은 물론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될 것이다. 나아가 푸틴이 북한의 핵보유 포기 선언을 이끌어낼 경우 노벨평화상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지며 이는 현재 3기 연임을 금지한 헌법의 족쇄를 풀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계산도 가능하다. 최근 남북정상회담 장소로 극동러시아가 거론되고 있는 이유다.

이미 러시아는 북한을 설득해 6자회담 2ㆍ13 합의을 이끌어내는 한편 북·미 관계 개선에도 측면 지원해 그러한 수순밟기에 나선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이와 관련 L박사는 “수히닌 북한 대사를 주목하라”고 말한다. 러시아에서는 이 전 총리 일행이 평양을 방문한 목적 중의 하나가 발레리 수히닌 북한 주재 러시아 대사와의 면담이라는 얘기가 나돈다는 것.

수히닌 대사는 러시아 내 한반도문제 최고 전문가의 한 사람으로 지난해 8월까지 한국에서 러시아 부대사로 근무했다. 그가 갑자기 북한 대사로 발령난 것과 관련 L박사는 “귀국 전 수히닌 대사와 식사를 하면서 그가 ‘큰 임무’를 띠고 간다는 인상을 받았는데 최근 남북관계나 한반도 주변 국제관계를 볼 때 그것(임무)이 남북정상회담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

이해찬 전 총리의 방북이 청와대와 본인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남북정상회담 ‘길닦기’라는 해석이 가능한 정황은 여러 군데서 포착된다.

먼저 이해찬 전 총리 방북단의 면모다. 이 전 총리는 자타가 인정하는 ‘노(盧)의 사람’이고 정무특보 직함을 갖고 있는데 남북경협과 한반도평화를 위한 방북이었다면 굳이 이 전 총리가 나서지 않아도 된다. 이 전 총리의 무게라면 남북정상회담의 시기와 장소를 구체적으로 북에 타진하거나 의도를 떠볼 수도 있을 것이다.

방북단 일행에 열린우리당 이화영 의원이 포함된 점도 주목된다. 이 의원이 국회 통일외교통상위 소속이고 북한 및 동북아문제에 관심을 가져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그가 방북단에 포함된 이유라고 보기엔 불충분하다. 오히려 이 의원이 러시아를 통한 남북정상회담에 관심을 가져왔고 남ㆍ북ㆍ러 3국이 관계된 극동러시아 개발을 주장해온 점 등이 더 고려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의원은 2005년 초 노 대통령의 386 핵심 측근인 이광재 의원과 함께 남북정상회담의 디딤돌을 놓기 위한 물밑 작업을 시도한 바 있다. 그해 3, 4월 푸틴 대통령의 전권 대표인 콘스탄틴 폴리코프스키와 접촉하려 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주간한국 2005년 4월 19일자)

폴리코프스키는 김정일 위원장과 가까운 몇 안 되는 러시아 내 친북인사로 모스크바를 방문하는 김 위원장을 두 번이나 크렘린까지 수행했고 김 위원장의 부름을 받고 평양도 여러 차례 방문했다. 2004년 11월 한국을 방문해 노 대통령을 만났고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남북정상회담이 러시아에서 개최될 가능성이 있고 그렇게 되면 러시아가 건설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이 의원은 이광재 의원과 함께 2005년 3월 28~31일 극동러시아를 방문해 폴리코프스키를 만나려고 했으나 무산됐다. 4월 13일 이광재 의원이 재차 시도했지만 결국 만나지 못했다.

당시 이 의원 측은 “에너지 문제를 포함한 한·러 경제협력을 위한 만남”이라고 했지만 폴리코프스키를 포함한 연해주 정보통에 따르면 ‘정치적 목적(남북정상회담)’을 의심케 하는 요인들이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한때 폴리코프스키가 남북정상회담의 밀사 역할을 할 것이라는 얘기가 나돌기도 했다.

이화영 의원은 그 후에도 러시아 차관으로 북한철도를 개량하거나 러시아 에너지를 북한에 공급해 북한핵 문제를 풀자는 등 남ㆍ북ㆍ러 3국의 에너지, TSR(시베리아횡당철도), 차관 문제를 집중 거론했다.

하지만 그러한 내용은 L박사와 수히닌 대사가 2000년 8월부터 다뤄온 것이다. 최근 러시아는 한국의 대러 차관과 러시아의 대북 차관을 상계하고 일부 차관을 북한 철도개량 및 극동러시아 개발에 활용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이해찬 전 총리의 방북 때 수히닌 대사와의 접촉가능성을 시사해준다.

이와 관련 중국 베이징의 대북소식통은 “이 전 총리가 들고간 경협 카드는 사전에 미국과 조율을 끝낸 것으로 누구라도 방북할 수 있는데 이 전 총리를 앞세운 것은 공식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목적, 또는 비공식 인사와 접촉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며 “러시아가 6자회담에 적극 나서고 남한을 끌어들이는 모양새나 북·미 관계에도 개입하는 행보 등을 종합할 때 러시아 주도의 남북정상회담이 점쳐진다”고 말했다.

남북정상회담의 시기 및 장소와 관련해서는 여러 설이 있으나 국내외 여건 상 8월 15일 광복절이 가장 유력하게 거론된다. 장소는 서울ㆍ제주도ㆍ개성 외에 중국의 베이징 등이 나오고 있지만 극동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가 유력하게 부상하고 있다.

러시아와 북한 사정에 밝은 극동의 소식통은 “남북정상회담이 열리게 되면 러시아의 입김이 크게 작용하는 만큼 극동러시아에서 열릴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그는 또 구체적인 장소와 관련 “러시아의 극동정책과 보안 및 신변안전 등을 고려할 때 블라디보스토크 해군 함대사령부가 관리하는 루스키 섬이 유력하다”고 덧붙였다. 루스키 섬 별장은 일반인이 관망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보안이 철저해 정상회담에 적합하다는 것이다.

장소가 어디든 연내 남북정상회담 개최 분위기는 점차 무르익어간다는 느낌이다.


박종진 차장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