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문국은 경계·미국은 기득권에 초점… 곳곳서 반미시위로 이미지 상처

3월11일 콜롬비아 수도 보고타를 방문한 부시 미국 대통령이 한 여성으로부터 모자와 판초를 선물받은 뒤 어깨를 감싸안고 있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3월 14일 멕시코 방문을 끝으로 1주일간 계속됐던 중남미 5개국 순방을 마쳤다.

8일 브라질을 시작으로 우루과이, 콜롬비아, 과테말라, 멕시코를 차례로 순방한 부시 대통령은 취임 이후 가장 긴 해외 일정이었다는 데서 알 수 있듯 이번 순방에 많은 정치적 의미를 뒀던 게 사실이다. 그럼 순방을 모두 마친 지금 부시 대통령은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었을까.

남미를 휩쓸고 있는 ‘좌파 바람’의 북상을 차단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었다는 일부의 긍정적인 평가도 있다. 그러나 현지 분위기나 언론의 평가는 ‘알맹이 없는 외교’ ‘정치적 구호만 무성했던 순방을 위한 순방’이라는 싸늘한 평가가 지배적이다.

이렇게 된 데는 이번 순방이 남미의 고질병이자 가장 시급한 현안인 민생고에 대한 접근보다는 이미지 외교에 치중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남미가 얘기하고자 했던 것은 경제였는데, 미국은 경제보다는 남미에 대한 미국의 기득권을 확인하려 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남미는 전체 인구 5억 7,000만 명 중 40%가 빈곤층이다.

게다가 이 중 5,000만 명은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아가는 극빈층이다. 과거 미국이 남미에 어떠했는냐 하는 것보다 지금 미국이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느냐가 남미 국민에게는 더 절실한 문제였던 것이다.

친미성향 국가에 편중한 '절름발이 순방'

애당초 부시 대통령이 껄끄러운 국가는 모두 빼고 비교적 온건하고 친미성향의 국가만 골라 순방일정을 잡은 것도 절름발이 순방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라는 분석도 있다. 멕시코, 콜롬비아는 전통적인 미국 우방이고 과테말라, 우루과이는 미국에 대한 경제적 의존도가 다른 남미국가들보다 심하다.

브라질은 좌파 정권이지만 실용주의 노선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최우선국 방문국으로 선택됐다.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에콰도르 등 반미 정서가 상대적으로 강한 국가들이 배제된 상태에서 반미 바람을 제어할 수 있는 어떤 결실을 맺기는 애초 무망했다는 것이다.

첫 방문국이었던 브라질에서 부시 대통령은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브라질 대통령과 대체 에너지원으로 에탄올에 대한 소비를 2017년까지 늘리는 내용의 에너지 협력 청사진을 제시했다. 또 세계무역기구(WTO) 도하개발어젠다(DDA) 협상을 신속히 재개해 다음달 말까지는 진전을 이루도록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

그러나 에탄올 분야는 미국의 관세 인하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아 원론적인 입장 표명에 그쳤고, DDA 역시 정상회담의 성과를 과시하기 위해 형식적으로 들고나온 분위기용 카드에 불과하다. 우루과이와 과테말라에서는 교역 확대 문제가 논의됐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합의를 이뤘다는 소식은 없다.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부시 방문에 반대하는 시위가 히틀러 모습의 부시 사진에 '기피인물'이라고 쓴 피킷을 들고 시위하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국경을 접하고 있는 멕시코에서는 미국의 이민정책을 개혁하는데 최선을 다하겠다는 부시 대통령의 약속이 있었으나, 정작 멕시코 정부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미국의 국경장벽 문제에 대해서는 이견을 좁히지 못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펠리페 칼데론 멕시코 대통령은 정상회담 하루 전날 멕시코인의 불법월경을 막으려는 미국의 국경장벽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떠트리면서 “이주는 중단되지 않을 것이다, 법으로는 더더욱 막을 수 없다”고 말해 정상회담 분위기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이 같은 불협화음은 미국이 이번 순방에서 가장 공들인 브라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부시 대통령은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이 ‘반미’라는 화두를 앞세워 중남미를 휘젓고 다니는 데 대해 우려를 표시하면서 차베스 대통령의 기세를 견제해 줄 것을 주문했으나 “브라질은 각국의 주권을 존중할 것”이라는 점잖은, 그러나 확고한 룰라 대통령의 대답을 듣고 더 이상 차베스 문제를 입에 올리지 못했다.

반미 시위는 더욱 극성을 부렸다.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작심한 듯 부시 대통령의 순방 일정에 맞춰 바로 옆나라에서 대규모 반미시위를 주도하는 ‘맞불 순방’을 펼쳤다.

차베스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이 브라질을 거쳐 우루과이에 도착한 9일 아르헨티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축구장에서 2만 명 이상이 모인 반미집회를 이끌었다.

10일에는 볼리비아에서 “미국 대통령이 중남미를 도와주러 왔다고 말하지만, 여러분은 그에게 ‘위선자’라고 말할 것”이라며 이웃 우루과이에 있는 부시 대통령을 한껏 조롱했다. 우루과이 수도 몬테비데오에서는 6,000여 명이 격렬한 반 부시 시위를 벌여 부시 대통령과 타바레 바스케스 대통령이 시위대를 피해 수도에서 200km 떨어진 별장에서 정상회담을 갖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남미 민심 되돌리기에 실패" 평가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은 “이미 미국을 떠난 남미 민심을 부시 대통령이 되돌려 놓기는 힘들 것”이라고 보도했다. 남미의 반미감정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지만, 9ㆍ11 이후 미국의 일방주의 외교에 대한 남미 여론이 극도로 악화해 과거와 같은 대증요법으로는 효과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신문은 테러와의 전쟁 비용으로 전용되고 있는, 과거 마약퇴치나 교육기회 증진을 위해 쓰였던 대외원조 자금을 복원시키지 않는 한 미국은 현실과 이상 사이의 심각한 괴리감만 절감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부시 대통령의 남미 순방이 한창이던 9일 브라질 언론은 브라질이 남미은행 창설에 참여하고 아르헨티나와의 통상관계에서는 이중관세 폐지를 추진할 뜻을 밝혔다고 전했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구체적으로 양국 간 무역거래 대금 결제 시 미국 달러화가 아닌 자국통화를 사용하기 시작하는 7월 1일에 맞춰 남미은행 창설 및 이중관세 폐지 방침을 발표할 것으로 알려졌다.

남미은행은 미국 주도의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의 입김에서 벗어나 역내 재정문제를 남미 스스로 지원하고 해결한다는 취지로, 그동안 베네수엘라와 아르헨티나가 주도해 왔다.

정치ㆍ경제적으로 역내 맹주라 할 수 있는 브라질이 남미은행에 참여한다면 경제지원을 앞세운 미국의 남미 영향력은 더욱 약해질 수밖에 없다. 남미은행 창설은 곧 역내 최대 경제공동체인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의 결속력 강화로 이어질 수 있다.

부시 대통령은 순방 중 과테말라의 농부와 다정한 포즈를 취하고, 브라질 청소년과 춤추고, 멕시코의 마야 유적지를 돌아보는 등 과거 해외 순방에서는 없었던 여러 이벤트를 연출했다. 그러나 지금의 남미는 얼굴만 가리는 ‘페이스 페인팅(face painting)’만으로 환심을 사던 과거의 남미와는 다르다는 것이 이번 부시 순방이 남긴 교훈이라면 교훈일 수 있다.


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