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스수출국포럼 두 번째 회의에 세계가 촉각… 무기화 땐 국제 에너지 시장 큰 혼란

러시아에서 공급하는 원유와 천연가스를 원료로 가동되는 헝가리 에너지회사 MOL사의 송유관과 정유시설. 로이터=연합뉴스
가스는 석유가 될 수 있을까. 석유수출국기구(OPEC) 11개 회원국들이 세계 원유의 절반 가량을 생산하면서 휘두르는 막강한 에너지 지위를 주요 천연가스 수출국들도 따라 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이다.

에너지원으로서 천연가스가 갖는 위치는 석유에 비하면 한참 떨어지지만, 무차별적으로 진행되는 세계 에너지 확보 전쟁을 생각하면 천연가스가 갖는 전략적 가치도 높아질 수밖에 없다.

천연가스의 ‘에너지 무기화’를 점칠 수 있는 국제회의가 9, 10일 이틀간 카타르 도하에서 열렸다. 천연가스 수출국들의 모임인 ‘가스수출국포럼(GECF)’이다. 2001년 창설된 이 포럼은 2005년까지만 해도 이렇다 할 활동이 없었다.

그러나 2005년 이후 2년 만에 두 번째 회의를 가지면서 에너지 생산국 그룹으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다. 고유가 시대와 함께 국제 에너지 시장 여건이 급변한 것이 이 포럼이 활동을 재개하게 된 배경이다.

러시아·베네수엘라 등 긍정적 움직임

도하 회담은 개막 수주 전부터 국제사회의 뜨거운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포럼의 주요 회원국들이 잇따라 천연가스를 ‘자원무기화’ 할 수 있다는 뉘앙스의 발언을 쏟아내자 혹시 포럼이 OPEC처럼 생산자 카르텔 형성을 도모하려는 것이 아니냐 하는 우려 섞인 전망이 나온 때문이었다.

핵 프로그램을 놓고 미국과 팽팽한 기싸움을 벌이고 있는 이란 석유장관이 “천연가스 생산국 간 기술과 시장에 대한 관점의 공유가 필요하다”고 하자, 역시 남미에서 반미 기수를 자처하는 베네수엘라의 석유장관도 ‘가스 OPEC’에 긍정적 입장을 나타냈다. 이란과 베네수엘라는 각각 세계 2위, 9위의 가스 생산국이다.

여기에 세계 최대 가스 생산국인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흥미로운 제안”이라고 언급하면서 가스 OPEC은 세계 에너지 시장의 화두로 급부상했다.

석유, 석탄에 이어 세 번째로 에너지 활용 비중이 높은 천연가스는 매장량만 보면 GECF의 15개 회원국이 전 세계의 72%를 점유하고 있고, 생산량 면에도 절반에 가까운 42%를 차지하고 있다. ‘자원’이라는 측면만 본다면 OPEC보다 더 강력한 생산자 카르텔을 형성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다.

그러나 도하 포럼에서 참가국들은 가스 카르텔’에 대해 한결같이 한발 물러서는 모양새를 보였다. 빅토르 흐리스텐코 러시아 에너지 장관은 “러시아는 가스 카르텔에 참여할 의사가 없다”고 공언했고, 세계 3위 가스 생산국인 주최국 카타르도 “OPEC 형태의 카르텔 구성 제안은 아이디어 차원일 뿐”이라며 거리를 뒀다.

다만 OPEC 회원국 중 2위의 석유 생산국인 이란만이 ‘석유-원자력-천연가스’로 이어지는 에너지 벨트를 앞세워 천연가스 생산국들의 지위 강화 필요성을 지적해 가스 OPEC을 간접적으로 지지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매장량에서 석유보다 더 독과점 체제를 구축하고 있는 천연가스 생산국들이 카르텔을 내심 바라면서도 행동에 나서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천연가스의 독특한 생산ㆍ수요 메커니즘에 답이 있다.

우선 천연가스는 대부분 파이프를 통해 수송이 이뤄지는데, 이 파이프 건설에 막대한 자금이 들어간다. 자본이 빈약한 생산국들은 결국 서방의 거대 에너지기업에 파이프 건설을 맡기는 대신, 대가로 장기간에 걸친 천연가스 개발ㆍ판매권을 내준다. 천연가스가 최장 25년까지 구매자가 일정한 가격으로 살 수 있도록 엄격한 계약 하에 판매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생산국보다는 수입국의 입김이 더 세다는 얘기다. 매일 수요ㆍ공급의 원칙에 따라 예민하게 변동하는 유가와는 완전히 다르다. 천연가스에는 생산량 조절을 통해 가격을 주도적으로 형성할 수 없는 구조적인 한계가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운반상의 제약이다. 천연가스는 배로 운반되는 석유와 달리 파이프로 운송되는 탓에 수출국별로 판매시장이 각기 달라 시장이 국지적으로 형성돼 있다.

판매시장이 서로 다르다 보니 이해관계도 달라 OPEC처럼 생산국이 한목소리를 내기 어렵다. 또 대규모 설비투자가 필요한 파이프 건설 속성상 원거리까지 수송이 쉽지 않아 다양한 판로를 확보할 수 없고, 그렇다보니 시장의 경쟁원리가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천연가스가 아직은 석탄에 의해 대체될 수 있는 여지가 크고, 위와 같은 태생적 한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행동을 통일하는 데 자신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미·러·이란 힘겨루기에 이용될 수도

정치적 요인도 무시할 수 없다. 가스 생산 1위인 러시아의 최대 고객은 유럽이다. 유럽은 전체 가스 수입의 41%를 러시아에 의존하고 있다.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핀란드, 리투아니아, 슬로바키아 등은 100% 전량을 러시아에서 들여온다. 가스 소비시장이 이렇다 보니 공급이나 가격면에서 조그만 변동도 정치적으로 엄청난 파문을 몰고 온다. 대표적인 사례가 올해 초와 지난해 초 유럽을 흔들었던 석유, 가스 파동이다.

지난 1월 러시아는 벨로루시의 송유관을 통해 유럽으로 가는 석유 공급을 일시 끊었다. 러시아가 벨로루시에 공급하는 천연가스 가격을 두 배 이상 인상한 데 대한 보복으로 벨로루시 정부가 러시아 원유에 대해 톤당 45달러의 ‘통과세’를 부과하자, 러시아 정부가 다시 원유공급 중단이란 초강수를 들고 나온 것이다.

석유 공급에 관한 문제였지만 발단은 가스에서 시작됐다. 1년 전에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우크라이나가 2005년 친서방으로 돌아선 것에 불만을 품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공급하던 천연가스 가격의 대폭 인상을 통보했고, 우크라이나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자 가스공급을 중단했다.

우크라이나 송유관을 통해 러시아 천연가스의 80%를 수입하는 유럽 각국은 한바탕 혼란에 빠졌다. 러시아가 3일 만에 협상에 나서면서 공급은 재개됐지만 유럽은 심각한 에너지 안보위협을 절감해야 했다.

이 두 사건을 계기로 에너지 수입원 다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유럽 내부에서 터져 나왔지만, 잠시뿐이었다. 천연가스가 석유보다 매장지의 지역 편중이 더 심해 수입선 다변화가 현실적으로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아무튼 유럽이 러시아 천연가스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상황에서 러시아가 주도하는 가스 카르텔은 유럽으로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도발’일 수 있다.

가스의 OPEC화는 아직 시기상조인 듯하다. 그러나 1, 2위 가스 생산국인 러시아와 이란이 자원과 무기면에서 협력관계를 점점 공고히 하고 있다는 점은 가스 소비국들의 신경을 곤두서게 하는 부분이다. 미국에 대항해 자원을 무기화하려는 이란, 미국의 견제카드로 이란을 활용하려는 러시아가 어떤 공조체계를 펴 나가느냐에 따라 국제 에너지 시장은 물론 정치구도도 출렁거릴 수 있다.

우크라이나 천연가스 송유관. 2005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천연가스 공급을 중단하면서 러시아 가스를 공급받는 유럽 국가들이 에너지 비상에 걸리기도 했다. 로이터=연합뉴스

황유석차장 aquari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