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이어 프랑스 새정권도 친미 외교정책 표방 부시와 '밀월' 예상

지난 1월 4일 미국을 방문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백악관에서 부시 미대통령과 애기하고 있다.
유럽 정치권이 싹 바뀌었다. 프랑스 집권 대중운동연합(UMP)의 니콜라 사르코지(52) 당수가 6일 대선에서 승리해 임기 5년의 대통령 직에 올랐고, 영국에서는 10년 권좌를 지키던 토니 블레어 총리가 다음달 27일자로 총리 직에서 물러날 것을 공식 발표했다. 블레어의 후임으로는 고든 브라운(56) 재무장관이 확실시된다.

그는 다음달 24일 노동당 특별 전당대회에서 경선 없이 당수로 선출된 뒤 27일 블레어에게서 총리 직을 넘겨받는다. 영국 프랑스와 함께 유럽 3대 기축국가의 하나인 독일은 2005년 11월부터 앙겔라 메르켈(53) 총리가 사상 첫 여성 총리로서 새로운 독일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라크전이 발단이 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낡은 유럽”이라는 원색적 비난도 마다하지 않았던 프랑스와 독일이 친미성향의 정권으로 탈바꿈하고, 외교노선에서 블레어의 정책을 계승할 것으로 여겨지는 브라운 재무장관이 새로운 영국의 조타수로 떠오르면서 미국과 유럽의 대서양 동맹은 어느 때보다도 공고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공교롭게도 브라운 영국 차기 총리와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메르켈 독일 총리는 정책이나 이념, 경력 등에서 비슷한 점이 많아 이들 3인방이 앞으로 어떤 유럽을 만들어 갈 것인가도 비상한 관심거리다.

드라마틱한 인생 역정 거친 지도자들

세 사람은 모두 2차 대전 이후에 태어난 50대 초ㆍ중반의 전후 세대로 신자유주의를 바탕으로 한 성장우선 정책과 친미적인 외교정책을 표방하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경력은 최고지도자로 등극하기까지 모두 드라마틱한 과정을 거쳤다.

브라운 차기 총리는 영국 주류 정치가들을 배출한 잉글랜드가 아닌 스코틀랜드 태생의 목사 아들이다. 학창 시절 수재로 소문나 남들보다 두 살 일찍 명문 에든버러 대학에 들어갔다. 1968년 이른바 ‘68세대’로서 좌파 운동권의 핵심인물로 활약했다.

변호사의 아들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에서 록밴드를 했던 블레어 총리와는 성장 배경이 판이하다. 헝가리계 이민 2세인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프랑스 최초의 이민자 집안 출신 대통령이다. 학력 역시 유력 정치인을 독점 배출하다시피 하는 그랑제콜이 아닌 일반 파리정치대학을 졸업했다.

‘독일의 마거릿 대처’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메르켈 총리는 서독 함부르크에서 태어나 목사인 아버지를 따라 동독으로 이주해 그곳에서 자랐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1989년 35세의 나이에 정치에 입문해 헬무트 콜 정부 밑에서 여성ㆍ환경 장관을 지낸 뒤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라는 역사를 만들어냈다. 모두 정치적 아웃사이더라는 불리한 배경을 딛고 자수성가한 집념의 지도자들이다.

성격도 유창한 언변과 준수한 외모, 이미지 정치의 대가들이었던 전임자들과 달리 소탈하면서 강한 추진력을 가진 깐깐한 실무형이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는 거리가 먼 일벌레 스타일이다. 이런 대중 친화적 경력은 이들이 좌·우파라는 이념보다 실용주의를 우선시하는 정책과도 일맥상통한다.

이들의 핵심의제는 경제개혁이다. 특히 메르켈 총리와 사르코지 대통령은 철저한 시장주의자이다.

브라운 차기 총리 역시 ‘성장과 분배의 조화’라는 블레어 총리의 ‘제3의 길’을 실제 입안한 이론가로서 영국 경제의 호황을 이끈 숨은 주역이다. 노동당이 보수당의 18년 아성을 무너뜨리고 1997년 집권했을 때 통화정책 결정권을 영국 중앙은행에 맡기자고 블레어 총리에게 제안한 사람이 바로 브라운 장관이었다. 영국 경제의 부흥기는 이때가 시발점이었다.

미국과의 관계는 핑크빛이다.

사르코지가 대통령 당선을 확정짓자 가장 먼저 축하전화를 건 지도자가 부시 미국 대통령이었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특히 자크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과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독일 총리가 이라크 전쟁으로 인해 미국과의 관계를 극도의 긴장관계로 몰고 갔던 것과 비교하면 사르코지나 메르켈의 등장은 격세지감을 느끼게 할 정도로 미국과의 동맹을 강조하고 있다.

사르코지 대통령이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고 있고, 미국이 기후변화협약 교토의정서에 서명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비판적 목소리를 내고 있지만, 이는 전통적인 드골주의에 입각한 프랑스 민족주의의 목소리를 대변한 측면이 강하다는 게 중론이다.

영국 차기 총리 부시와 거리두기 예상

세 지도자 중 상대적으로 검증을 필요로 하는 인물은 브라운 차기 총리이다. 이는 그가 앞으로 어떤 정책을 펼지에 대한 예측가능성이 다른 두 지도자보다는 떨어진다는 뜻이다. 블레어 총리 밑에서 10년 동안 재무장관을 했지만 경제 이외의 현안에서는 특별한 자기 색깔을 드러낸 적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블레어 총리가 ‘부시의 푸들’이라고 조롱받을 정도로 이라크전에 대해 혹독한 여론의 비판을 받은 것을 감안하면 브라운 차기 총리는 이런 점에서는 미국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려 할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러나 그가 여론을 주도하는 설득력이 부족하고 당내 정치기반이 취약하다는 점에서 대미관계와 악화한 대 정부 여론을 어떻게 조율해 나갈지는 의문이다.

새벽부터 밤까지 일밖에 모르고 개인적인 감정을 드러내는 일이 거의 없어 ‘철의 재상’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으나, 이는 현안을 조정하고 통합해야 하는 지도자의 덕목에서 볼 때는 부정적일 수 있다. 브라운 차기 총리는 2001년 딸을 생후 10일 만에 뇌출혈로 잃었는데, 한 인터뷰에서 죽은 딸 이야기를 하며 눈물을 흘렸다는 게 언론의 화제가 될 정도로 표정 없는 정치인으로 유명하다.

사르코지 대통령에게 대권을 물려주고 40년 정치무대에서 은퇴한 시라크 전 프랑스 대통령과 달리 블레어 영국 총리는 퇴임 후에도 활발한 활동을 할 것으로 알려졌다. 블레어 총리는 특히 9ㆍ11 테러와 7ㆍ7 런던 테러를 겪으면서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간 갈등의 뿌리에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퇴임 후 종교간 화해를 증진하는 국제 종교재단을 만들 것이라는 게 측근의 전언이다. 일간 더 타임스는 블레어 총리가 ‘빌 클린터 재단’을 모델로 이 재단을 통해 지구온난화, 아프리카 개발, 중동 평화협상 등에도 적극 나설 것이라고 전하면서 그러나 그가 친미 색채가 워낙 강해 이슬람 진영의 공감과 지원을 받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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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전임 시라크와 달리 친미성향의 정책을 펼칠 것으로 보인다.

황유석기자 aquari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