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27개국 정상 통합조약 기본안에 합의단일통화 경제권 탄생 이후 가장 큰 진전, '정치 거인' 향한 의미있는 전진

'유럽연합(EU) 조약' 성사의 최대 공헌자인 앙겔라 메르켈(왼쪽) 독일 총리가 23일 정상회담 결과를 발표하는 기자회견장에서 호세 마누엘 바로수 EU집행위원장으로부터 꽃다발을 선물받고 기뻐하고 있다.
유럽연합(EU)이 ‘유럽합중국’을 향한 의미있는 한 발을 내디뎠다. EU 27개국 정상들이 EU 내 최대 현안이었던 새로운 통합조약의 기본 골격에 합의함으로써 정치통합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지난달 23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열린 정상회의에서 EU는 기존의 헌법안을 대체하는 개정조약(reform treaty)에 합의, 2005년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헌법안이 국민투표로 부결된 뒤 2년여 동안 개점휴업 상태에 있던 통합작업을 일단락지었다.

이번 조약 합의는 유럽 단일통화 경제권을 탄생시킨 마스트리히트 조약 이후 가장 큰 진전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지난 3월 25일로 창설 50주년을 맞은 EU로서는 큰 자축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이번 조약은 당초 추진했던 헌법안보다는 내용과 형식면에서 후퇴한 면이 있으나, 핵심 조항은 상당 부분 관철돼 앞으로 EU가 27개 국가의 수평적 모임이 아닌 초국가적 공동체로서 국제사회의 발언권을 강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개정 조약이 발효되면 EU는 기후변화, 중동문제 등에서 미국에 비견하는 영향력을 행사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 회원국 거부권 남용 막을 이중다수결제

개정 조약의 내용은 EU를 대표하는 대통령 직과 대외관계를 총괄하는 외교안보정책대표(High Rerepresentative)를 신설하는 한편, 행정부의 역할을 하는 집행위원회 규모는 줄이고, 의사결정 과정을 기존 만장일치제에서 이중다수결제로 바꾼 것 등이 골자이다.

대통령 직은 현재 회원국 정상이 돌아가며 6개월씩 순회 의장을 맡아오던 방식에서 벗어나 임기 2년 6개월, 1회 연임이 가능한 대통령을 뽑아 EU를 대표하도록 했다. 6개월짜리 순회 의장으로는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정책수립이 어렵다는 판단에서다. 외교대표는 헌법안에서 규정했던 외무장관보다는 명칭면에서는 후퇴했다.

그러나 권한과 직무 등 내용면에서는 외무장관 직의 취지를 대부분 살렸다는 평가이다. 부통령 역할을 하면서 EU의 외교전략을 주도하고 회원국 외무장관 회담을 주재하는 역할을 맡는다.

현재 위기관리를 맡고 있는 하비에르 솔라나 외교정책대표와 구호예산, 대외관계 직원을 통제하는 베니타 페레로_발트너 대외관계 담당 집행위원 직이 신설되는 외교대표로 통합될 전망이다.

현재 회원국별로 한 명씩 27명의 위원을 두고 있는 집행위원회는 2014년까지는 현재의 틀을 유지하되 그 이후에는 집행위원 수를 회원국 수의 3분의 2인 18명으로 줄이기로 합의했다.

현 집행위원회가 각국 의견을 수평적으로 청취하는 느슨한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비판에 따라 보다 효율적이고 강력한 통합체제로 바꾸기 위한 취지이다.

이번 조약 합의 과정에서 가장 뜨거운 논란거리가 됐던 것은 이중다수결 제도였다. 이는 회원국 55%(15개국) 이상의 찬성과 찬성국가의 인구가 EU 전체 인구의 65% 이상이어야 한다는 점을 의사결정의 조건으로 규정한 것이다.

EU가 27개국으로 급격히 덩치가 커지면서 현재의 만장일치제로는 회원국의 거부권 남용을 막을 수 없고 신속한 의사결정도 요원하다는 인식에서다.

그러나 이중다수결 제도에 대해 폴란드가 강력히 반대하면서 한때 조약 협상 자체가 결렬될 위기까지 맞았다. 폴란드의 반대 이유는 역사적으로 구원이 있는 독일이 이중다수결제의 최대 수혜자가 된다는 것 때문이었다.

인구가 8,200만 명으로 EU 내 최대인 독일이 이중다수결제가 채택되면 발언권이 가장 세질 것을 우려한 것이다.

다행히 이중다수결제의 당초 계획했던 적용시기를 2009년에서 연기, 2014년부터 단계적으로 확대 적용해 2017년 이후 전면 실시하는 것으로 도입 시기를 조정하는 선에서 타협이 이뤄졌다.

순회 의장국으로서 이번 개정 조약을 가장 강력하게 밀어붙였던 독일의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최종 타협안마저 레흐 카친스키 폴란드 대통령이 거절하자 폴란드 없이 나머지 26개국만으로 조약안을 처리하겠다는 ‘협박성 최후통첩’까지 한 것으로 전해졌다.

■ 각국 이해관계에 따른 예외조항은 옥의 티

이번 개정 조약이 여러 개별국가의 요구를 받아주면서 여러 예외조항을 둔 것은 아쉬운 부분이다. 영국은 EU의 기본권 헌장이 국내법과 충돌한다는 이유를 들어 경찰, 사법, 노동, 조세 등 4개 조항에서 예외를 주장, 관철시켰다.

EU의 기본권을 받아들일 경우 근로자 해고 권한 등이 제한될 수 있다는 것인데, 복지, 고용 등 국가정책의 근간에 대해서는 EU의 간섭을 배제하겠다는 의중을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프랑스도 EU 창설 이후 50년 동안 지켜져 온 ‘자유롭고 왜곡되지 않은 경쟁’이라는 핵심규정을 조약안에서 제외하도록 했다.

이 조항이 경쟁을 중시하는 영미식 경제정책을 답습한 것이라는 이유에서다.

그러나 경쟁 조항의 삭제는 보호주의나 불법보조금 등에 대한 EU 정책에 혼선을 초래할 수 있고, ‘반독점 감시자’라는 명성을 갖고 있던 EU의 이미지를 손상시킬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밖에 단일국가를 상징하는 헌법이 아닌, 개별 회원국이 주도하는 ‘기구’에 묶어둔다는 의미가 강한 조약이라는 방식을 선택한 것도 불가피한 것이었지만 회원국들의 국내법을 EU 차원에서 통일해야 한다는 장기적 과제를 남겼다.

EU를 상징하는 국가나 국기의 제정 문제는 이런 이유 때문에 이번에 채택되지 못했다.

로마노 프로디 이탈리아 총리가 조약안 합의 뒤 “유럽의 목표보다는 자국의 이익을 앞세우고 있다”며 “공유된 정신이 보이지 않는다”고 강력히 비판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다.

개정 조약은 올해 말까지 최종안을 마련한 뒤 내년에 각국 의회의 비준을 거쳐 2009년 6월 유럽의회 선거 이전에 발효될 예정이다. 조약을 성문화하는 작업은 하반기 의장국인 포르투갈이 주도하는데, 7월 23일 시작되는 정부간회의(IGC)에서 조약문이 확정된다.

EU는 조약안에 합의함으로써 수년 동안 소모적으로 치달았던 헌법논쟁을 마무리짓고, 국제현안에 역량을 집중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국내총생산(GDP) 기준 세계 최대 단일시장인 ‘경제적 거인’이면서 ‘정치적 난쟁이’라는 수모를 받아온 EU가 ‘정치 거인’이 될 수 있을지는 지금부터가 관건이다.

회원국들 간 법적, 제도적 틀을 통일하고, 동서 유럽 간 경제적 격차를 해소해야 하는 것 등은 ‘유럽합중국’을 지향하는 EU의 여전히 어려운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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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6월 EU 의장국인 오스트리아 빈을 방문한 부시 미국 대통령이 하인즈 피셔 대통령과 회담하고 있다. EU조약이 발효될 경우 EU는 미국에 견줄 국제적 영향력을 갖게 된다.

황유석 기자 aquarius@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