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 대북정책 구체화 때까지 일단 관망… 군부, 대대적 인적교체로 만반의 준비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전종수 조평통 서기국 부장 등 실세로 떠올라김정일 측근·군부의 파워게임… 권한 대폭 강화된 국방위 움직임 주목

북한은 표면상 이명박 정부에 침묵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19일 대선 이후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 공식적인 반응을 하지 않은데 이어 25일 이 대통령 취임에도 침묵을 지켰다. 남한의 역대 대통령 선거와 새 정부 출범 때마다 비난 일색의 성명을 내왔던 것과는 대조적인 태도다.

북한 전문가들은 북핵 문제와 북ㆍ미관계 개선의 시급성, 남한 및 국제사회와의 경제협력 필요성 등을 의식해 '관망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분석한다.

백학순 세종연구소 남북관계 연구실장은 "북한은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겠지만 그것이 구체화할 때까지 계속해 지켜보겠다는 입장"이라며 "북한 정권 안정을 위해 남북경협과 경제ㆍ에너지 지원 등이 절실한 상황에서 굳이 남쪽과 ''척'을 지려고 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 하지만 기자가 지난해 10월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해 북한의 대남라인을 추적한 결과 북한의 침묵은 외부에서 인식하는 것과 꽤 거리가 있다. 즉 침묵하는 모양새를 취하면서 내부적으로는 향후 국제관계나 남한과의 관계를 고려해 치밀한 대응 전략을 짜오고 있는 것이다.

미국 뉴욕 필하모니 오케스트라가 평양에서 공연하는 동안 무대 뒤에선 북ㆍ미 관계자들이 북핵 문제를 논의한 것은 대표적인 예다. 윌리엄 페리 전 미 국방장관, 도널드 그래그 전 주한 미 대사는 공연일인 26일 평양에서 북한의 김계관 외무성 부상과 오찬을 하며 '부시 대통령 임기 내 북핵 문제를 조속히 해결하자'는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의 메시지를 전했다.

북한이 지난해 말부터 대남 업무를 담당했던 통일전선부와 민경련(민족경제협력연합회) 인사들을 대대적으로 물갈이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에 앞서 북한은 올해 신년사에서 이례적으로 '남북경협'을 강조했는가 하면 장명선 주 이집트 북한 대사는 올 초 남북한 비무장지대(DMZ)에 자유지대(free zone)를 설치해 공장을 건설하는 계획을 밝히기도 했다.

이처럼 북한은 침묵하고 있는 게 아니라 남한의 새 정부에 대해 끊임없이 '변화'의 메시지를 전해왔다. 그리고 이미 이명박 새 정부에 맞춰 대남 전략을 수정하고 남한을 상대하는 대남창구를 싹 바꾸었다.

지난 10년 간 남한을 상대한 북한의 대남창구는 통일전선부(통전부)였다. 김대중 정부 시절엔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아ㆍ태평화위)'란 간판을 앞세워 남한을 상대했고, 노무현 정부 때는 대체로 통전부가 직접 나섰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의 출범을 전후해 아ㆍ태평화위와 통전부의 위상은 크게 위축됐다. 지난해 10ㆍ4 남북정상회담의 주역인 최승철 아ㆍ태평화위 및 통전부 부부장이 남북 무대에서 자취를 감추고 그동안 대외경제 창구로 각광을 받았던 민경련(민족경제협력위원회) 간부들이 비리 혐의 등으로 자리에서 물러난 것은 대표적인 예다.

이처럼 통전부의 위상을 한순간에 무너뜨리고 대남창구를 변경시킨 장본인은 북한 군부다. 이는 아ㆍ태평화위와 통전부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측근그룹의 영향을 받아왔다는 점에서 의미하는 바가 크다.

즉 김정일 위원장 및 측근그룹이 북한 군부의 파워를 무시할 수 없을 만큼 군부가 북한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말해준다. 또한 이명박 정부에서는 북한 군부가 대남 전략과 창구 역할에 적극적으로 개입할 것임을 시사한다.

흔히 북한을 '김정일의 나라', 그래서 김정일 위원장이 당, 군부, 내각 모두를 좌지우지하는 1인 통치 국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와 다르다는 게 북한 내부 사정에 정통한 이들의 공통된 견해다.

이들은 "북한은 김정일의 나라이기보다 '군부의 나라'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말한다. 김정일 위원장이 통치권자의 위치에 있지만 실제 북한 주민들의 주거, 식량, 교통, 노동 등 실생활을 지배하는 것은 군부라는 것이다. 그래서 북한 주민에 대한 실질적인 영향력은 김정일 위원장보다 군부가 훨씬 크다고 한다.

북한이 선군정치를 최우선으로 앞세우는 것이나 김정일 위원장이 매년 초도순시를 군부의 힘이 가장 강한 황해도의 해주 방문부터 시작하는 것도 겉은 맥락이다. 서해교전이 군부 주도로 발생한 것이나 남북합의 사항이 시행을 앞두고 종종 중단되는 것도 군부 때문이다.

다시말해 북한체제는 김정일 위원장 및 측근그룹과 군부와의 견제와 협력 속에 유지된다고 할 수 있다. 지난 10년 간 남북관계 역시 그러한 북한내 두 파워그룹의 역학관계 속에서 변화를 거듭해왔다.

김정일 위원장은 1994년 김일성 사후 '고난의 행군기(1995~97년)'를 거치는 동안 군부의 지원을 받아 통치해왔다. 그러나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계기로 김정일 위원장 그룹이 군부를 제끼고 전면에 나서는 일이 발생했다. 98년에 이르러 극심한 식량난과 에너지난에 처하자 김정일 위원장 그룹이 중심이 돼 생존전략으로 남한을 활용하는 방안을 채택한 것. 남북정상회담 조건으로 남한으로부터 엄청난 경제적 지원을 받게 되면서 선군정치를 앞세워 온 군부의 위상이 훼손됐다.

당시 김정일 위원장 그룹의 핵심 멤버는 김용순 아ㆍ태위원장 및 통전부장(2003년 10월 사망), 전금철 조평통 부위원장(2007년 9월 사망), 송호경 아ㆍ태위 부위원장(2004년 9월 사망) 등이었다. 김용순 통전부장 후임으로 기용됐던 임동욱 통전부장(2006년 8월 사망), 장관급회담 북측 단장을 지낸 김령성 내각참사 등도 1세대 주요 대남라인이다. 이 때 통전부(아ㆍ태위)의 위상이 최고조에 달했고 산하기관인 민경련, 민화협(민족화해협의회)도 대남 창구의 중요 임무를 담당했다.

그러나 2002년을 전후해 남북경협의 두 축인 김대중 정권이 막을 내리고 정몽헌 회장의 현대그룹의 지원이 줄어들면서 군부의 반격이 가해졌다. 통전부, 아ㆍ태위의 김용순ㆍ송호경ㆍ전금철ㆍ김영성 등 주요 인사들이 현직에서 대거 제거됐다.

이후 통전부 대신 내각에 힘이 실리고 남한이 경협의 중심으로 부상했다. 2004년 박봉주 내각이 출범하고 그해 7월 민경련을 대신해 총리 휘하의 '고려민족경제위원회'가 전면에 나섰다. 산하 기관인 '임가공복무총국'은 실질적인 대남경협을 담당했다. 2006년 초 김정일 위원장의 매제인 장성택 노동당 행정부장이 당 중심으로 복귀한 것도 남북경협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렇듯 북한 군부와 김정일 위원장측의 상보적인 행보는 2006년 중반 북핵을 둘러싸고 미국과 중국의 대북 압박이 거세지면서 선군정치를 중시하는 군부와 민생경제를 우선시하는 경제부흥파 간에 갈등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북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 후 악화된 북미관계가 그해 11월 미국 총선거에서 부시정부가 패배하고 이듬해 6자회담에서 2ㆍ13 합의가 성사되면서 군부와 김정일 위원장 그룹은 절체절명의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전력하기로 했다.

2007년 3~5월 북한이 군부, 내각, 외교 및 대남라인 등에서 대대적인 인적 교체를 단행한 것은 그러한 배경에서다. 두드러진 점은 국방위원회 참사였던 김양건이 통전부 부장으로 취임한 것이다. 또한 북한 군부의 2인자였던 김영춘 전 참모총장이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취임함과 동시에 전임되었고 이명수 전 인민군 작전부장이 국방위 전임으로 전임되는 등 국방위의 권한이 대폭 강화됐다.

아울러 경제를 담당했던 박봉주 내각 총리를 전격 해임하고 1994년부터 해운부장을 맡아온 김영일을 앉힌 것은 경제에 비중을 둔 조치였다. 김영일 인사에 장성택 행정부장이 관여했다는 북한 소식통의 전언도 있다.

북한 권력에 정통한 베이징의 소식통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북한의 침묵'에 대해 "북한은 이명박 정부의 대북 정책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뿐 단순히 '침묵'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다"며 "내부적으로 남한과 '민족경협'을 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명박 대통령이 4월 미국을 다녀 온 뒤 어떤 태도를 취하느냐에 따라 북한도 그에 따른 대응을 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또 북한의 향후 대남창구에 대해 "군부가 결정할 것이다"고 말했다. 현재 북한 내부에서 추진중인 '해방 60년사 정리'라는 큰 흐름에 군부가 중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도 한 배경이라고 설명했다.

그에 따르면 지난 2005년 8ㆍ15 민족 축제 때 북한 방문단이 해방 후 처음으로 현충원을 참배한 것은 북한이 '해방 60년사 정리'의 일환으로 '민족 대 민족'차원에서 남북이 경협을 포함한 통 큰 교류를 하자는 메시지를 행동으로 보인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앞으로 장성택 행정부장과 전종수 조평통 서기국 부장을 주목하라"고 덧붙였다.

이명박 정부는 남북관계와 관련 '실용주의'적 접근을 제시했다. '선(先)비핵화-후(後)경제지원'이란 상호주의 원칙에 입각한 '비핵개방 3000' 등을 대북정책의 골간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에대해 북한 내부 사정에 정통한 이들은 "북핵을 전제조건으로 다룰 경우 남북통로가 차단될 수 있다"며 "북핵 문제는 6자회담에 맡기고 경제 중심의 교류를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실제 북핵은 과거 숨겨놓은 핵, 현재의 핵, 미래의 핵 3종류가 있으며 2ㆍ13합의는 현재의 핵을 다루고 있다. 과거의 핵은 북한이 절대 포기하지 않고 미국도 그러한 사실을 잘 알기에 부시 정부의 북핵 협상에서 사실상 제껴두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선비핵화-후경제지원'의 상호주의 원칙을 강력하게 고수할 경우 남북대화와 교류는 답보 내지 후퇴할 가능성이 높다.

향후 남북관계에서 이명박 정부가 상대할 대남라인은 김정일 위원장 그룹의 표면적인 대남 요원이 아니라 이들의 배후 실세인 군부라고 할 수 있다. 때문에 새 정부 내에 북한체제의 특수성(김정일 위원장과 군부의 이중적 관계)을 알고 있는 전문가들이 얼마나 있느냐 하는 것도 앞으로 남북관계에 관건이 될 전망이다.

■ 북한의 대남경협 창구 변화

남북 경협이 시작된 것은 1990년대 초반 대남 사업을 통괄하던 아ㆍ태위원회가 박경윤 금강산국제그룹 회장에게 '고려민족발전위원회' 설립을 위임하면서부터다.

이후 경협 과정에서 고려민족발전위원회에 문제가 발생하자 아ㆍ태위는 평양에 삼천리총공사와 광명성총공사를 두고 대남경협을 담당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들 기관의 실적이 떨어지자 아ㆍ태위가 직접 나서 중국과 국내에 민경련과 민화협 등을 설립하고 각각 경제와 사회ㆍ문화ㆍ체육 교류를 주관토록 했다.

하지만 이들 기관 역시 전문성이 부족하고 금전적인 비리 등이 발생해 2004년 7월 민경련을 대신해 내각 총리 아래 고려민족경제위원회를 신설하고 대남 경협을 담당토록 했다. 특히 산하에 임가공복무총국을 두고 실현 가능성이 높은 임가공에 주력하면서 대남 경협을 확대해 간다는 방침을 세워놓고 있다.

이명박 정부가 출범하면서 북한의 대외경제 창구로 '대경추(대외경제협력추진협의회)'가 부상할 전망이다. 대경추는 90년대 중반 나진ㆍ선봉과 북-중 경협을 담당했던 기관으로 그동안 명맥만 유지해 왔지만 민경련, 민화협의 기능이 축소되면서 대남 창구의 간판으로 나설 것으로 보인다. 이 또한 북한 군부 등 실세그룹의 전략적 판단에 따른 것으로 앞으로 내각이 남북경협의 주도적인 역할을 할 것임을 예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박종진 차장 jjpark@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