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원 민족주의 등 '빗장걸기' 나선 국가들 우후죽순국제질서 새판짜기 예고

‘신내셔널리즘’이란 용어가 화두다. 20년 가까이 세계를 쥐락펴락했던 미국식 세계화에 대한 반작용에서 나온 새로운 민족주의 경향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최근 “세계는 이제 더 이상 과거처럼 평평하지 않다”며 “세계화의 시대가 끝나고 국가권력이 다시 목소리를 내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선언했다. ‘평평하지 않다’는 것은 뉴욕타임스의 간판 칼럼니스트인 토머스 프리드만이 3년 전 쓴 ‘세계는 평평하다’는 제목의 저서를 패러디한 것.

10년 전만 해도 아시아와 남미, 러시아 같은 개발도상국들이 세계화의 전도사격인 국제통화기금(IMF)이나 세계은행에 손을 벌렸는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져 세계가 다시 울퉁불퉁해지고 있다는 주장이다.

‘세계화의 사교장’이라는 다보스 포럼도 올해 1월 회의에서 서브프라임모기지(비우량주택담보대출) 사태로 야기된 금융위기가 세계화의 부작용으로 대두됐다고 결론지으면서 새로운 형태의 보호주의가 등장할 가능성을 예고했다.

신내셔널리즘이 태동하게 된 것은 2001년 발생한 9ㆍ11 테러가 직접적인 배경이다. 전대미문의 이 테러를 계기로 국가 안보는 오직 개별 정부에 의해 담보될 수 밖에 없다는 인식이 확산됐고, 이는 국가의 목소리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여기에 2004년부터 노골화한 자원ㆍ투자 경쟁이 국가주도로 이뤄지면서 평평했던 국경은 넘나들기 힘든 울퉁불퉁한 모습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조류로 등장한 신내셔널리즘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표출되고 있으나 크게 보아 5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첫번째로 국부펀드의 등장이다.

정부가 풍부한 유동성을 바탕으로 펀드를 조성해 세계 자본ㆍ부동산 시장에 투자하는 국부펀드는 이제 세계 경제를 주무르는 큰손으로 자리잡았다. 규모도 지난 3년간 연평균 24%씩 늘어나 지난해에는 총 3조 5,000억 달러에 달했다. 이는 영국 독일 프랑스의 국내총생산(GDP)을 모두 합한 것보다도 많은 규모다.

이런 추세라면 2015년에는 미국 경제규모를 넘어서고, 2016년에는 세계 최대 통합경제권인 유럽연합(EU)도 능가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도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반감을 가진 대표적 지도자다.

국부펀드 못지 않은 세계화의 최대 도전은 각국이 경쟁적으로 높이고 있는 해외투자 장벽이다. 2006년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의 국영기업 두바이포트월드(DPW)가 미국의 동부항만 운영권을 인수했다 미국 정치권의 강력한 반발에 부닥쳐 인수가 백지화하고 결국 미국의 세계적인 보험금융사인 AIG 그룹에 운영권이 재매각된 것이 상징적이다.

이후 국가안보에 민감한 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를 내세워 정부가 세계화의 존립 근거라 할 수 있는 자유로운 시장에 개입해 민간의 경제활동을 제약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중국해양석유(CNOOC)의 미국 석유회사 유노칼 인수가 같은 논리로 좌절됐고, 중국의 통신장비업체인 화웨이의 쓰리콤(3Com) 인수도 미국 재무부가 제동을 걸었다. 쓰리콤이 국방부에 납품하는 미국의 주요 통신업체라는 게 인수 불허의 이유였다.

지난 5일에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자국의 전략산업에 대한 외국인 투자를 제한하는 법안에 서명했다. 외국 민간기업이 러시아의 원유 원자력 항공우주 무기 천연자원 등 42개 업종에 종사하는 회사의 지분을 50% 이상 인수할 경우 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정부 위원회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다. 외국 국영기업에게는 지분이 25% 이상으로 더욱 까다롭다.

세번째는 자원민족주의이다. 석유 가스를 비롯한 에너지와 각종 원자재를 확보하려는 경쟁이 전쟁의 양상으로까지 격화하자 자원보유국들의 자원무기화 경향은 한층 노골화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가 우크라이나에 공급하던 천연가스의 파이프 밸브를 잠그겠다고 위협해 이 파이프를 통해 가스를 공급받는 유럽이 일대 혼란에 빠지는가 하면 미국과 핵문제로 으르렁대고 있는 이란은 전세계 원유 수송량의 25%가 지나가는 페르시아만의 호르무즈 해협을 봉쇄하겠다는 협박을 서슴지 않고 있다.

베네수엘라는 서방 다국적 기업이 소유한 32개 유전사업에 대한 계약을 일방적으로 바꿔 정부가 60% 이상의 지분을 확보할 수 있도록 하는 ‘자원의 국유화’를 단행했다. 자원에 관한한 세계화는 종적을 감춘 지 오래다.

최근 심각한 양상으로 치닫고 있는 곡물파동에 따른 각국의 식량통제 움직임도 반세계화의 단면이다. 곡물가격이 지난해 이후 2배 이상 치솟으면서 베트남과 태국 등 쌀 수출국과 카자흐스탄 등 밀 수출국들은 자국민 보호를 이유로 잇단 금수조치에 나서고 있다. 특히 식량은 TV나 냉장고와 달리 정치 경제 사회적으로 복잡하고도 다양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어 식량안보를 내세운 수출국가의 ‘빗장 걸어잠그기’는 더욱 기승을 벌일 전망이다.

인터넷 민족주의가 마지막 대표적인 사례이다. 국경없는 가상세계라는 세계화의 상징인 인터넷의 IT(정보기술) 업체들은 러시아 중국 인도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압력에 굴복해 이들 국가에서는 고유언어로 된 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닷컴(.com)과 닷오그(.org)는 중국어와 힌두어 등으로 씌어진 주소로 바뀌고 있다. 글로벌의 신성불가침 영역인 듯 싶었던 인터넷에도 국가 간 분할주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쇄국적 민족주의가 도래한 것은 물론 세계화가 가져온 부정적 유산이 1차적인 원인이다.

모든 제한과 장벽을 제거해 자유롭고 공정한 경쟁을 유도함으로써 모두가 잘 사는 세상을 만든다는 것이 세계화의 논리이지만, 이는 현실에서는 자본과 인력의 일방적 흐름을 야기했다. 자유로운 경쟁을 강조하다보니 필연적으로 강대국, 특히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이 주도하는 경제질서가 세계화의 질서로 고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강자에 의한 자원착취, 가난한 나라의 두뇌유출, 다국적 투기자본에의 예속은 이런 측면에서 당연한 결과였다. 세계화로 지구촌 극빈층이 크게 줄었다고 하지만, 부자와 가난한 자의 소득 불균형은 오히려 더 커졌다.

시사주간 뉴스위크는 최신호에서 새로운 민족주의는 미국이 아닌 ‘다른 국가들의 부상(Rise of the Rest)’에 기인한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미국의 독점을 극복하기 위한 시도가 산업 금융 문화 등의 분야에서 이뤄지고 있고, 상당량의 권력은 이미 미국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세계화의 반작용으로 등장한 신민족주의가 어떤 결과를 낳을지 예단할 수 없지만, 세계가 또 한바탕 새로운 질서의 산고를 겪어야 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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