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봉산 연봉이 구봉저수지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칡이 많아 '갈거'… 계곡 폭포 절경

오래 전 일이다. 동상 연동 마을에서 연석산에 오른 뒤 운장산-복두봉-구봉산을 잇는 능선 길을 더듬어 주천 윗양명 마을로 내려오는 9시간 남짓한 종주 산행에 나섰다. 그때 복두봉 일원에서 굽어본 길고도 깊은 골짜기에 마음을 빼앗겼다. 지도에도 이름이 나와 있지 않아 호기심을 더욱 부추겼다. 다만 계곡 하류 쪽에 '갈거'라는 마을이 표기되어 있어 그 비슷한 이름일 것이라는 짐작을 할 수 있을 뿐이었다.

이듬해 여름 기어코 그 골짜기를 찾아갔다. 계곡으로 들기 전에 갈거마을 주민에게 골짜기 이름과 유래를 물어보았다. 칡이 많아 갈거(葛巨), 그 마을 안쪽에 있는 골이어서 '갈거리안골'이라 일컬어왔는데 이를 줄여 '갈거계곡'이라고 흔히 부른단다. 그러더니 나그네에게 겁을 잔뜩 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호랑이가 살았던 깊은 골로 1970년 무렵 멧돼지를 잡으려고 놓은 올무에 호랑이가 걸려 생포했다는 얘기, 지금도 멧돼지 떼가 출몰하니 깊이 들어가지 말라는 엄포, 갈거리안골 최고 절경은 정밀폭포지만 워낙 먼 데다 길조차 없어 찾기 어려울 것이라는 귀띔과 더불어 자기 자신도 한 시간 남짓한 거리인 해기소까지만 가보았다는 고백이 이어졌다. 그렇다고 순순히 물러설 수는 없다.

마당바위의 홈은 공룡 발자국인가

갈거리안골로 칠팔백 미터쯤 들어가자 어디선가 구성진 노래 가락이 흘러나왔다. 계곡 옆 시원한 그늘 아래서 판소리 동아리가 모여 연습에 열중이었다. 깊은 골짜기를 흐르는 청아한 물소리와 어우러진 우리 소리는 참으로 운치 그윽했다. 바로 위 계곡에서는 십여 명의 피서객이 물속에 들어가 고무공으로 배구를 하고 있다. 그들을 보니 좀 전에 마을 주민이 겁주었던 말은 허풍이었나 보다 싶었다.

용기를 내어 상류로 올라갔으나 더 이상의 피서객은 보이지 않고 길도 차츰 희미해지더니 족적마저 사라진다. 물을 건너고 숲을 헤치며 어렵사리 올라갔다. 여기저기서 이름 없는 폭포수들이 콸콸 쏟아지고 깊은 웅덩이들도 이어진다. 그러다 200평 남짓한 너럭바위를 만났다. 흡사 마당 한가운데로 물이 흐르는 듯하다 해서 마당바위라 부르는 곳이다. 마당바위 위에는 움푹움푹 파인 홈이 있어 눈길을 끈다. 갈거 주민들은 이것을 공룡 발자국이라고 주장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마당바위의 시원한 물에 탁족을 즐기며 쉬다가 다시 원기를 회복해 골을 거슬러 오른다. 30분쯤 뒤 짤막한 폭포 아래로 50평 가량 되는 쪽빛 물을 담은 못이 보인다. 깊은 곳의 수심은 2미터가 넘을 것 같다. 갈거 주민이 설명한 해기소 풍경과 딱 들어맞는다. 그러나 해기소 위로 오르는 길은 도무지 찾을 수 없어 골짜기를 되짚어 내려왔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20리 유곡

그 후 다시 갈거리안골을 찾았다. 놀랍게도 차도 오를 수 있는 길이 뚫려 있었다. 산림을 관리하기 위해 놓은 임도였다. 덕분에 골짜기를 타고 오르지 않고 넓은 길로 걸을 수 있어 편했지만 운치가 떨어져 아쉽기도 했다. 해기소에서 20분쯤 걸으니 옛터라고 불리는 곳에 빈집이 한 채 있고, 다시 30분 남짓 오르자 왼쪽으로 이름 없는 폭포수가 시원스레 쏟아진다. 여기서 15분 가량 더 오르니 다 쓰러져 가는 건물이 나타난다. 한국전쟁 이전까지 있었다는 '운장산 농장' 터다. 이곳에서 뱀이 똬리 틀 듯 굽이굽이 돌아가는 임도를 따라 30분쯤 올라가자 화전민들이 살았다는 민듬 분지를 지나 운장산에서 뻗어온 주능선 안부에 이른다.

구봉산은 아홉 암봉이 연달아 솟았다 해서 붙은 이름이다.
여기서 임도를 계속 따르면 운일암반일암 인근 칠은마을로 떨어진다. 오른쪽 능선 길로 30분만에 복두봉 정상의 바위를 밟았다. 두건 복(幞) 머리 두(頭)자를 쓰는 복두봉은 '두건 쓴 벼슬아치가 구봉산 장군봉을 향해 절하는 모습 같다'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집채만한 바위 속에는 송장이 들어 있다는 전설이 전해져 으스스하다. 갈거마을에서 복두봉까지 3시간 남짓 걸리고 1시간 10분쯤 더 가면 구봉산 장군봉이다.

구봉산(1,002m)은 장군봉에서 북으로 아홉 암봉이 연달아 솟았다 해서 붙은 이름으로 복두봉(1,018m)보다 낮지만, 아홉 암봉이 워낙 깊은 인상을 주는 까닭에 이곳 주민들은 복두봉을 포함한 이 일대 산악들을 구봉산이라고 일컫는다. 복두봉 남동쪽으로 장장 20리 가까이 흘러내리는 갈거리안골은 수십 개의 지계곡을 거느리고 있다. 이 많은 지류에서 내려온 물들을 한데 모아 흐르기에 갈거리안골은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지 않는다. 속인들이 감히 범접하지 못할 오지 골짜기로 온갖 산새와 길짐승, 우거진 초목들만이 맑은 물과 벗하며 적막강산을 노래했다.

이제 갈거리안골 하류에 운장산 자연휴양림이 들어섰다. 숲속의집, 산림문화휴양관, 숲속 수련장, 야영장 등의 휴양림 시설은 갈거마을로부터 2~3㎞ 지점에 들어서 있고 상류로는 여전히 사람 발길이 미치지 않아 다행스럽다. 휴양림 위쪽 임도로의 차량 진입을 금지한 덕분이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비경의 20리 골이 더 이상 훼손되지 않도록 가꾸는 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여행 메모

# 찾아가는 길

주민들은 마당바위의 홈이 공룡 발자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금산 나들목에서 대전통영고속도로를 벗어난 뒤에 금산-주천-갈거교를 거쳐 운장산 자연휴양림으로 들어온다.

대중교통은 진안에서 운일암 방면 버스를 타고 갈거 마을에서 내린다.

# 맛있는 집

진안홍삼스파 맞은편의 그린원(063-433-4248)은 직접 기른 토종닭을 예약 즉시 잡아 조리하는 코스 요리로 유명하다. 우선, 가슴살을 살짝 데쳐 참기름장에 찍어 먹는 샤브샤브가 야들야들하면서 고소하다. 다음으로는 가슴살을 제외한 부위를 매콤한 양념에 볶는 주물럭이 나오는데 칼칼하면서 감칠맛이 돈다. 그러고 나서는 닭뼈를 넣고 푹 곤 맑은 탕으로 입가심한다. 남은 주물럭 양념에 밥을 볶아 시원한 탕과 곁들이는 맛도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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