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세 총리' '책임총리' 드물고 정권 방패막이, 대변인 많아… 중도 하차도

정홍원 전 국무총리가 2013년 12월 3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청동 총리공관에서 열린 전직 국무총리 만찬에서 역대 국무총리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정홍원 국무총리, 고 건, 노신영, 현승종, 정원식, 이현재, 이홍구, 이한동, 이수성, 정운찬, 김황식, 한덕수, 장대환 전 총리.
건국 이래 43명 총리… 평균 임기 1년 5개월
대통령제 권력구도에서 '총리' 역할 한계
김종필·이회창·이해찬 '실세총리' 행세
다수 총리 대통령 보조, 정권 대변인에 머물러
대선 주자 반열에도… 최종 관문 통과 못해

이완구 국무총리가 취임 두 달 만에 전격 사의를 표명하면서 대한민국 총리 수난사가 새삼 이목을 끌고 있다.

이 총리는 '성완종 리스트'파문에 연루돼 '3,000만원 수수' 의혹을 받아오다 20일 밤 박 대통령에게 사의를 표명했다. 이로써 이 총리는 지난 2월 17일 총리에 취임한 지 63일 만에 불명예 퇴진하게 됐다.

대한민국 건국 이래 이 총리까지 43명의 총리가 존재했다. 그러나 42대 정원홍 총리까지 평균 임기는 1년 5개월에 불과했다. 지난 1988년 직선제 전환 이후로는 평균 임기가 1년 1개월로 더 단축된다.

역대 총리는 출발부터 퇴임 후에 이르기까지 수난의 연속인 경우가 많았다. 총리에 임명됐지만 국회 동의를 구하지 못해 낙마하거나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후보직을 사퇴한 경우도 여러 명이다. 퇴임 후에도 몇몇을 제외하곤 정치적으로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고, 일부 대선주자로 거론된 전직 총리들 또한 최종 관문인 대선 문턱을 넘지 못했다.

두차례 총리를 역임한 김종필 전 총리는 연립정권인 DJ정부 시절 '실세총리'였다. /=연합뉴스
대한민국 헌법 상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해 행정 각부를 통괄하는 행정부 2인자이자 대통령 유고시 계승서열 1순위의 막강한 존재다. 조선시대 영의정에 비유한 '일인지하 만인지상하(一人之下 萬人之上)'란 말처럼 대통령 다음 가는 정권의 권력자인 셈이다.

그러나 역대 정권에서 국무총리의 위상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대통령과의 관계에서 역할이 제한돼 있고 위기상황 발생 때마다 정권의 방패막이로서 수명을 끝마치는 경우가 더 많았던 탓이다.

역대 정권마다 부침을 거듭해온 대한민국 총리의 명암을 살펴봤다.

헌정 초기∼5공화국 역할 미미

국무총리(國務總理)는 대통령제 하에서는 두지 않는 게 원칙이다. 원래 제헌헌법 초안에서는 정부를 내각책임제로 운영하고자 명목상의 대통령과 실권을 가진 총리직을 두었는데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이에 반대해 대통령중심제로 전환하고 미국식 제도를 도입해 부통령을 신설했다.

노무현정부 시절 임명된 한명숙 전 총리(37대)는 유일한 여성 총리다. /=연합뉴스
이승만 대통령 장기집권 시기인 1공화국 시절 국무총리의 권한은 지금보다 훨씬 열악했다. 대통령, 부통령, 국무총리가 모두 존재하는 어중간한 상황에서 총리는 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총리직은 1954년 사사오입 개헌 때 일시적으로 폐지되기도 했다.

이승만 정권 시기 공식 임명 받은 총리는 1대 이범석 전 총리를 포함 5명이었고, 서리직에 그친 인사도 9명에 달했다. 이윤영 전 총리서리는 공식 임명은 한 번도 받지 못한 채 총리서리직만 4번 역임했다.

2공화국에서는 대통령중심제의 폐단 극복을 위해 내각책임제를 채택해 부통령직을 폐지하고 국무총리직을 부활시켰다. 이에 따라 내각수반인 총리에게 막강한 권한이 주어졌다. 외치는 윤보선 대통령이, 내치는 장면 총리(7대)가 책임지는 투톱 체제가 형성된 것. 그러나 2공화국은 5·16 군사정변으로 11개월밖에 존립하지 못했고 장면 총리도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한 채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박정희 대통령이 통치한 3·4공화국 시절 총리의 역할은 미미했다. 다시 대통령중심제로 돌아온 후 대통령에게 권력이 집중됐고 총리는 정부의 공식 대변인 정도에 불과했다. 11대 총리이자 정권 2인자로 불렸던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가 박 대통령과 의견대립으로 총리직에서 하차한 것이 주목할 만한 총리의 행보였다.

17년 장기 집권한 박정희 대통령 시절 공식 임명된 총리는 5명에 불과해 총리 임기가 다른 정권 때보다 긴 편이었다. 특히 9대 정일권 총리는 무려 2,416일(1964년 5월 10일∼1970년 12월 20일)간 재직해 최장수 총리로 기록되고 있다.

4월 20일 사의를 표명한 이완구 총리는 최단 기간(63일) 재임한 총리가 됐다. /=연합뉴스
12대 최규하 총리는 최초로 대통령 직무대리를 행사했으며, 박충훈은 국무총리 서리로서 최초로 대통령 직무대리를 맡았다.

전두환 대통령 시절인 5공화국에서도 총리의 역할은 별반 눈에 띄지 않았다. 공식 임명된 총리는 5명이었고 임기 역시 1년 전후로 그렇게 길지 않았다. 16대 김상협 총리가 헌정 사상 첫 호남(전북) 출신이라는 점과 17대 진의종 총리가 뇌일혈로 쓰러져 신병헌 경제부총리가 최초로 총리 대행을 맡았다는 것이 눈에 띈다.

거물급 총리 대거 등장

1987년 대통령 직선제 실시 이후 등장한 총리는 재직 중 활동이나 특히 퇴임 후 행보로 인해 국민의 주목을 받았다.

노태우 정부에서는 임기 중 5명의 총리가 선임됐고 4명이 대학 교수 출신이었다. 이중 23대 정원식 총리는 재직 중 평양을 3차례나 방문했고 퇴임 후엔 김영삼 전 대통령의 선거대책위원장 및 인수위원장을 역임했다. 또한 정 전 총리는 민선 1기 서울시장에 도전해 경선에서 이명박 전 대통령을 꺾고 여당 후보로 나섰으나 민주당 조순 후보에게 패했다.

군부 정권을 종식시키고 문민정부로 출발한 김영삼정부에서는 총리의 위상과 역할이 한층관심을 모았다. 총 6명의 총리가 나왔으며 이들 중 상당수가 재임 전후 활약이 이전 정부 때보다 주목을 받았다.

특히 황인성 전 총리가 쌀 개방 파문의 책임을 지고 취임 10개월 만에 사퇴한 뒤 YS정부의 2대 총리(26대)로 선임된 이회창 전 선진당 총재는 할 말 하는 소신행보로'대쪽 총리'라는 평판을 들으며 대중 정치인으로 거듭났다. 책임총리로서의 모습을 보여줬던 이 전 총재는 퇴임 후엔 새누리당 전신인 한나라당 대선 후보로 15·16대 대선에 연거푸 출마했으나 두 차례 모두 실패했다.

김영삼 정부 4대와 5대 총리를 지낸 이홍구ㆍ이수성 전 총리는 여당 대권 주자 반열에 올랐으나 이회창 전 총리에게 밀렸다. 이홍구 전 총리(28대)는 김대중정부에서 주미 대사를 맡았고, 이수성 전 총리(29대)는 신한국당 대선 후보 경쟁에 참여한 경력이 있다. YS정부 마지막 총리였던 고건 전 총리(30대)는 노무현정부에서 초대 총리(35대)로 선임되며 대통령 권한대행까지 맡았다.

실세 총리 '파워'…오래 못가

역대 총리 중 '실세 총리' '책임 총리'의 모습을 처음 보여준 것은 김대중정부 때였다. 1997년 대선에서 승리한 김대중정부는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의 공동정권이었다. 당시 공동정권은 표면상 국민회의(DJ)와 자민련(JP)이라는 두 정당의 연합이었지만 사실상 기반은 '김대중 대통령+김종필 총리'였다.

때문에 김대중정부 첫 총리(31대)인 JP는 정권의 조력자보다 동반자로서 대우를 받았다. JP는 5개월의 총리서리와 17개월 가까이 총리로 있으면서 각료 몇 자리와 다수의 산하 단체장 임명권을 차지하는 '실세총리'의 모습을 보였다. 또한'국민연금' 등 주요 정책 추진에 있어서도 그 권한을 모두 사용했다. 그러나 내각책임제 실현과 대북관계에 이어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갈등을 빚으면서 2001년 총리직에서 물러났다.

JP는 퇴임하면서 자리를 당시 자민련 총재이던 박태준 전 포항제철 명예회장에게 물려줬다. 하지만 박태준 총리(32대)는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이 불거지며 취임 4개월 만에 불명예 퇴진했다.

이어 DJ정부 3번째 총리로 선임된 이한동 총리(33대)는 민주당과 자민련의 공조를 바탕으로 처음 도입된 인사청문회를 통과한 총리로 기록되고 있다.

이 전 총리는 2001년 민주당과 자민련의 공조가 완전히 붕괴된 내각에서 자민련 장관들이 철수할 때 배신자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잔류를 택했다. 이는 김대중 대통령 입장에서 집권 이래 처음으로 자신이 총리를 결정했다는 의미가 있지만 사실상 '실세총리'도 막을 내린 셈이었다.

한편 김대중정부에서는 장상 전 이화여대 총장이 헌정 사상 최초로 여성으로서 국무총리에 지명되었으나 아들의 미국 국적 취득 문제, 부동산 투기 및 위장 전입 문제 등으로 인해 국회 비준을 받지 못해 서리에 그쳤다.

또 다른 '실세'…친노 세력화

김대중정부를 계승한 노무현정부에서는 4명의 총리가 공식 임명됐다. 이 중 노무현정부 1대 고건 전 총리(35대)는 노 전 대통령 탄핵사건 당시, 2개월간 대통령 권한대행을 수행해 주목을 받았다.

노무현정부 2대 총리로 임명된 이해찬 전 총리(36대)는 참여정부의 핵심으로 '실세총리'의 모습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노무현 대통령-이해찬 총리'의 역할분담이 재현된 것. 정두언 새누리당 의원은 자서전에서 역대 총리 가운데 '밥값'을 제대로 한 사람으로 이회창·이해찬 전 총리를 꼽기도 했다.

반면, 이 전 총리는 재직 시절 자기주장을 강하게 내세워 야당은 물론 여당 수뇌부와도 자주 마찰을 빚었고, 노무현정부 오점으로 지적되는 사회적 갈등 증폭과 관련해서도 총리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는 평가도 따른다.

노무현정부 3대 총리였던 한명숙 전 총리(37대)는 헌정 사상 첫 여성 총리로 기록되고 있다. 총리 재임 중에는 이 전 총리처럼 각종 사안에 있어 자신의 목소리를 분명히 냈다는 평가를 받았다. 반면 북한 핵실험 등에 있어 조심스럽지 못한 입장 표명 등으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한 전 총리는 2010년 6월 지방선거에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로 출마했으나, 한나라당 오세훈 후보에게 근소한 차이로 패해 낙선했다

이해찬ㆍ한명숙 전 총리는 퇴임 후 친노(친노무현)그룹의 원로격으로 중심축 역할을 하고 있다.

차기 주자 기대…중도 하차

이명박(MB)정부 기간에는 3명의 총리가 재임했다. 1대 한승수 총리(39대)는 '자원외교 총리'로 불릴만큼 해외 순방이 잦았다. 그러나 MB정부의 자원외교의 실상이 드러나면서 한 전 총리 또한 구설에 오르내렸다. 한 전 총리는 총리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채 쇠고기 파동으로 물러났다.

한 전 총리를 이은 정운찬 총리(40대)는 경제학자 출신으로 여권 내 대선주자 후보로 간택됐다는 뒷말이 많았다. 실제 정 전 총리는 우리나라 대선의 캐스팅 보트를 쥔 충청 출신인데다 소탈한 이미지의 진보적 경제학자로서 정치권에서는 사회통합형 대선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그러나 정 전 총리는 병역기피 의혹 및 세종시 수정안 추진 논란 등으로 상당한 곤욕을 치른 뒤 임기를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총리직에서 중도하차 했다.

반면 MB정부에서 가장 오랫동안 총리를 지낸 김황식 전 총리(41대)는 '책임총리'로서 혁신보다는 안정적인 국정운영에 치중했다. 재임 당시 공무원들 사이에 '최고의 총리' 평가를 받기도 했던 김 전 총리는 퇴임 후 현 정권 들어 새누리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참가하기도 했지만 정몽준 후보에게 패했다.

줄줄이 낙마 또는 불명예 퇴진

박근혜정부 2년여 동안 총리로 지명된 후보자는 모두 5명으로 이중 3명은 중도 하차했고,나머지 2명은 총리가 됐으나 '불명예'를 안은 채 물러났다.

1대 김용준 전 헌법재판소장은 대통령직인수위원장에 이어 초대 총리 후보가 됐으나 장ㆍ차남의 병역 면제 논란과 부동산 투기 의혹 등으로 지명 5일만에 후보직에서 물러났다.

2대 정홍원 총리 후보도 아들의 병역 회피 의혹과 전관예우 논란, 부동산 투기 의혹 문제가 도마에 올랐지만 국회 인사청문회를 통과했다. 정 전 총리는 '무색무취'의 업무스타일로 박 대통령이 선거공약으로 약속했던 '책임총리'와는 거리가 있었다. 정 전 총리는 지난해 4월 16일 세월호 참사의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명했다.

그러자 박 대통령은 같은 해 5월 초 지난 대선 당시 새누리당 정치쇄신특별위원장을 맡았던 안대희 전 대법관을 총리로 지명했다. 하지만 대법관 퇴임 후 변호사로 활동하던 5개월간 16억원의 수임료를 받아 전관예우에 대한 비판여론이 비등하자 지명 6일 만에 자진 사퇴했다.

뒤를 이어 지명된 문창극 전 중앙일보 주필은 과거사 인식 문제가 불거져 여론이 크게 악화되자 스스로 지명 2주만에 사퇴했다.

총리 후보자 2명이 연이어 낙마한 뒤 박 대통령과 청와대는 마땅한 후보를 찾지 못하자 이미 사퇴 의사를 밝힌 정 전 총리를 유임했다. 이미 사퇴의사를 피력한 총리를 다시 기용한 것은 헌정 사상 초유의 일이었다.

정부는 올해 들어 지난 1월 23일 정 전 총리 후임으로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총리 후보로 지명했다. 충청 출신이란 지역적 안배와 무난히 청문회를 통과할 것이란 기대가 작용했다.

하지만 이 총리 역시 아들의 병역 특혜 논란과 부동산 투기 문제가 부각됐고, 특히 청문회 직전 터진 부적절한 언론관이 공개돼 위기를 맞았지만 간신히 청문회를 통과해 임기를 시작했다.

이 총리는 취임 초부터 행정부의 기강을 잡고 부패척결 의지를 강조하는 등 '책임총리'의 면모를 보이며 의욕적으로 국정에 임했지만 '성완종 사태'로 급제동이 걸렸다.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죽기 전 경향신문과의 인터뷰에서 2013년 재보선 때 이 총리에게 3,000만원 전달했다는 내용이 파문을 일으키면서 사퇴 압력을 받은 것. 결국 이 총리는 지난 20일 밤 사퇴 의사를 밝혀 63일만에 물러나는 최단명 총리로 기록됐다.



박종진 기자 jjpark@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