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고유권한… 비리 무마, 보은·사면 등 남용·오용으로 법치 훼손

2008년 8월 12일 시민단체 회원들이 8·15 특별 사면에서 비리 재벌 총수의 사면 반대와 양심수 석방을 촉구하고 있다
통제 장치 없어 남발… 국민 납득 안된 사면으로 지탄받아
'국민대통합' '경제살리기'는 핑계… 정치적 이해관계 작용
비리 정치인·기업인 면죄부 주는 꼴… ' 법 형평성' 어긋나
전두환 정부 횟수 최고… 노무현·이명박 정부 경제인 사면 많아
"대통령 사면권 일정 요건에서만 행사하고 책임지는 제도 마련 시급"

'성완종 파문'이 정국을 뒤흔든 상황에서 치러진 4ㆍ29 재보선 과정에서 여야가 사활을 걸고 충돌한 사안이 있다. 고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이 두 차례 사면된 배경이다.

새누리당은 노무현 정부가 성 전 회장에게 특혜를 주었다면서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과 비서실장으로 있던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의 책임을 추궁했다. 반면 새정치연합은 성 전 회장의 사면에 자민련과 이명박 정부가 관여했다며 역공을 폈다.

여야가 성 전 회장의 사면을 놓고 진실 공방을 벌이는 가운데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달 28일 성 전 회장의 연이은 사면은 납득하기 어렵다며 이에 대한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말해 '성완종 사면'이 정치권 폭풍의 뇌관이 되고 있다.

박 대통령은 최근 사면제도 개선을 지시해 국회에 계류 중인 사면법 개정안 논의가 탄력을 받을 전망이다. 이는 역대 정부에서 대통령의 고유권한인 사면권이 제대로 운영되지 않고 오히려 남용되거나 정치적으로 이용된 데 따른 국민적 지탄이 반영된 측면이 있다.

서청원 새누리당 의원,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의 형 노건평씨, 이학수 전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왼쪽부터)이 2008년 8·15 광복절에 특별사면 됐다.
역대 정부의 대통령이 사면을 단행한 배경과 과정, 그에 따른 결과 등을 살펴봤다.

대통령 고유권한…정도(正道) 벗어나

사면권은 헌법(제79조)이 정한 대통령의 고유 권한으로 1948년 제정헌법 때부터 보장돼 왔다. 대통령의 사면은 크게 일반사면과 특별사면으로 나뉘며 국회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일반사면과 달리 특별사면(특사)은 사면법에 따라 대통령이 독자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 때문에 역대 정부에서 논란이 된 것은 대부분 특별사면이다.

올해 1월 법무부 자료에 따르면 1980년대 이후 역대 정부의 사면은 제12대 전두환 대통령 취임 이후가 11회로 가장 많았다. 앞서 제11대 대통령 당시까지 합치면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재임기간 총 14회나 사면권을 행사했다. 이어 김영삼 정부에서 9회 사면이 이뤄졌고 노무현 정부 8회, 이명박 정부 7회, 노태우·김대중 정부 6회, 박근혜 정부 1회 등 순이다.

사면 규모도 역대 정부마다 차이가 있다. 특히 특별사면이 주목되는데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임기말 약 2,000명, 노태우 전 대통령은 취임 기념으로 4,500여명을 특사한 게 가장 많았다.

왼쪽부터 2013년 1월 31일 설특별사면으로 석방된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 2008년 1월 특별사면 된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이후 정부에서는 특별사면 규모가 확장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3년 3월 대통령 취임 기념으로 3만6,000여명을 특사로 풀어줬고 1995년 12월에는 257만3,000명의 일반사면을 단행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3월 취임 기념으로 3만2,000여명의 특별사면과 16만6,000여명의 징계사면을 단행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3년 8월 광복절 기념으로 2만3,000여명의 특별사면과 12만5,000여명의 징계사면을 단행했으며, 2005년 8월 광복 60주년 기념으로 1만2,000여명에게 특별사면 조치를 내렸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8년 8월 광복절을 맞아 1만여명, 이듬해인 2009년 광복절에는 9,000여명 등에게 특별사면 혜택을 줬다.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월 이전 정부에 비해 규모가 작은 6,000여명에 대해 사면권을 행사했다. 당시 비리에 연루된 정치인, 기업인 등 사회지도층 인사는 사면 대상에서 배제됐다.

'광복절 특사' 두드러져

역대 대통령은 임기 중 여러 차례 사면권을 행사했지만 특정 시점에 집중된 공통점이 있다. 특히 8ㆍ15 광복절 사면이 두드러지는데 내용 또한 주목할 만했다. 또한 신년초에 대부분의 대통령이 사면을 단행했고, 석가탄신일, 성탄절 특사도 빈번했다.

광복절 특사를 보면 전두환ㆍ김대중.노무현ㆍ이명박 전 대통령이 세 차례 사면권을 행사했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두 차례 행사했으며 노태우 전 대통령 때는 없었다.

전두환ㆍ노태우ㆍ김영삼ㆍ김대중 전 대통령 때는 취임 기념 사면을 단행했지만, 노무현ㆍ 이명박ㆍ 전 대통령과 박근혜 대통령 때는 취임 당시 사면권 행사가 없었다.

성탄절 특사는 노태우ㆍ김영삼 전 대통령이 세 차례 실시했으나 가장 사면권 행사가 많은 전두환 전 대통령은 단 한 차례에 그쳤다. 김대중ㆍ노무현ㆍ이명박 전 대통령 때도 성탄절 특사는 한 차례뿐이었다.

역대 대통령은 새해를 맞아 예외없이 사면을 단행했다. 취임 후 한 차례 사면권을 행사한 박근혜 대통령도 2014년 초 설 명절을 맞아 서민 생계형 형사범 약 6,000명에게 특사를 실시했다.

정권 말 사면 어김없이 이어져

정권 말 대통령의 특별사면은 역대 정부에서 거르지 않고 이뤄졌다. 특사의 명분으로 '국민화합'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임기 중 지게 된 정치적 부담을 털고 가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 경우가 많았다.

1980년대 이후를 보면 전두환 전 대통령은 1987년 6월항쟁에 따라 6ㆍ29 선언과 그해 7월 10일 특사를 단행, 김대중 당시 민추협 공동의장을 비롯해 2,355명을 사면 복권시켰다.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92년 12월, 밀입북 사건으로 구속 수감 중이던 임수경 현 새정치민주연합 의원과 문규현 신부를 특별 가석방하는 등 26명을 사면조치했다. 이들 중엔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인 전경환씨와 처남 이창석씨를 비롯한 5공 비리 관련자 19명도 포함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7년 12월 실시한 특사에서 12ㆍ12, 5ㆍ18 및 비자금 사건과 관련해 구속 수감된 전두환ㆍ노태우 전 대통령의 이름을 올렸다. 이밖에 5ㆍ6공화국 실세였던 정호용 전 국방부 장관과 장세동 전 안기부장, 안현태·이현우 전 청와대 경호실장 등이 특사로 석방되거나 잔형 집행을 면제받았다.

2002년 12월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임기 말 특사에선 거물급 경제인들이 대거 혜택을 받았다.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 김선홍 전 기아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및 대우그룹 분식회계 사건에 연루됐던 대우그룹 임원들이다. 또 학생운동과 노동운동 관련자 등 40명의 공안사범도 특사로 풀려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마지막 특사엔 김대중 정부 인사, 노 전 대통령 측 인사, 이명박 전 대통령의 측근이 두루 포함됐다. DJ 정부 인사로는 신건ㆍ임동원 전 국가정보원장, 박지원 현 새정치연합 의원, 한화갑 전 민주당 대표와 신승남 검찰총장 등이 포함됐다. 노 전 대통령과 가까운 최도술 전 청와대 총무비서관과 이 전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 함께 일한 양윤재 전 부시장도 사면됐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임기 말 파이시티 인허가 관련 8억원을 받은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과 47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된 천신일 세중 회장 등에 대한 특사를 형 확정 후 얼마되지 않아 단행해 논란을 일으키기도 했다.

경제인 사면 많은 것도 특징

경제인에 대한 사면이 빈번하게 이뤄진 것도 역대 정부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당시 대통령은 한결같이 '경제살리기'를 명분으로 내걸었지만 사실 '경제'와 별 상관없이 정권과 재계의 관계설정 측면이 강했다.

경제인에 대한 사면은 문민정부가 들어선 이후 자주 단행됐다. 김영삼 정부 5년 동안 주요 경제인 35명이 특사를 받았다. 대표적인 예로는 1997년 개천절 특사로 전두환ㆍ노태우 비자금 사건에 연루된 기업총수 7명에게 특혜를 베푼 것이다. 당시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김우중 대우그룹 회장, 최원석 동아그룹 회장, 장진호 진로그룹 회장,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 등이 대상자였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정권말인 2002년 12월 단행된 특사에서 경제인들이 대거 혜택을 입었다. '외환위기의 주범'으로 꼽힌 정태수 전 한보그룹 회장을 비롯해 김선홍 전 기아 회장,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 등이 풀려났고, 이용호·최규선 게이트 연루자인 김영재 전 금융감독원 부원장보, 최일홍 전 국민체육공단 이사장 등이 특사됐다.

노무현ㆍ이명박 정부에서는 특히 경제인에 대한 사면이 빈번했고, 규모도 컸다. 김영삼 정부에서 사면된 경제인들이 평균 2개월, 김대중 정부에서는 정태수ㆍ김철호씨를 제외하고 약 8개월 복역한 뒤 사면이 단행됐지만 노무현 정부에서는 약 30명의 주요 경제인의 복역 기간이 평균 한 달도 되지 않았다.

노 전 대통령은 2005년 5월 이학수 전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 강유식 전 LG그룹 부회장, 김동진 전 현대자동차 부회장 등을 사면했고, 성완종 전 회장이 이때 첫 번째 특사를 받았다. 2007년 2월에는 박용성 전 두산그룹 회장, 2008년 1월에는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 정몽원 전 한라그룹 회장 등이 사면됐고, 성완종 전 회장에게 두 번째 특사가 있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취임 첫 해인 2008년 8월 광복절 때 아들 폭행사건에 연루된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 회삿돈 600억원을 횡령한 정몽구 현대기아차 회장, 1조 5000억원의 분식회계를 한 최태원 SK그룹 회장 등 '빅3' 외에 손길승 전 SK 그룹 회장, 나승렬 전 거평그룹 회장, 최원석 전 동아그룹 회장, 최순영 전 신동아그룹 회장 등 74명을 특사로 풀어줬다.

장치혁 전 고합회장, 김윤규 전 현대건설 대표이사, 안병균 전 나산 그룹회장, 엄상호 전 건영그룹 회장 등도 사면ㆍ복권 대상에 이름을 올렸다.

이듬해인 2009년 12월에는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을 평창동계올림픽 유치 지원을 명분으로 단독 특별사면해 논란을 빚었다. 이 회장은 조세포탈 및 삼성SDS 신주인수권부사채(BW) 저가발행에 따른 배임 등의 혐의로 2009년 8월 항소심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형을 확정지은 상태였다. 2010년 8ㆍ15 광복절 때는 김준기 동부그룹회장, 박건배 전 해태그룹 회장, 이익치 전 현대증권 대표, 유상부 전 포스코 회장, 이학수 전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 김인주 전 삼성그룹 전략기획실장, 채형석 애경그룹 부회장 등이 특사 및 특별복권 됐다.

측근 챙기기, 보은 사면 적잖아

역대 대통령의 사면 중엔 측근 챙기기, 보은 성격의 것도 적지 않았다. 이런 사면을 대통령은 자신의 임기내 단행하거나 전임, 또는 후임 대통령과 묵계 아래 추진하기도 했다.

노태우 정부 시절 '5공 비리'로 수감중인 전두환 전 대통령의 동생 전경환씨를 포함해 김종호 내무부 장관, 이학봉 전 의원 등 제5공화국 비리관련자들이 사면 대상에 포함됐다. '거액어음사기사건'의 장본인인 이철희씨도 사면됐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1993년 성탄절 특사에 야당 시절 최측근인 서석재 전 의원을 포함시켰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8ㆍ15 건국 50주년 특사를 통해 '국민의 정부' 최고 실세로 자리잡은 권노갑 전 의원을 풀어줬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3년 광복절 특사를 단행하면서 측근인 김정길 전 행정자치부 장관을 포함해 논란이 일었다. 또한 2005년 5월에는 노 전 대통령의 후원자였던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을 특사한데 이어 2006년에는 최측근 안희정 충남도지사와 여택수 전 청와대 행정관, 신계륜 현 새정치연합 의원 등을 특사했다. 2008년에는 최도술 전 대통령 총무비서관을 특사 대상에 올려 '측근 구하기'라는 지적이 있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임기 말인 2013년 1월 정치적 멘토 역할을 했던 최측근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장을 비롯해 절친인 대학동기 천신일 세중 회장, 김효재 전 청와대 정무수석 등을 특사해 측근 비리 연루자의 연결고리를 완전히 끊지 못했다는 비판이 나왔다.

특사 남발 막을 제도적 장치 필요

전 세계 대부분의 국가는 사면제도를 갖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처럼 원칙 없이 사면을 남발하는 경우는 드물다. 독일의 경우 지난 60년간 사면을 4차례 행사했을 뿐이다.

대통령의 사면권 남용ㆍ오용은 법치주의를 훼손하는 문제를 가져온다. 서울중앙지법의한 부장판사는 "대통령의 무원칙한 특사는 삼권분립상의 사법권을 경시하는 것으로 국민의 사법 불신을 초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대검찰청의 한 부장검사는 "비리에 연루된 주요 인사를 사면권 행사로 쉽게 풀어 주면 부정부패 척결은 요원하다"면서 "실제 과거 특사로 인해 부정부패가 재현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서울대 법과대학원(로스쿨)의 한 교수는 "특권층에 대한 사면은 일반 국민 입장에서 보면 '법의 형평성'이 무너지는 것"이라며 "사면권 오남용을 막기 위해서는 외국의 법례처럼 일정 요건하에서만 행사할 수 있고 그에 따른 책임도 지울 수 있도록 하는 제도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박종진 기자 jjpark@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