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6월 25일 전쟁발발' 극비 보고서 존재 봉인된 비밀 풀린다6·25 둘러싼 첩보전 북한 대남첩보국 '니콜스 파일'엔 어떤 내용이'첩보전의 천재' 한국전쟁 당시 북한 첩자 직접 총살북파 공작원의 아버지 007 같은 활약상

생전에 한국을 방문해 한국전쟁 당시 활동한 부하들과 조우한 니콜스.
6ㆍ25한국전쟁과 관련해 잊어진 영웅들이 수없이 많다. 학도병, 민병대, 화교군대 등을 비롯해 UN군 무명병사에 이르기까지 그 수는 헤아리기조차 힘들 정도다. 시간이 흐르고 시대가 바뀌면서 이들에 대한 활약이 하나씩 조명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한국전쟁에서 활약했던 정보원들에 대해서는 그 발굴작업이 미미한 실정이다.

우리는 고도로 정보화된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정작 전쟁에서 정보전을 이끈 정보 영웅들에 대해서는 가까이 접근하지 못하고 있다. 정보 영웅들에 대한 외면은 특수전 영웅들에 대한 그것보다 더 심각하다.

심지어 국가에서 이들의 존재를 외면하고 보상을 거부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다. 정규전 뒤에 있는 치열한 정보전과 특수전은 전쟁의 승패와 방향을 바꿀 수 있고 또 한국전쟁을 포함해 여러 전쟁에서 그래왔다.

그런 면에서 도널드 니콜스(Donald Nichols)의 '잊어진' 또 '잃어버린' 회고록 입수는 그동안 한국사에서 간과되어온 매우 중요한 역사의 조작을 발굴하는 작업에 다름 아니라 할 것이다.

<주간한국>은 니콜스의 회고록과 더불어 당시 활약했던 정보전 영웅들의 증언을 지난 호에 이어 연재한다.

6·25 발발직전 이승만 대통령과 함께 자리한 도널드 니콜스. 니콜스는 이승만의 절대적인 지원 아래 정보활동을 할 수 있었다.
기억 속에서 사라진 영웅들

다른 전쟁과 마찬가지로 한국전쟁에서도 정보전과 더불어 수많은 특수전이 진행됐다. 특수부대나 특수요원들에 대한 공작은 일부 드러난 바 있다. 하지만 도널드 니콜스라는 정보부대 사령관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국전쟁 당시 정보전과 관련된 내용이 공개되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특수부대로 미군 통제 아래에서 북한 출신들이 활약한 부대는 여러 개 있다. 동키(Donkey) 부대를 기반으로 레오파드(Leopard), 울프팩(Wolfpack), 커크랜드(Kirkland), 베이커(Baker) 등의 특수기지가 있었다.

정보기관의 경우 동경의 극동군사령부(FECOM) 정보참모부(G-2)나 휘하의 주한연락사무소(KLO)을 비롯해 주한극동군 연합정찰사령부(Combined Command Reconnaissance Activities Korea: CCRAK) 예하의 정보기관들이 있다.

예컨대 CIA 동경지부의 한국 분실격인 주한합동고문단(Joint Advisory Commission Korea: JACK), 주한극동군 제2파견대(Detachment Number 2), 미 공군 정보참모부(A-2), 미 육군 제8007부대, 구조사령부(Recovery Command) 등의 활동은 본격적으로 검토되지 않았다. 특수전 관계 인물으로는 유진 클라크, 한스 토프트, 존 싱글러브, 빈센트 크래머 그리고 바로 니콜스가 있다. 이들 가운데 니콜스는 계급은 가장 낮았지만 그 역할은 가장 컸다고 일컬을 정도로 특수전의 핵심에 놓여있었다.

도널드 니콜스 회고록 사본. 니콜스는 회고록에서 휴민트를 활용한 정보수집 활동을 상세히 기록했다.
니콜스는 OSI, SAU#1, 6004 AISS 등 미 공군 첩보부대를 지휘하면서 한국전쟁 전후 첩보활동의 최전선에 있었다. 니콜스는 피난민‧포로‧망명자를 심문하고 요원을 모집‧훈련하여 적 지역으로 파견했다. 적에 대한 간첩 활동과 파괴행위에 개입했고 공군 기술정보를 수집했다. 그리고 한국군의 정보부대 창설에도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니콜스의 활동은 미군뿐만 아니라 이승만의 지원 속에도 이루어졌다. 이승만은 니콜스를 "My Son"이라고 부를 정도로 신뢰감을 표시했다고 한다.

한국전쟁의 발발에 대해서도 니콜스는 "자신의 '두더쥐'인 '조선노동당의 대남연락부 최고위 인사'를 통해서 극비정보를 수집하여 '전쟁이 6월 25~28일에 발생할 것'이라는 보고서를 세 개나 올렸으나 맥아더 사령부는 이상하게도 믿지 않았다"고 자서전에서 주장했다.

니콜스의 첩보활동은 한국전쟁 전후의 첩보전쟁과 당시 한국 정치의 이면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니콜스의 회고록이 발간되기는 했지만 민감한 내용들이 많아 대부분 수거돼 폐기처분 됐고 일부 알려진 내용들이 있지만 한국전쟁 직전 그리고 전쟁 기간 동안 첩보활동에 관한 연구는 많이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첩보전과 관련된 내용은 국가의 기밀사항에 해당하기 때문에 자료 접근이 어렵고 관련 인물들의 증언 또한 수집이 쉽지 않아 한계가 있다.

한국전쟁 때 활약한 정보원들에 관련해서는 극동군사령부가 1949년 6월 서울에 설립한 대북 공작기관인 '켈로'라는 약칭의 미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사무소(KLO: Korea Liaison Office)를 제외하고 정보전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다.

니콜스 파일 전쟁 움직여

1948〜1949년 초 극동공군(FEAF) 정보참모부는 니콜스의 보고서를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니콜스에게 월남민을 심문할 권한을 주었다. 한국에서 미 공군 인간첩보대(USAF HUMINT: Human Intelligence)가 창설되었다. 극동공군은 보다 특급정보자료(EEI:Essential Elements of Information)를 요구하기 시작했고 니콜스는 이제 더 많은 재량권을 갖고 단순한 방첩(CI)이 아니라 적극적 정보(PI: Positive Intelligence)를 본격적으로 수집하기 시작했다.

니콜스는 이 정보를 영국정보기관에서 온 단어인 '적극적 정보'라 불렀다 적극적 정보란 적으로부터 정보를 수집하는 것으로 소극적 정보, 즉 적이 우리 부대로부터 정보를 수집하지 못하게 하는 방첩과 대비되었다.

1949년 미군이 철수했지만, 니콜스는 미 극동공군(FEAF) 특수조사처(Office of Special Investigation, 이하 OSI) 8지대 책임자로 한국에 계속 남아있었다. 한국인 요원들을 뽑아 훈련시켰고, 요원들을 38선 이북지역으로 파견했다. 스트라이크나 사보타지의 계획을 알아내기 위해 남로당에 요원들을 침투시키기도 했다.

니콜스가 미 극동공군 OSI 8지대 책임자로서 한국전쟁 이전에 극동공군에 보고한 문건들은 정보첩보보고서 (Air Intelligence Information Report)에 들어있다.

NARA, RG 319 "ID" File에서 찾아낸 이 문서들은 KLO․TLO문서집에 수록되어 있다. 하지만 한국전쟁 이후 니콜스의 활동에 대한 문서는 별로 없다. 첩보 활동의 특수한 상황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NARA에 있는 제5공군 관련 문서들의 많은 분량이 비밀 해제되어 있지 않다.

니콜스는 1949년 11월부터 1950년 1월까지 북한 지역의 새로운 공군기지 건설에 대한 보고를 수차례 했다. 니콜스의 보고에 따르면 1949년 말 소련은 북한에 100여 대의 YAK-9형 전투기와 IL-10 지상습격기를 원조했다. 비행 연대를 비행 사단으로 증강, 확대 개편함과 동시에 1950년 4월부터 방대한 양의 소련제 장비와 군수물자를 북한 동북구의 항구와 철도편으로 반입했다. 항공기는 주로 평양, 순천, 신의주, 연포, 선덕, 원덕, 원산, 회령 등 공군기지에 비치했으며 기타 38도선에 근접한 신막, 평강, 김천, 간성 등지에 전장 활주로를 건설 중이었다.

이 문서는 니콜스가 OSI 8지대 책임자로서 보고한 내용을 토대로 극동공군 정보부 차장 로저스(Rogers) 중령이 정보참모장인 윌로비(Willoughby) 장군에게 보고한 것이다.

한국전쟁기 미 공군의 북한출신 대북첩보활동 요원들을 침투시켰다고 주장했다. 단순한 정보 수집이 아니라 공작을 통해 적극적 정보를 수집했다는 것이다. 니콜스는 남로당의 핵심 인물인 김삼룡을 체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같은 내용은 니콜스의 남로당 내 첩보 공작과 관계된 유사한 주장이 북한의 기록에도 나타나고 있다. 이른바 '미제의 간첩'으로 박헌영과 남로당계를 숙청한 북한의 재판 기록에 니콜스가 등장한 것이다.

박헌영 재판기록에 따르면, 니콜스는 하지의 정치 고문인 "노블(Horold Noble)의 직접 지도 밑에 있던 미극동사령부 항공정보관"으로 일컬어졌다. 북한 재판부의 기록에는 "노불과 그 밑에서 활동하던 미 극동사령부 항공 정보관 미군 대좌 니콜스는 일제 고등 경찰이었고 리승만 괴뢰 정부 내무부 치안국 사찰과 중앙분실장이던 극악한 민족 반역자 백형복 미군 간첩 안영달과 조용복을 일행으로 1950년 4월 의거 입북을 가장하는 방법으로 북한에 잠입시켰다"고 적혀 있다.

간첩 리승엽은 노불의 지령에 의하여 백형복을 공화국 내무성 내에, 안영달을 새로 조직할 당 서울 지도에 각각 침투시키려고 기도하였고 조용복을 내각 인민 검열위원회에 잠입시키고 그들에게 인민군 항공부대에 관한 군사기밀을 비롯하여 당 내부의 중요기밀을 제공하는 등 간첩 범행을 감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 과정에서 백형복은 니콜스의 지시에 의해 북한의 기밀을 그에게 전달했고 50년 4월 28일 니콜스와 안영달과 같이 노블을 만난 다음 5월 7일에 입북했다고 진술했다.

북한 움직임 손바닥 보듯

전쟁의 책임과 정적 제거라는 정치적 목적이 뚜렷한 재판에서의 진술만 가지고 그 사실의 실체를 밝히기는 어렵다. 하지만 재판과정에서 니콜스의 이름이 수차례 거론될 정도로 북한 당국이 주목했을 만큼 니콜스의 활약이 컸던 것을 보여준다.

니콜스 보고 문건 1건이 미 국무부 1950년 문서철 안에 남아있고 공개된 상태이다. 1950년 2월 11일에 작성된 이 문건에서 니콜스는 "계속적으로 커져가는 불안정한 국내 민간상황과 현재의 정치정세로 보건대, 다가오는 한국의 내전은 불가피하게 확실시 되고 있다. 만약 남한정부를 전복하려는 내전이 일어나면 북한 공군이 중요한 역할을 수행할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어서 그는 1949년 11월에서 1950년 1월까지의 북한 공군과 38선 부근에 건설된 비행장 등에 관한 20건의 첩보 요약을 보고했다. 동경의 미 극동공군에서는 2월 25일 니콜스의 보고를 공군본부에 타전했고 이 문제로 미 공군 정보부와 국무부 관련 인사들이 3월 30일에 회합하고 논의했으나 한국 내의 정정 불안이라는 막연한 이야기를 곧장 내전으로 직결하는 논리에 대해 부정적으로 판단했다.

니콜스는 1950년 4월 21일 정보보고에서도 대략 20개의 소련제 탱크가 소련 선박으로부터 청진항에 하역했다고 보고했다. 니콜스의 보고서는 북한군에 침투한 요원‧피난민‧망명자들로부터 정보를 수집한 것이었다. CIA의 싱글러브(J. K. Singlauv, 1991)는 이 문제를 보다 상세하게 언급한 바 있다. 그에 의하면 6월 19일 서울의 CIA 요원들은 북한의 부대 이동을 포함하여 전쟁에 대해 구체적으로 정리했고, 6월 20일 워싱턴의 CIA 국장(Hillenkoeter)은 이러한 정보를 백악관은 물론 애치슨 국무장관, 존슨 국방장관, 브래들리 함참의장 등에게 보고했다.

그러나 극동군 정보참모부의 윌로비 소장은 이 보고를 F-6(정보제공자와 정보내용의 신뢰등급을 평가할 수 없음) 등급으로 분류하여 무시했고, 워싱턴의 고위관리들도 주목하지 않았다고 니콜스는 자서전에 적고 있다.

한국전쟁 기간 동안 니콜스와 OSI 8지대의 주요 임무는 미 공군을 위한 적군의 기술정보를 획득하는 것이었다. 니콜스는 표적 정보, 공군 기술 정보, 격추된 공군 조종사의 탈출 지원 등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두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한국군의 정보부대 창설에 산파 역할을 했다. 한국 공군 첩보부대 OSI는 1951년 5월 서울 구로구 오류동에서 대북공작 임무를 위해 20특무전대를 창설했다. 20특무전대는 공군 첩보부대의 시작이다.

전쟁이 발발하자 니콜스는 즉각적으로 극동공군에 보고했다. 북한의 공격에 대한 첫 보고가 맥아더 사령부에 날아든 것은 오전 9시 45분이다. 니콜스 준위가 서울로부터 미 극동공군 작전상황장교에게 전화로 소식을 전한 것이다. 이 보고는 패트릿지 장군과의 연락이 이루어지지 않아 오전 11시 30분에야 극동공군 예하 각 부대에 전달되었다.

눈길을 끄는 것은 KLO 첩자들이 북한 당ㆍ정ㆍ군의 고위급에 침투했을 것이라는 일반적 예상과 달리, KLO 문건을 살펴보면 이들의 보고서에 대해 전반적으로 고급 고정첩자의 통보보다는 한국의 정보기관 또는 수많은 한국인 공작원들에 의존했던 것이다.

니콜스가 파악한 정보들의 출처는 대부분 한국 경찰, 한국군, 한국경찰 정보원, 피난민 심문 등으로 되어 있다.

초기 한국 공군 첩보부대는 미공군 첩보부대인 6006 AISS부대에 배속되어 있었다.

니콜스는 부평 민가에 있던 정보부 본부를 파괴하고 서울 함락 두 시간 전 배를 타고 수원으로 탈출했다. 수원에서 니콜스는 동경에서 파견된 한국 전방사령부 및 연락단(ADCOM)을 만났다. 미국 대사 무쵸도 그곳에 있었는데, 그는 니콜스에게 한국 육해공군 지휘관들과 연락을 유지할 것을 요청했다. 니콜스는 한국 공군으로부터 지도를 얻어 ADCOM의 공군 대표들에게 표적첩보(標的諜報)와 좌표(座標)를 제공했다. 이 정보는 동경으로 보내져 극동공군의 공중 폭격에 이용되었다.

전쟁이 일어나자 극동군 총사령부 한국전방사령부 책임자인 처치 장군은 전방지휘소를 수원을 둘 것을 표명했다. 수원은 한강방위선에 편리하며 중부지방의 유일한 비행장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공군 장교 맥긴 중령은 6월 28일 아침 수송기가 착륙하자마자 수원에 공도부(空頭堡)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맥긴은 상공의 전투기에게 공격목표를 명료하게 통보했으며 상세히 묘사해서 수송기 조종사로 하여금 일본의 이다즈케(板付) 미공군기지에 전달토록 했다. 이런 상황에서 니콜스가 여러 개의 항공 목표물을 가지고 수원에 도착했던 것이다. 니콜스가 제시한 목표 중에는 서울역 정거장에 공산군 전차가 30대가 머물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차량정비창 및 서울에 있는 북한군 선전방송중계소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윤지환기자 musasi@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