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ㆍ25 전쟁 전후 남북 상황 자세하게 기록…베일에 싸인 비밀 마침내 풀린다

6ㆍ25 전쟁 둘러싼 첩보전 ‘니콜스 파일’로 담아
한국전쟁 전 남로당 활동 자세히 기록…공산주의자 고문도
이승만과 특별한 인연, 우정 쌓아…한국의 중요 사항 미국에 알려
6ㆍ25 ‘첩보전의 천재’ 한국전쟁 전후 많은 역사적 사건 개입
한국전쟁 대학살 현장 수차례 목격… 수원 1,800명 대학살 못잊어
북파공작원의 아버지 한국 정보기관 창설 주역

지난 3호에서는 김인호씨의 이야기를 잠깐 다뤘다. 이번 호는 지난 2호에서 중단됐던 도널드 니콜스의 회고록을 이어 연재한다.

진군하고 후퇴하고 이기고 지는 패턴이 1953년 중간이라고 판단할 때까지 어딘가에 위의 기간 동안 부대와 내가 모아두었던 수천 개의 보고서가 있다. 그 배경 위에 있었고 그러한 정보를 구하고 있었던 우리는 진실을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나의 특무대는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의 시작보다도 중요한 북한의 정부수립에 대해 미극동공군과 극동사령관을 통하여 위싱턴에 보고서를 보냈다. 그 결과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30년이 지난 1980년 오늘날에도 여전히 국내에 수천 개의 부대를 주둔시키고 있다. 내가 설명하는 한국전쟁은 그것 때문에 가지고 올 수 있는 어떤 행동 때문에 다소 상이하게 읽힌다. 언젠가는 진실이 언급될 것이다.

대한민국 역사를 움직이다

나는 한국의 업무수행을 맡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이승만을 알게 됐다. 나의 개인적인 생각으로 이승만은 역사의 위대한 인물이자 명예로운 지도자다. 1957년 내가 한국을 떠날 때까지 한국에서 보낸 모든 시간 동안 나는 이승만에게 가깝고 훌륭하고 진정한 친구였다. 우리는 서로를 존경했다. 그는 가능한 최선을 다하려는 민주주의자였다. 그는 나를 미국 고관들의 대표자라고 믿었고, 그런 까닭에 나를 더욱 대우해 주었다.

이승만은 나를 거의 절대적으로 신뢰했고, 내가 모르는 그의 비밀은 거의 없었다. 따라서 나는 한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제 상황을 거의 다 알고 있었고 그것들을 미국에 보고했다.

내가 단순히 정보를 얻기 위해 우정을 이용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승만은 그것을 하고 있었다. 그는 그것이 한국과 미국의 최대 관심사라고 믿었다. 이승만은 죽었지만 그는 미국이 신뢰할 수 있는 친구였고 나에게도 그러했다. 그는 우리를 믿었던 것이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직전 우리는 남한이 민주청년동맹(DYMA)과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주로 북한의 민중들로부터 피난자와 변절자로 구성돼 있었다. 나는 중요정보에 화답하기 위해 훈련받고 북한에 파견될 예비 요원들을 선발했다. 그러나 이 조직 중에는 이중 스파이인 공산주의자가 있었다. 그들을 시간을 두고 하나씩 은밀히 제거했다. 종종 이중 스파이가 작전하는 것이 허용됐다. 그들의 이중적이 역할은 특정 목적을 만족시켰다.

우리의 정보망은 여러 역할을 했는데, 특히 1948년 사건이 그러했다. 이때 남로당은 고립된 서울에 대한 한 계획을 전개시켰고 남한 내 혼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남로당 안에서 사다리 역할을 했던 우리의 베테랑 요원 중 한 명이 그 계획이 실행되기 16시간 전에 정보를 전달했다. 덕분에 우리는 재빨리 관련자들을 체포할 수 있었다.

그들을 체포 후 심문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들이 주 도로를 막고 철로와 교량을 파괴하고 정부 고위간부와 군사 고위간부를 암살하려하는 상세한 계획을 알아냈다. 우리는 그 계획이 실효를 나타내기 한 시간 전에 막을 수 있었다.

1948년과 1949년 동안에 우리는 남한에 있는 수많은 빨갱이 조직들을 적발했다. 그들의 임무는 항상 같은 것이었다. 스파이활동 방해공작 폭동과 선동을 수단으로 제국주의자들을 무너뜨리는 것이 그것이다.

한 소탕작전에서는 한국에서 일본이 철수하자마자 남로당에 의해 숨겨진 몇몇 일본의 전투기들을 발굴해 냈다. 이런 것들은 기회가 왔을 때 한국에서 한국정부와 미군에 대항해 사용될 계획이었던 것이다.

빨갱이 조직을 심문하는 과정에서 나는 부득이하게 연합군이 2차대전 중 사용한 심문방법이 사용되는 것을 묵인해야 했다. 나는 대상자와 그들에게서 얻으려는 정보에 따라 심문관들에게 적절한 심문법을 알려줬다.

예컨대 젖은 수건을 얼굴에 덮고 물을 붓는 것이나 추운 날씨에 물속에 빠뜨리는 것 등이다. 고문을 당하는 이들은 이루 형언할 수 없는 비명을 질렀고 마치 천천히 죽어가는 듯 했다. 결국 그들 중 대부분은 비명을 지르듯 내가 필요로 하는 정보들을 발설했다.

남한의 마을 곳곳에서 스파이, 게릴라요원, 공작원들의 처형이 이뤄졌다. 처형은 남한의 군인들이 직접 시행했다. 처형당할 사람들은 아무것도 입히지 않은 채로 트럭으로 실려 와서는 나무 기둥에 묶여진다. 타깃으로 삼기 위해 검은 점이 있는 종이가 사람들의 가슴에 붙여진다. 아무런 절차도 없이 조준, 발사 명령이 내려지면 사람들은 총에 맞고 힘없이 무너져 내렸다. 나는 한 번에 적게는 한 명에서 많게는 스무 명의 사람들이 처형되는 것을 수도 없이 목격해왔다.

무질서, 부도덕의 아수라

1940년대 말 남한에서 도박은 필수적인 것이었다. 어떤 이는 술을 마시고 어떤 이는 여자를 쫓아 다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도박을 했고 나 같은 이 몇몇은 고아들을 돕는데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의 적갈색 얼굴과 갈색 눈동자에 흠뻑 빠질 수 있었고 그래서 거의 비명소리와 페인트 칠해진 시체들을 내 의식 속에서 억누를 수 있었다.

나는 이들 한국계 미국인 어린이들을 위해 음식 담요 의약품 목재를 실을 트럭 짐을 이럭저럭해서 얻어냈다.

1945년 말 미군이 처음으로 한국에 들어오면서 혼혈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국인들은 혼혈아들을 싫어했다. 순수한 피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혼혈아들은 어머니가 양육을 포기하거나 학대당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나는 많은 혼혈아들을 고아원에 데려다 놓는 일을 했다. 후에 이들 중 많은 수가 자신의 길을 찾아 미국으로 떠났다. 그들 중 김태천과 김시구는 이름을 니콜라스로 바꾸었다. 오직 하나님만이 나와 이들의 관계를 특별히 설명해 주실 것이다.

1950년에서 1953년까지 한국전쟁 과정과 나의 개입을 설명하자면 1950년 6월에서 1951년 5월까지 나는 특별수사 장교로 근무했다. 그리고 1951년 5월 11일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제 6006 정보부 제독을 지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나의 첫 번째 임무는 부평의 민가에 설치돼 있던 정보부 본부를 즉각 파괴하는 일이었다. 제한된 도로는 놀라서 서두르는 농부들로 초만원을 이루어 군대가 앞으로 전진하기 힘들 지경이었다.

김포비행장이 파괴와 약탈 현장에 나는 홀로 있었다. 수원 대전 대구 등지에서 다른 보급품과 수백만 달러짜리 비행기의 파괴를 뒤로한 채 후퇴대열을 따라갔다. 그 와중에 나는 다른 사람이 남겨놓은 것을 파괴하는 일을 맡아 처리했다.

북한군이 순식간에 밀고 내려오는 동안 겨우 몇 명의 방어군만 보았으며 다른 미군 정보 부대는 즉시 일본으로 대피했다. 한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들은 피로 범벅됐다. 이는 한국 육군이 시간을 벌기 위한 헛된 노력에 불과했다. 다리가 폭파될 때 나는 적군의 지역인 강북에 있었다. 나는 적군이 오기 전에 피난민들이 강을 건널 수 있게 도왔다. 당시 그곳에 미국인은 나밖에 없었다. 나는 적군의 사거리 안으로 진입해 올 동안 강북쪽에 머물렀다.

나는 작은 배 한 척을 구해 다른 사람들을 태우고 물속으로 뛰어들어 배 밑바닥에 붙어 강 건너까지 힘껏 몰았다.

남한 경찰, 서울시경, 군과 정부 관리들이 고양이처럼 그들의 지위, 책임, 가족을 뒤로한 채 도망쳤다. 보호해주는 사람이 없는 시민들은 버림받은 채 무자비한 적군의 손아귀에서 고통 받았다.

신은 그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안다. 어떤 이는 고문 받았고 강간당하고 살해되고 강제 노역으로 끌려가고 혹은 수감됐다. 심지어 적들이 어떤 마을을 정복했을 때 죄 없는 소년 소녀들이 정복에 의해 유린당하기까지 했다. 아마 내가 그들을 저버린 마지막 사람이기에 그에 대한 기억에 나를 괴롭히는 것 같다.

전진하고 후퇴하는 동안 적군은 그들의 흔적을 벌거벗은 시체로 표시했다. 길거리에서 쉽게 손이 등 뒤에 묶인 채 머리에 총탄이 박혀있는 시체를 볼 수 있었다. 그런 끔찍한 광경은 전진하는 우리 아군을 상당히 비도덕적으로 만들었다.

한국전쟁 대학살 현장

내가 본 가장 끔찍하고 잔인한 장면은 수원에서 자행된 1,800명의 대학살이다. 나는 이 사건을 목격하면서 무기력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두 대의 불도저가 계속 움직여대면서 구덩이 모양의 무덤을 파고 사형수를 태운 트럭이 도착하면 바로 사형이 집행됐다.

그들의 손은 모두 등 뒤로 묶여 있었다. 그들은 새로 만들어진 무덤가로 급하게 일렬로 세워졌고 재빨리 사살돼 구덩이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묻혔다. 일단의 요원들이 확인사살을 했다. 나는 이러한 사태를 막으려 시도했으나 시간낭비라는 것을 알고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들도 자신들의 잘못을 알고 있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이 사건에 대한 최악의 부분은 사살된 사람들 모두가 공산주의자는 아니라는 것을 내가 나중에 알았다는 것이다. 한국군은 포로들을 남쪽으로 이송할 여유나 시간이 없었다. 이에 포로를 적군에 넘겨주기 보다는 사살한 채 후퇴했다. 내가 그곳에 있으면서 할 수 있는 것은 이 끔찍한 사건을 사진 기록을 남기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사실은 그 공포가 우리 연합군의 작품이라는 것이다.

1950년 6월 25일부터 8월 3일가지 한국 주둔 연합군은 새로이 소련에서 만들어진 T-34 탱크로 무장한 적군에 의해 위협을 받았다. 적군의 중무장된 탱크는 많은 사상자와 후퇴의 원인이 되었다. 이 탱크가 위력을 발휘하면서 이에 대한 대응책을 고안하기 위한 구체적 정보 데이터가 있어야만 했다. 1950년 8월 3일까지 못쓰게 된 적의 탱크의 위치를 알게 된 나는 4명의 한국 지원군과 함께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 그 지점으로 갔다. 적의 공격을 뚫고 우리는 북쪽으로 넘어갔다. 무기력한 T-34탱크가 있는 곳에 도달해 우리는 적군의 탱크 요원과 부대가 근처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각 부분의 명칭판과 몇 개의 작은 핵심 부품 사용설명서 등을 제거하여 가져 가려했다. 우리는 또한 실험을 통해 이 탱크의 어느 부분이 공격하기에 적합한지를 결정했다. 그 부분은 탱크 후미 윗부분에 있는 라디에이터 환풍기 뚜껑이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가 입수한 탱크에 대한 정보가 전쟁의 판도를 변화시켰다. 아군의 전투기가 T-34 탱크에 대한 공격 부위를 알고 난 후 방어가 휠씬 효과적으로 이뤄졌다. 결과적으로 적군의 전진속도가 느려진 것이다.



정리=윤지환기자 musasi@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