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체제위기 돌파구…南 '경협' 해법

리수용 북한 외무상은 10월 1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유엔본부에서 열린 유엔 총회 기조 연설에서 미국에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했다.
北 체제 위기 해결책으로 미국에 '평화협정' 체결 제의
북한 '최후의 카드' 제시… 한·미 "비핵화 해결 돼야"
北 리수용 외무상, 반기문 총장과 '모종의 대화' 나눠
박 대통령 '결단' 중요… 민족통합 반대세력 넘어서야
"북핵은 국제기구에 맡기고 남북은 '경협' 주력해야"

북한이 노동당 창건 70주년 기념일을 사흘 앞둔 7일 미국에 한반도 정전협정을 폐기하고 평화협정을 체결하자고 제의했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이날 담화를 통해 "정전협정이 체결된지 6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공고한 평화가 이룩되지 못하고 있다"며 이같이 촉구했다. 외무성 대변인은 "또다시 조선반도에서 전면전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담보는 없다"며 "이러한 심각한 사태를 막기 위한 근본 방도는 조미(북미)가 하루빨리 낡은 정전협정을 폐기하고 새로운 평화협정을 체결하여 조선반도에 공고한 평화보장체계를 수립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이 제의한 평화협정은 1953년 발효된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대체하는 방안이다. 정전협정은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클라크(Mark Wayne Clark)와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金日成), 중공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가 최종적으로 서명함으로써 협정이 체결되고, 이로써 6ㆍ25전쟁도 정지됐다.

이 협정으로 인해 남북은 적대행위는 일시적으로 정지되지만 전쟁상태는 계속되는 국지적 휴전상태에 들어갔고, 남북한 사이에는 비무장지대와 군사분계선이 설치됐다.

북한은 이보다 앞서 1974년부터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했다. 그러나 줄곧 정전협정 서명에 참가하지 않은 한국을 제외하고, 국제연합군 사령관인 미국인이 협정에 서명했으므로 평화협정 역시 정전협정 당사국인 미국과 체결해야 한다는 주장을 계속해 왔다.

북한은 이번에도 미국에 평화협정 체결을 제의했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현실적으로 남조선 군의 전시작전통제권을 쥐고 있는 것도 미국이며, 정전협정을 관리하고 있는 것도 미국"이라며 "미국이 대담하게 정책전환을 하게 되면 우리도 건설적인 대화에 응할 용의가 있으며, 미국의 안보상 우려점들도 해소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의 평화협정 제의에 대해 미국은 부정적 입장을 나타냈다. 북한은 지난 1일에도 리수용 외무성 부상이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미국에 평화협정 체결을 요구했다. 이에 미 국무부는 즉각 "북한 비핵화를 최우선시하는 미국의 정책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다"고 했다. 최근 한국을 방문한 토니 블링큰 국무부 부장관도 북한과의 관계에 있어 "평화협정보다 북한의 비핵화가 우선"이라고 말했다.

우리 정부도 북핵을 이유로 소극적인 입장을 보였다. 홍용표 통일부 장관은 8일 "(평화)협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실질적인 평화 구축을 위한 노력이 더 중요하다"고 밝혔다. 홍 장관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평화협정이 체결된다고 해서 평화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고 했다.

노광일 외교부 대변인은 8일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는 이미 9ㆍ19 공동성명에 잘 나와있다"고 강조했다. 9ㆍ19 공동성명에는 북한의 비핵화 진전에 따라 직접 관련 당사국들이 적절한 별도 포럼에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제에 관한 협상을 가질 것이라고 돼 있다.

하지만 이번에 북한이 평화협정을 제의한 것은 종래와는 다른 '절실한 결단'으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한다. 베이징의 정통한 북한 소식통은 "북한은 주로 정전협정 폐기를 주장해와 이번 평화협정 제의는 이례적이고 특별한 것"이라고 전해왔다. 소식통은 "북한의 이번 평화협정 체결 제의는 자금난에 따른 체제 위기에 직면해 내놓은 '최후의 카드'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말했다. 특히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은 자금난으로 당을 운영하기가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실제 북한은 노동당 창건 기념행사를 치르기 어려울 정도로 자금난에 봉착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때문에 행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전에 없던 무리한 방법을 강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예컨대 주민들에게 강제로 돈을 걷고 외교관에게 1인당 최저 100만달러(약 11억9400만원)의 외화 대출을 할당했다는 전언이다. 또한 공작 기관인 정찰총국은 해외 공작원에게 "이달까지 1인당 20만달러(약 2억3880만원)를 상납하라"라고 지시해 공작원들이 본래 업무보다 외화벌이에 쫓기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 단둥(丹東)의 대북 소식통은 "북한이 노동당 창건 기념행사를 하면서 종래와 달리 기념품을 줄이고 대신 돈을 보내라는 요구가 많았다"고 했다.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조총련)도 기념행사 참석자를 모집하고 있지만 1인당 30만엔(약 296만원)의 참가비를 내야 하고, 통행료 등으로 추가 지출을 강요받아 기피하는 분위기가 강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렇듯 북한의 자금난은 김정은체제를 강하게 압박했다. 베이징 소식통은 "김정일 때만해도 당 창건 행사에 지금과 같이 무리하게 돈을 마련하지 않았는데 장성택 사망 이후 정책 혼선과 실패로 경제난이 가중되고 민심 이반까지 겹쳐 김정은체제를 위협하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당의 불만이 높아지면서 김정은 제1의원장이 이를 무마하기 위해 직접 자금 마련에 나섰다는 게 소식통의 전언이다.

국내외 북한 전문가들도 경제난에 따른 김정은체제의 위기를 거론하지만 소식통은 그 심각성을 북한 내부 관계자의 소식을 통해 보다 상세하게 전했다. 이들의 견해를 종합하면 북한이 미국에 평화협정 체결을 제의한 것은 경제(자금)난에 따른 체제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것으로 박근혜정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즉 박 대통령이 주도권을 갖고 남북관계를 풀어갈 수 있고 남북대화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생긴 셈이다. .

하지만 남북 간 대화와 물밑 교류도 잘 알고 있는 베이징 소식통은 우리 정부가 과거와 같은 전철을 되풀이할까 우려를 나타냈다."북한 상황이 남한에 분명한 기회이지만 신중할 필요가 있다. 박 대통령이 현명하게 결단해 남북이 통합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야 한다. 소식통은 5%의 평양을 상대로 '퍼주기'의 실책을 하지 말고 95%의 주민을 향해 비정치적인 경협 같은 분야에 전력할 필요가 있다 전했다.

국내외 북한 전문가들도 박 대통령이 통일(민족통합)에 부정적인 세력을 넘어서 결단있게 일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 대통령이 집권 후 가장 역점을 둔 통일 국정이 번번이 실패하거나 후퇴한데는 통일에 부정적인 북한 관련 정부 기관이나 청와대 참모 때문으로 이제는 박 대통령이 그들의 견제를 과감하게 떨쳐내고 소신있게 국정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북한의 최대 현안이 경제난인 만큼 '경협'을 중심으로 북한을 상대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아울러 북핵이 중요한 이슈이지만 남북교류에 걸림돌이 된 만큼 가급적 유엔이나 6자회담 같은 국제기구에 맡기고 박 대통령은 비정치적 경제 분야에 전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강조했다.

특히 북한 리수용 외무상이 1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면담한 이후 북한이 이례적으로미국에 평화협정 체결을 제의한 것을 두고 국제 외교가에선 '북핵'과 관련한 얘기들이 나오고 있다. 일각에선 리수용 외무상이 북한핵 문제를 놓고 반기문 총장과 모종의 대화를 나눴고 긍정적인 해법을 찾은 게 아니냐는 분석이 제기됐다. 따라서 북핵 문제가 국제관계에서는 물론 남북 간에도 합리적으로 풀릴 수 있다는 조심스러운 전망이 나온다.

한편 북한이 평화협정 체결을 제의한 것과 관련해 북한의 속사정을 잘 알고 있는 베이징 소식통은 박 대통령이 위원장으로 있는 통일준비위원회가 북한의 제의를 긍정적으로 평가해줄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나타냈다. 통준위가 '흡수통일'논란으로 북한의 불신이 매우 크고 위원장인 박 대통령이 숱한 비판을 받아온 만큼 이를 불식시키고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향후 박 대통령의 대북 전략과 남북관계 해법이 주목된다.



박종진 기자 jjpark@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