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노지만 다른 뿌리…文 ‘친구’, 安 ‘동지’

文, 인권 변호사로 함께 활동…盧정부 핵심 역할

安, 노무현 연구소 인연…盧 집권 후 정치와 거리

文ㆍ安 같이 일한 적 없어…경쟁적 동반자 관계

문재인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와 안희정 충남지사는 고(故)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적 유산이다.

문재인은 1983년부터 동업자이자 친구로, 안희정은 1994년부터 정치적 동지로 노무현과 관계를 맺었다. 두 사람은 지금까지 함께 호흡을 맞춘 적은 없다. 문재인은 대통령 당선 전까지 음지에서 친구 노무현을 도왔고, 안희정은 양지에서 정치인 노무현을 위해 일했기 때문에 딱히 마주칠 일이 없었던 탓이다. 참여정부에서 함께 일할 기회는 있었다. 하지만 안희정이 법의 심판을 받고 공직을 거절하면서 이마저 성사되지 않았다. 두 사람의 연결고리는 ‘노무현’ 하나뿐이다. 같은 친노지만 뿌리가 다른 두 사람의 노무현과의 인연을 재조명해봤다.

친구이자 마지막 비서실장 ‘문재인’

문재인은 1982년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졸업하고 수료식에서 법무부장관상을 받을 정도로 성적이 우수했다. 하지만 학생운동 전력 때문에 지망했던 판사 임용에 떨어졌고, ‘김앤장’ 등 대형로펌들의 러브콜에도 홀어머니를 모실 겸 고향 부산에서 변호사 생활을 하기로 결심한다.

이 때 문재인의 인생을 바꾼 ‘노무현’과 만나게 된다. 이미 1978년부터 부산에서 개업 중이었던 당시 노무현 변호사는 김해 장유암에서 함께 사시 준비를 했던 박정규씨와 법률사무소를 꾸려나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박정규는 검사에 임용됐고 문재인과 사시 동기였던 박정규가 문재인을 노무현에게 소개시켜주면서 둘의 인연은 시작됐다. 박정규는 훗날 참여정부 민정수석을 지낸다.

노무현을 처음 만난 문재인은 자신의 저서 <운명>에서 당시 느낌을 이렇게 밝혔다. ‘나와 같은 세계에 속한 사람이라는 느낌 같은 게 있었다.…(중략)… 나하고 같이 일을 하게 되면 그걸 계기로, 함께 깨끗한 변호사를 해보자고 했다. 따뜻한 마음이 와 닿았다’

노무현은 문재인보다 6살 많고 사시도 5년 선배였지만 갓 연수원을 나온 후배를 동등한 조건을 대우했다. 문재인 역시 노무현에게 항상 선배님이란 호칭을 사용하며 깍듯이 대했다.

둘은 ‘깨끗한 변호사’가 되기 위해 사건 알선 브로커를 비롯해 판ㆍ검사 접대를 끊었다. 자연스레 시국, 노동, 인권 사건들을 맡게 됐고 영남지역 인권 변호사로 이름을 날리게 된다. 그러던 1988년, 당시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가 김광일 변호사와 함께 두 사람에게 정계진출을 제안했지만 문재인은 거절한다. 이후 부산 동구에서 당선된 초선의 노무현 의원은 5공 청문회 스타로, 문재인 변호사는 계속 영남지역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한다. 당시 문재인은 ‘미국문화원 방화사건’, ‘동의대학교 사건’ 등 사회적으로 파장을 일으킨 시국사건들을 변론했다.

이후 문재인은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부산지부와 경남지부장을 역임하며 꾸준히 시민사회 활동을 했지만 정치권과는 거리를 뒀다. 하지만 2002년 10월 당시 노무현 대통령 후보의 끈질긴 설득 끝에 부산선대위 본부장 직을 수락하며 노무현 당선을 위해 뛰었다. 이 부산선대위는 부산팀이라고 불렸다.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 이후 문재인은 변호사 복귀를 수차례 밝혔지만 노 대통령은 “나를 대통령으로 만들었으면 책임지라”며 문재인을 초대 민정수석으로 앉힌다. 하지만 1년 만에 녹내장과 고혈압 등 건강 악화로 청와대를 떠났다.

민정수석을 그만두고 네팔에서 트레킹을 하던 중 영자 신문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식을 듣고 귀국한 문재인은 변호인단을 꾸려 대통령 변호에 나섰다. 탄핵이 기각되고 노 대통령이 대통령 업무에 복귀하자 다시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에 복귀한 문재인은 민정수석과 정무특보를 거쳐 참여정부 마지막 비서실장을 역임했다.

퇴임 이후 검찰조사를 받게 된 노 전 대통령의 변호도 맡았던 문재인은 노 전 대통령 서거 소식을 병원에서 직접 공식 발표했다.

참여정부 시절에도 수차례 총선 출마 요구를 거절했던 문재인은 노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정치의 길에 들어선다. 그는 자신의 저서 <운명>에서 ‘대통령은 유서에서 ’운명이다‘라고 했다. 속으로 생각했다. 나야말로 운명이다. 당신은 이제 운명에서 해방됐지만, 나는 당신이 남긴 숙제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됐다’

노무현의 뜻과 새로운 정치를 위해 정치인이 됐다는 문재인은 2번의 도전 끝에 대통령이 될 수 있을까.

노무현을 뛰어넘으려는 적자(嫡子) ‘안희정’

안희정은 대학 2년 선배 김영춘 의원(부산 진구갑)의 소개로 1989년 당시 통일민주당 김덕룡 의원 비서관으로 정계에 입문했다. 이 무렵 당시 노무현 의원 비서관이었던 이광재 전 강원지사를 만나 친분을 쌓았다. 이후 3당 합당에 반대해 탄생한 꼬마 민주당으로 자리를 옮긴 안희정은 이철 전 의원 비서관을 맡아 노 전 대통령과 직접적인 인연을 맺지 못했다.

그러던 1993년, 안희정을 좋게 평가한 이광재의 권유로 노무현이 만든 ‘지방자치실무연구소’에 합류하면서 노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본격 시작된다. 연구원으로 들어간 안희정이 받은 월급은 70만원이었지만 평소 존경하던 노 전 대통령에 대한 신념으로 버텼다고 한다. 노 전 대통령 또한 안 지사의 능력을 높이 사 사무국장이란 직책을 맡겼다.

안 지사는 연구소에서 안 지사는 활동하는 동시에 정치인 노무현을 지원하기 위해 생수 사업, 보험 모집인, 선거 홍보 기획사 등에 뛰어들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이 선거를 치를 때에는 캠프 살림살이를 도맡아 선거를 이끌었다.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임에도 중책을 맡긴 것을 감안하면 노 전 대통령의 신임이 어땠는지 알 수 있다. 노 전 대통령의 대선 캠프였던 ‘금강팀’에서는 정무팀장으로 조직과 살림을 꾸려나가 당선에 일조했다.

안희정은 노무현의 최측근이었지만 참여정부에서 활동하지 못했다. 대통령 취임식조차 가지 못했다. 대선불법정치자금 의혹이 그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정치자금수사가 언제 터질지 모를 시한폭탄이었고, 수사대상이 될 운명이었다”며 “새롭게 출범하는 참여정부에 누가 될까 두려워 취임식에 갈 수 없었다”고 밝혔다.

예상대로 그는 2004년 불법정치자금 관련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안희정은 1심 최후진술에서 “저를 무겁게 처벌해주셔서 승리자도 법과 정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이고 법과 정의의 새로운 대한민국을 감당하게 해달라”고 말했다. 이와 관련 안희정은 최근 “제도상 미비 때문에 불법정치자금으로 선거를 일부 치르지 않을 수 없었다”며 “대선자금 수사 자체는 제 개인의 범죄행위가 아니라 선거 정치자금 제도의 문제였다. 하지만 노무현 대선 캠프의 살림을 맡고 있던 사람으로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었다”고 밝혔다. 당시 노 전 대통령은 “희정씨 문제는 내 문제”라며 눈물을 많이 보였다고 한다.

2심과 대법원에서 1년형이 확정돼 만기 복역 후 출소한 안희정은 잠깐 대학 연구소 연구원으로 있었을 뿐 일반인으로 조용히 지냈다. 정치 재개를 위해 2008년 총선 공천을 신청했지만 정치자금법 위반 전력으로 배제되기도 했다.

그러던 2009년 노 전 대통령 서거 이후 와신상담하던 안희정은 2010년 충남도지사에 출마, 박상돈 자유선진당 후보를 이기고 정치무대에 복귀했다. 이어 2014년에는 정진석 새누리당 후보를 꺾고 재선에 성공, 대선주자로 발돋움했다.

자신에게 희망을 준 노무현을 좋아하고 사랑했다는 안희정은 문재인을 넘어 청와대에 입성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허인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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