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 학자서 국정농단 공범으로 추락

安 논문을 시작으로 美 사회복지 제도 개혁 논의 본격화돼

2005년 朴 캠프 합류로 첫 인연, 경제 책사로 전폭적 신임 받아

청와대 입성 후, 승승장구…최순실 국정농단 깊숙이 개입해

朴과의 잘못된 만남으로 범죄자가 된 安… ‘스모킹건’ 역할도 ‘최순실 게이트’에서 촉발된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에서 안종범 전 청와대 경제수석은 ‘스모킹 건( smoking gun, 범죄의 결정적 증거)’ 역할을 했다.

박 대통령의 경제책사에서 대한민국 정책을 좌지우지한 청와대 실세로, 다시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을 풀어줄 핵심 인물로 부상한 안 전 수석과 박 대통령의 ‘불행한 인연’을 재조명했다.

安 논문, 미국 사회복지 제도 개혁 영향줘

안종범 전 수석은 1959년 경상북도 대구시에서 태어났다. 대구 계성고등학교, 성균관대 경제학과, 동 대학교 대학원 경제학 석사를 거쳐 미국 위스콘신 대학교에서 경제학 박사 과정을 졸업했다.

안 전 수석은 학계에서 인정받는 인물이었다. 위스콘신대 경제학 박사 과정 당시 쓴 논문이 미국 사회복지 정책 개혁에 시발점이 됐기 때문이다. 1991년 그는 자신의 논문에서 미국 사회 복지 정책의 근간이었던 AFDC(아동부양가정 보조)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미혼모 자립의지를 높이는 방안에 대해 썼다. 안 전 수석의 논문은 1992년 학회지에 게재됐고, 제도 개혁 논의가 본격화돼 1996년 클린턴 정부는 새로운 TANF(한시적 빈곤가정 지원)라는 제도를 도입했다. 이후 수급자는 10년 사이 절반으로 줄었고, 아동빈곤율은 20%대에서 10%대로 감소했다. 이 제도는 클린턴 정부의 대표적 사회복지 제도 개혁으로 꼽힌다.

안 전 수석은 "당시 미국에는 심지어 13살짜리 미혼모까지 있을 정도로 미혼모 문제가 심각했지만 '물고기 잡는 법'을 가르쳐주는 정책은 없었다"며 "미혼모들의 자립을 돕는 제도 개선에 조금이나마 영향을 줘 기쁘다"고 말한 바 있다.

한국으로 돌아온 안 전 수석은 대우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 한국조세연구원 연구위원 및 연구조정부장 등을 역임했다. 이어 서울시립대 경제학과 조교수와 성균관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성균관대학교 경제연구소 소장 등을 거쳤으며 경제학 중에서도 재정학을 주로 연구하고 가르쳤다.

그는 학자로서 공공부채의 급격한 증가를 비판하고 국가 재정건전성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왔다. 또한 진보 진영과도 대화가 통하는, 유연한 보수 성향 학자로 꼼꼼하고 부지런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2005년, 박근혜와의 첫 만남

안 전 수석이 처음 정치권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1997년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총재의 첫 번 째 대선 도전 당시였다. 서울시립대 교수였던 안 전 수석은 비공개 그룹에서 이 전 총재를 도왔지만 대선에서 패배하자 학계로 돌아왔다. 하지만 2000년 즈음 다시 강석훈, 최경환, 이혜훈 등과 함께 ‘이회창 대통령’ 만들기에 나섰다. 2002년에는 이회창 캠프에서 복지특보로 활동했지만 다시 고배를 마셨다.

그러던 2005년, 박근혜 대통령 측근으로부터 2007년 대선을 대비한 비밀 모임에 합류해달라는 요청을 받아 고심 끝에 합류했다. 2006년에는 새누리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 이사를 지내며 박 대통령과 더욱 가까워졌다.

박 대통령이 2007년 한나라당 경선에서 패하자 이후 안 전 수석은 ‘5인 스터디그룹’을 통해 박 대통령의 경제 가정교사 역할을 맡았고 박 대통령의 경제분야 대선공약을 만들었다.

안 전 수석은 사실상의 박 대통령 대선 출정식을 주도했다. 그는 2010년 12월 헌정기념관에서 열린 당시 박근혜 의원 개최 ‘사회보장기본법 개정을 위한 공청회’의 발제를 맡았다. 당시 박 의원은 “현 급여 중심의 소득보장형 복지국가에서 생애주기별 사회안전망 구축으로 복지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하며 중앙정부와 지방정부간, 정부부처별로 흩어져 있는 사회보장 정책들이 통합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 대통령은 18대 국회 때 이 개정안을 대표발의하고, 이를 토대로 '생애주기별 맞춤형 복지'를 대선공약으로 내걸면서 ‘박근혜 복지법’이라 불렸다.

물밑에서 개정안 및 복지 공약을 개발한 이가 바로 안 전 수석이다. 당시 공청회에서 함께 발제를 맡았던 최성재 서울대 사회복지학 명예교수는 박근혜 정부 초대 청와대 고용복지수석을 지냈다.

박 대통령 지시 무조건 따른 安의 몰락

자신이 지원하던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논공행상 전쟁이 펼쳐진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대통령과 결별한다. 안 전 수석은 달랐다. 2012년 비례대표로 국회에 입성한 안 전 수석에게 박 대통령이 “국회에서 대선 공약을 관철시켜라”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다. 묵묵히 국회에서 대통령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던 안 전 수석은 2014년 6월 청와대 경제수석으로 임명되자 미련 없이 의원직을 던졌다. 2016년 5월에는 비서실 업무를 총괄하는 정책조정수석으로 자리를 옮겨 국정 운영을 실질적으로 조율하는 역할을 맡았다. 박근혜 정부 순장조로 임기 말까지 박 대통령을 보좌할 것으로 예상됐던 안 전 수석의 위상은 작년 9월경부터 추락했다. ‘최순실 국정농단’이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건이 일부 밝혀진 현 상황에서 안 전 수석은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대기업으로부터 774억 원 출연을 요구했고 모금하는데 앞장섰다. 또한 K스포츠재단의 운영에 안 전 수석이 일일이 개입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안 전 수석은 또한 대통령의 지시라면 최순실(61ㆍ구속기소)씨 해외 사업 지원 방안도 논의했고, 민간기업 임원 자리도 알아봤다. 공직자로서는 해서는 안 될 행위를 범죄 의식 없이 실행했다. 안 전 수석도 대통령 지시를 무조건 따른 데에 뒤늦게 후회했다. 지난달 22일 헌법재판소 증인으로 출석한 안 전 수석은 “대통령 지시에 순응한다는 차원에서 나름대로 판단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대통령이 지시하면 빨리 수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32년 전 미국 유학생활 당시 안 전 수석을 처음 만난 유승민 바른정당 의원은 그를 무골호인(無骨好人)같은 사람이었다고 표현했다. 아주 순하고 착해서 누구에게든 잘하는 동시에 줏대가 없이 두루뭉술하여 남의 비위를 모두 맞추는 사람을 뜻하는 말이다. 그를 곁에서 지켜본 자유한국당의 한 의원은 “안 수석은 한 번도 박 대통령이 싫어하는 얘기를 하지 않았다. 시키는 대로만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가랑이 찢어진 격’이라고도 말한다. 정계에 발을 들이면서 권력에 눈이 멀어 황새(문고리 3인방)을 쫓다 화를 입었다는 얘기다. 특검은 수사를 마무리하면서 안 전 수석에게 뇌물 수수혐의를 추가했다. 비선 의료 의혹을 받고 있는 김영재 원장의 부인 박채윤 와이제이콥스메디컬 대표로부터 금품과 향응을 제공받았기 때문이다. 기껏해야 위스키와 삼계탕을 받아먹는 수준이었던 안 전 수석이 직접 뇌물을 요구할 정도로 변하게 된 건 박 대통령을 만나면서 시작된 것이다.

허인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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