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대통령 탄핵심판ㆍ이재용 구속 결정적 증거…특검 수사 분수령 돼

부인ㆍ모르쇠로 일관하던 안종범 검찰 긴급체포 후 실토 시작

安 수첩 56권 특검 수사에 혁혁한 공 세워…이재용 구속에 큰 역할

헌재에서 쏟아낸 작심 발언…특검 수사 막판 뇌물수수 혐의 추가

지난달 22일, 헌법 재판소의 박근혜 대통령 탄핵심판 16차 변론에 출석한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은 미르ㆍK스포츠재단 설립 당시를 회상하며 “대통령 지시에 순응한다는 차원에서 나름대로 판단을 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여유를 갖고 판단했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뒤늦게 후회했다. 최순실ㆍ문고리 3인방(이재만ㆍ안봉근ㆍ정호성)과 함께 국정을 주물렀던 청와대 실세는 그렇게 고개를 떨궜다.

안 전 수석은 지난해 9월부터 실체를 드러낸 ‘최순실 국정농단’의 핵심 인물이다. 그는 이 사건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시발점인 미르ㆍK스포츠 재단의 모금 과정에 깊숙이 개입한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사에 들어가자 그는 자신이 맡았던 역할에 대해 순순히 털어놨다. 이 사건의 공범으로 분류되는 인물 중 제일 먼저 입을 연 사람이 안 전 수석이다. 또한 사초에 가까운 그의 업무수첩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구속에 ‘스모킹 건’ 역할을 맡았다. 스모킹 건(smoking gun; 연기가 나는 총)은 어떤 식으로든 부인하지 못할 범죄의 ‘결정적 증거(단서)’를 의미한다.

박 대통령 탄핵심판 선고일이 오는 10일 혹은 13일이 유력한 가운데 뇌물수수 혐의는 중요 쟁점 중 하나다. 특히 뇌물수수 혐의의 진원지인 미르ㆍK스포츠재단 모금을 주도했던 안 전 수석의 발언과 증거품 역시 어떤 역할을 할지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지금까지 밝혀진 안 전 수석의 증언과 수첩이 가진 의미에 대해 살펴봤다.

부인ㆍ모르쇠로 일관하다 검찰 긴급체포 후 실토 시작

지난해 10월 21일, 국회 운영위원회 청와대 국정감사에 출석한 안종범 당시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은 미르ㆍK스포츠재단 모금에 권력 실세가 개입됐다는 의혹에 대해 “순수한 자발적 모금이었다”고 말했다. 안 전 수석은 또 “대기업에 투자하라고 한 적은 없으며, 재단에 모금이 되는 상황에서 이승철 전경련 부회장이 저에게 얘기했다”고 주장했다. “최순실 씨가 대통령 연설문을 고치는 게 취미라는 증언이 맞느냐”는 질문에는 “전혀 사실이 아니다”라면서 “최 씨를 알지 못한다”고 답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에 대해 전면 부인한 것이다.

꼿꼿한 안 전 수석의 자세는 검찰 조사 초반까지 이어졌다. 지난해 11월 2일,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한 안 전 수석은 기업들에게 모금을 강요한 것이 아니고 각 기업의 판단에 따라 자발적으로 동참한 것이라고 진술하며 혐의를 부인했다. 안 전 수석은 최순실 씨 또한 모르는 사람이라고 진술했다. 하지만 검찰이 긴급체포를 통한 수사 압박에 들어가자 안 전 수석의 태도가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박 대통령이 두 재단 및 최 씨가 실소유주인 더블루케이의 일부 구체적인 사업 내용까지 챙겨봤다는 취지로 말한 것이다. 또한 미르ㆍK스포츠재단 설립과 모금은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였다고 진술했다. 이후 11월 6일,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 및 강요미수 혐의로 구속된 안 전 수석은 하나씩 새로운 사실을 증언하기 시작했다.

안 전 수석은 이어지는 검찰 조사에서 박 대통령이 차은택 광고감독을 소개했고, 광고대행사 포레카 지분 강탈 시도 당시 ‘대통령의 뜻’이 있었다고 언급했다.

동시에 검찰은 안 전 수석 자택과 집무실 압수수색을 통해 안 전 수석의 업무 수첩 17권을 입수했다. 손바닥 크기의 이 수첩은 권당 30쪽 정도로 총 510쪽 분량이다. 작성 시기는 그가 2014년 6월 경제수석으로 청와대에 입성한 지 6개월 후인 2015년 1월부터 2016년 10월까지다.

안 전 수석은 수첩 앞쪽에는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나 티타임 회의 내용을 적고, 박 대통령의 지시사항은 뒤쪽부터 기재하는 특이한 방식을 취했다. ‘VIP’라는 제목 하에 날짜를 적고 박 대통령의 업무 지시를 꼼꼼히 기록했다. 참모들 간 논의와 대통령 말씀이 한데 뒤섞이는 일을 방지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대통령 지시사항에는 미르와 K스포츠 재단 기금 모금과 관련해 대통령이 내린 구체적인 지시가 적혀 있었다. 기업들에게 요구한 액수 등 세세한 내용까지 기록됐다. 또 최순실씨가 실소유한 광고 회사에 대기업 일감을 몰아주란 지시도 남아 있었다. 정호성 전 비서관으로부터 압수한 휴대전화와 함께 박 대통령으로서는 부인하기 어려운 물증이었다. 이를 토대로 검찰은 대통령 대면조사를 추진했지만 차일피일 미뤄지며 성사되지 않았다. 이후 박 대통령은 특검에서 대면조사를 받겠다는 의향을 밝혔고, 12월 9일 탄핵 소추안이 국회에서 가결됐다.


검찰 조사에서 조금씩 입을 열었지만 사건이 막상 재판에 넘어가자 안 전 수석은 이전의 진술에서 한발 물러서는 모습을 보였다. 지난 12월 19일, 첫 공판준비기일에 안 전 수석의 변호인은 “(박근혜) 대통령의 이야기를 듣고 전경련에 전달하는 차원에서 알려줬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특검 수사에 혁혁한 공을 세운 安 수첩

한발 빼던 안 전 수석은 특검 수사가 시작되자 다시 진술하기 시작했다. 안 전 수석의 진술과 수첩은 특검의 첫 결과물인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 구속에 도움을 줬다. 안 전 수석 수첩에는 대통령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과정에 조력할 것을 하명한 내용이 포함돼있었고, 거듭된 조사에 문 전 장관에게 지시했다고 실토했기 때문이다. 문 전 장관 구속은 청와대-보건복지부-국민연금-삼성 합병으로 이어지는 유착 의혹을 파헤치는 데 첫 시작이었다.

기세를 몰아 특검은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을 소환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간 합병 당시 뒷거래가 있었는지 캐물었다. 이는 박 대통령 뇌물 수수 혐의와도 맞닿아 있었다. 박 대통령과 이 부회장의 2015년 7월 독대 이후 지시 사항 역시 안 전 수석 수첩에 적혀있었다.

이를 토대로 특검은 이 부회장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하지만 법원은 삼성 측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삼성 측은 제일모직·삼성물산 합병은 박 대통령과의 독대 전에 이뤄졌고 대가를 바라고 최 씨를 지원한 것이 아니라고 항변했다. 법원은 '부정 청탁'과 '대가성'이 충분히 입증되지 않는다고 봤다.

특검팀에게는 최대 고비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안 전 수석의 새로운 업무수첩 39권을 확보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이했다. 지난 설 직전 안 전 수석의 비서관 김건훈씨가 제출한 새 수첩은 2014년 6월부터 지난해 11월까지 업무 기록이 담겨 있었다. 특히 기존 수첩 17권에는 없던 삼성 관련 내용이 포함돼 있었다. 한 특검 관계자는 수첩을 두고 “하늘이 특검을 돕는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특검은 공정위 관계자 업무일지와 함께 안 전 수석 수첩의 내용 등 새로운 증거자료를 근거로 이 부회장 구속영장을 재청구했고 결국 삼성의 방패를 뚫었다.

특검팀 관계자는 “안 전 수석의 수첩에는 ‘삼성바이오로직스’ ‘금융지주회사’ 등 삼성과 관련한 키워드들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잔뜩 적혀 있다. 조선시대 왕실의 사초(史草)처럼 과거의 기록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말했다.

특검팀은 한정석(40) 영장전담판사에게 구속의 필요성을 주장하기 위해 안 전 수석의 수첩 내용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서류 형태로 정리했다. 그곳에 수첩 속 단어들의 의미와 그 배경이 되는 상황들을 분석한 내용을 적어 한 판사에게 제출했다. 또 다른 특검 관계자는 “안 전 수석이 워낙 악필이기도 하고, 수첩에 나열된 단어들이 어떤 맥락에서 적혀 있는지를 설명할 필요가 있었다”고 설명했다.

일각에서는 ‘적법 절차를 거치지 않고 비서관이 무단으로 특검에 제출했다’며 증거 능력이 인정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에 이규철 특검보는 “이 수첩은 안 전 수석이 폐기하라고 자기 비서관에게 맡긴 것을 비서관이 청와대 서랍에 보관하다가 이번에 비서관의 변호인 동의 하에 제출한 것"이라며 ”증거물품의 보관자일 경우에도 범죄의 증거물이라면 제출할 의무가 있다. 제출하지 않으면 증거은닉에 해당한다. 비서관이 보관자로서 변호인 동의 하에 수사기관에 제출한 건 법적으로 전혀 문제가 없다고 판단한다"고 강조했다.

이 특검보는 이어 “안 전 수석이 특검에 출석해 수첩 내용이 사실이라고 진술했고 제출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고 진술했다“며 증거 능력 여부 논란을 일축한 바 있다. 안 전 수석 사건을 담당하고 있는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 22부(부장판사 김세윤)와 헌법재판소 역시 안 전 수석 수첩에 대해 증거 능력을 인정했다.

헌재에서 쏟아낸 작심 발언

특검 수사와 동시에 헌재 증인 출석을 병행한 안 전 수석은 제기된 의혹들에 대해 시인했다. 지난 1월 16일 헌재 5차 변론기일에 출석한 안 전 수석은 “미르 재단이라는 이름을 박 대통령이 처음 말했고, 미르를 포함해 K스포츠재단의 임원진도 박 대통령이 불러줬다"며 "임원진들은 자신들이 임원이 될 것을 미리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였다"고 말했다.

그는 또 박 대통령이 현대차와 CJ를 개별 면담하고 기금 규모와 관련해 30억 원 기준을 제시했냐는 질문에 안 전 수석은 ”그렇다“고도 말했다. 안 전 수석은 이어 기업들의 사면 요청이 있었던 사실을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최태원 회장의 특사 소식을 SK에 미리 알렸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특히 비선 실세의 존재에 대해서는 지난해 10월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그 실체를 일부 인정하자고 박 대통령에게 건의했지만 박 대통령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지난달 22일 16차 변론에 출석한 안 전 수석은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 설립 당시 “대통령 지시에 순응한다는 차원에서 나름대로 판단을 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며 “대통령이 지시하면 빨리 수행을 해야한다고 생각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안 전 수석은 최순실씨 최측근 차은택씨의 인맥인 이동수ㆍ신혜성씨를 KT 임원으로 임명한 배경에 대해서도 "대통령 추천으로 KT 회장에 얘기한 것은 맞다"고 증언했다.

안 전 수석은 자신의 재판정에서 이번 사태에 임하는 태도를 내비치기도 했다. 지난 1월 20일 서울중앙지법 6회 공판에서 새 업무 수첩의 증거 능력 채택에 이의를 제기하며 한 말이지만 “재판장님, 제가 한 말씀만 하겠다. 처음엔 박 대통령 보호 위해 묵비권까지 생각했지만 역사 앞에 섰다고 판단해 고심 끝에 진실을 얘기했다”고 밝힌 것이다.

안 전 수석의 진술과 수첩은 특검 수사에서 큰 역할을 했다. 검찰 진술 조서와 수첩 역시 헌재에서 증거로 인정했기 때문에 탄핵심판에도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안 전 수석은 특검 수사 막판 뇌물 수수 혐의가 추가됐다. 청와대 비선진료 의혹을 받는 김영재 원장의 부인 박채윤 씨가 안 전 수석 부인에게 현금과 명품백, 무료시술 등 수천만 원대의 금품과 향응을 제공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시종일관 박 대통령의 지시에 따랐을 뿐이라는 그의 주장이 무색해진 순간이었다. ‘최순실 국정농단’ 수사에 안 전 수석의 말과 글이 기여한 바는 크지만 그 역시 공범 중 하나일 뿐이다.

허인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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