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계엄령 선포 치밀하게 준비… ‘쿠데타’의 망령 되살아날 뻔했다

한민구 전 국방부 장관이 지난해 국회 국방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현안 질의를 받고 생각에 잠겨 있다. 그는 기무사 계엄령 검토 문건 의혹의 한가운데 서 있다. (연합)

지난해 3월 ‘탄핵 정국’ 당시 국군기무사령부(기무사)가 작성한 계엄령 검토 문건이 큰 파문을 낳고 있다. 특히 이 문건에는 단순한 계엄령 검토가 아니라 실제 실행을 염두에 둔 것으로 여겨질 수 있는 대목이 상당 부분 포함돼 있어 주목된다. 국방부는 특별수사단을 설치해 문건 작성과 관련된 실체를 파헤치기 위한 수사에 나선 상황이다.

계엄령은 우리 현대사의 아픈 상처와 직결돼 있다. 5ㆍ16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과 12ㆍ12 쿠데타를 일으킨 신군부 세력이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계엄령 선포로 국민을 무력화시키고 탄압한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전시나 사변 등 국가비상사태에 공공의 안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선포한다는 계엄령의 법적 취지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던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계엄령이 마지막으로 선포된 것은 10ㆍ26 사태 직후인 1979년 10월 27일이다. 이 계엄령은 1981년 1월 24일까지 무려 439일간 지속됐다. 이 기간 동안 신군부 세력은 국가권력을 완전하게 장악했다.

그런데 4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계엄령의 어두운 망령이 되살아났다. 그 사이 우리나라는 산업화와 민주화에 성공했을 뿐 아니라 경제적, 문화적으로 세계가 주목하는 국가가 됐다. 사실상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그런 대한민국에서 국군의 핵심기관 중 하나인 기무사가 계엄령을 검토했다는 것은 국민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갈 수밖에 없다.

지난 7월5일 이철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2017년 3월 기무사가 작성한 계엄령 검토 문건을 공개했다. 이 문건의 정식 명칭은 ‘전시 계엄 및 합수(합동수사) 업무 수행 방안’이다. 지난해 3월초 조현천 당시 기무사령관이 한민구 당시 국방부 장관에게 보고한 것으로 파악됐다는 게 이철희 의원 측의 주장이다.

이때는 헌법재판소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탄핵 심판 결정을 앞두고 있던 시점이다. 기무사 계엄령 문건은 탄핵 심판 결정 이후 “탄핵 심판 결과에 불복한 대규모 시위대가 서울을 중심으로 집결하여 청와대, 헌법재판소 진입ㆍ점거를 시도”하고 “정부(경찰)에서 대규모 시위를 차단하자 국민 감정이 폭발하고 동조 세력이 급격히 규합되면서 화염병 투척 등 과격 양상이 심화”할 것으로 과장되게 전망하고 있다.

20일 오후 청와대에서 공개한 '계엄령 문건'의 세부자료.청와대는 국군기무사령부가 작성한 이 자료에 "계엄에 대한 세부 계획과 대응 방식이 상세하게 정리돼 있다"고 밝혔다. 청와대는 국방부에서 취합된 '계엄령 문건'을 19일 제출받아 문재인 대통령의 지시로 이날 일부 자료를 공개한 것이다.(연합)

촛불 집회 시민을 ‘종북’ 세력으로 표현

또 “북(北)의 도발 위협이 점증하는 상황 속에서 시위 악화로 인한 국정 혼란이 가중될 경우 국가 안보에 위기가 초래될 수 있어 군 차원의 대비 긴요”라는 대목은 계엄령의 필요성을 정당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주목할 것은 당시 촛불 집회와 태극기 집회를 언급한 대목에서 ‘진보(종북)’라는 표현을 썼다는 점이다. 이는 촛불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을 단순하게 진보 세력으로 규정하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종북이라는 낙인을 찍은 것이다. 계엄령 선포를 통해 진보 진영, 나아가 선량한 일반 국민을 탄압하려는 불순한 의도가 드러난 대목이다.

이 문건은 계엄에 대한 국민의 부정적 인식을 감안해 초기에는 위수령을 발령해 대응하고 상황에 따라 점차 경비계엄, 비상계엄으로 비상조치 수준을 높이는 방법을 적시하고 있다. 또 계엄 임무를 수행할 부대의 지정과 배치, 계엄사령부의 편성과 업무까지 망라하고 있다. 이 문건은 향후 조치라는 항목에서는 ‘본 대비 계획을 국방부, 육본 등 관련 부대(기관)에 제공’하고 ‘철저한 보안 대책 강구 하에 임무 수행 준비에 만전을 기하겠음’이라고 적고 있다.

이 문건이 파문을 낳자 한민구 당시 국방부 장관 측은 일부 언론을 통해 “이철희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국방부에 위수령 폐지와 관련된 입장을 세 차례 질의한 바 있어 이에 대해 합동참모본부, 법무관리관실, 기무사 등에 법률 검토를 지시했고 그 과정에서 문건이 작성됐다”고 해명한 바 있다.

하지만 이철희 의원이 질의한 것은 단지 위수령 폐지에 관한 국방부의 공식 입장이었는데, 구체적인 병력 동원 계획과 계엄사령부 편성 계획까지 담은 계엄령 검토 문건을 작성한 것은 논리적으로나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해명이라는 지적이다.

이런 가운데 청와대는 7월20일 기무사 계엄령 문건에 딸린 계엄 대비 계획 세부자료를 공개했다. 총 21개 항목, 67페이지로 작성된 세부자료의 내용은 더욱 충격적이다. 이 자료에는 구체적인 계엄사령부 설치 위치, 언론 보도 통제 계획, 국정원 통제 계획, 국회의 계엄 해제 표결 차단 계획까지 담겨 있다.

특히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계엄 성공을 위해서는 보안 유지 하에 신속한 계엄 선포 등 선제적 조치 여부가 관건이라고 적시돼 있다”며 “비상계엄 선포문과 계엄 포고문도 이미 작성돼 있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 이 자료에는 통상적인 계엄 매뉴얼과 달리 합참의장을 배제하고 육군참모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추천하기 위한 검토 내용도 포함돼 있다. 이는 먼저 공개된 계엄령 검토 문건과 같은 맥락이다. 기무사가 통상적인 매뉴얼을 무시하고 육참총장을 계엄사령관으로 삼는 문건을 작성한 것은 특정한 의도가 엿보인다.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은 “기무사 계엄령 검토 문건은 지휘 계통을 무시한 비정상적 계엄령을 발동하는 계획을 담고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라며 “당시 합참의장은 비(非) 육사 출신의 이순진 대장이었는데, 계엄령 계획 수립과 병력 동원에 관련된 사람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육사 출신”이라고 밝혔다.

그는 또 “군이 지휘 계통을 무시하고 꼼수까지 부리며 합참을 배제하고자 한 것은 정상적 계엄령 선포가 아닌 ‘친위 쿠데타’이기 때문”이라며 “누가 지시했느냐가 핵심 쟁점인데, 박근혜 전 대통령의 권력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짐작된다”고 주장했다.

국군기무사령부가 작성한 계엄령 문건 의혹을 수사 중인 전익수 특별수사단 단장이 서울 용산구 국방부 검찰 별관을 나서고 있다.(연합)

계엄령 선포는 대통령의 고유 권한

현행 계엄법에 따르면 계엄령 선포는 대통령의 고유 권한이다. 다만 대통령이 계엄을 선포하거나 변경하고자 할 때에는 국무회의의 심의를 거쳐야 한다. 또 국방부 장관 또는 행정안전부 장관은 국가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국무총리를 거쳐 대통령에게 계엄의 선포를 건의할 수 있다고 돼 있다.

앞서 말한 대로 기무사가 계엄령 검토 문건을 작성한 시점은 2017년 3월이다. 박근혜 당시 대통령은 국회의 탄핵소추안 의결로 ‘직무정지’ 상태였고, 헌재의 탄핵 결정 선고를 기다리고 있었다. 대신 황교안 당시 총리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계엄령 선포 권한이 법적으로 황교안 당시 총리 겸 대통령 권한대행에게 있었다. 또 한민구 당시 국방부 장관이나 홍윤식 당시 행정자치부(현 행정안전부) 장관이 계엄령 선포를 건의할 수 있었다.

한 번 가정을 해보자. 검사 출신의 법률가인 황교안 당시 총리 겸 대통령 권한대행이 먼저 계엄령 검토를 지시할 수 있었을까. 대통령 권한대행이라는 애매한 신분으로 나라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계엄령을 선포하는 것은 크게 무리수가 따른다. 홍윤식 당시 행정자치부 장관 역시 정통 관료 출신으로서 국가의 행정과 사법 기능을 계엄사령부에 통째로 넘기는 계엄령을 건의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그렇다면 지난해 3월 당시 법적으로 계엄령 선포 또는 건의 권한을 가진 사람 중에서 실제로 그 권한을 행사할 가능성이 있는 인물은 한민구 전 국방부 장관이다. 실제 그는 계엄령 검토를 조현천 당시 기무사령관에게 지시했고, 검토 내용을 담은 문건에 대한 보고까지 받았다.

이쯤 되면 한 가지 의문점이 생길 수밖에 없다. 사실 그가 이철희 의원이 국방부의 위수령 폐지에 관한 입장을 질의했기 때문에 계엄령 검토 지시를 내렸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궁색한 해명이다. 그는 뭔가 숨기는 게 있지 않을까.

계엄령 문건 작성을 주도한 조현천 당시 기무사령관은 지인을 통해 한 매체에 자신이 계엄령 검토 문건 작성을 지시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 역시 석연치 않은 주장이다. 한민구 전 장관이 계엄령 검토를 지시했다고 해명한 바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현천 당시 기무사령관이 정말 계엄령 검토를 지시했다면 ‘월권’을 넘어 ‘군사반란 주동자’로 낙인 찍힐 수도 있다. 어쨌든 두 사람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한다는 것은 또 다른 의혹을 낳는다. 둘 중 한 명이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둘 다 진실을 숨기고 있지 않는가 하는 의문이 그것이다.

현재 계엄령 검토 지시의 ‘몸통’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나오고 있다. 그중 개연성이 상당히 높은 가설 중의 하나로 ‘박근혜 전 대통령 지시설’이 거론되고 있다. 지난해 3월 당시 그는 직무정지 상태였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계엄령과 관련된 아무 권한도 없었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자신의 측근이나 참모들에게 얼마든지 비공식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한 가지 주목해야 할 것은 지난해 3월 박근혜 당시 대통령은 자신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헌재에서 기각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는 점이다. 주변 참모들이 헌재의 기류를 그렇게 판단하고 보고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의 바람대로 탄핵이 기각됐다면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까.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탄핵정국 당시 국군기무사령부의 위수령과 계엄 검토 문건 작성 등에 대한 '독립수사단'을 구성하라고 지시했다. 사진은 이날 오후 과천 기무사령부 입구.(연합)

박근혜 당시 대통령의 뒤집기 승부수?

이와 관련해 한 경찰 고위간부가 전하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국정농단 사건 이후 시작된 촛불 집회의 규모가 갈수록 커지고 시위대가 청와대 100m 앞까지 와서 구호를 외치는 상황이 되자 청와대 경호실에서 경찰청에 강한 압박을 해왔다. 요지는 왜 시위대를 막지 않느냐는 것이었다. 하지만 법원이 청와대 인근에서 집회를 열 수 있다고 허가했는데, 경찰이 그것을 무시하고 집회를 차단할 수는 없었다. 지금 기무사 계엄령 문건 파문을 보면서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박근혜 당시 대통령이 탄핵 기각으로 직무에 복귀했다면, 경찰을 믿지 못하니까 군을 동원해 시위대를 진압하려 했던 게 아닐까.”

박근혜 전 대통령은 자신의 아버지가 집권하고 있던 시대에 계엄령을 종종 접했다. 자신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청와대 안에서 ‘공주’로 보호받고 있었으니, 정당성이 결여된 계엄령이 국민들을 탄압한다는 점을 깨달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게다가 우여곡절 끝에 대통령이 된 후에는 자기 주변 요직에 군 출신 인물들을 포진시키는 인사를 한 바 있다. 그런 점을 감안하면 박근혜 전 대통령을 중심으로 김관진 당시 국가안보실장, 박흥렬 당시 경호실장, 한민구 당시 국방부 장관, 여기에다 대통령을 독대할 수 있는 조현천 당시 기무사령관까지 ‘이심전심’으로 계엄령을 동일한 사고방식으로 인식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다.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7월 20일 청와대가 기무사 계엄령 검토 문건에 부속된 세부자료를 공개하자 국회에서 열린 최고위원회의에서 “조현천 전 기무사령관뿐만 아니라 한민구 전 국방장관, 김관진 전 청와대 국가안보실장, 황교안 전 국무총리는 물론 박근혜 전 대통령까지 성역 없이 조사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또 “휴전선을 지키는 전방 지역 부대를 서울을 포함해 후방으로 이동하는 계획은 ‘윗선’의 명령과 허가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라며 “명령에 살고 명령에 죽는 군의 특성상 100%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친위 쿠데타 문건이라는 심증이 굳어지고 있다”고 덧붙였다.

기무사 계엄령 검토 문건의 실체적 진실은 국방부 특별수사단의 수사로 밝혀질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메가톤급 파장도 예상된다. 청와대 관계자는 “청와대는 특별수사단의 수사 내용에 대해 중간보고를 받지 않을 것”이라며 “최종 수사 결과가 나오면 그 내용에 따라 사법 처리가 이뤄지게 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김윤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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