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 북미회담 용의, 미국 태도에 달려… “文 정부 ‘중재자’말고 ‘당사자’ 돼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12일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14기 제1차회의에서 시정연설을 하고 있다.(연합)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정상회담 후 북한이 처음으로 미국과 한국 정부에 대한 입장을 밝혔다. 대북제재를 고수하는 미국을 강하게 비판하면서도 정상회담을 할 용의를 밝히고 성사 여부는 미국의 태도에 달렸다고 했다. 우리 정부에 대해선 외세 의존적인 ‘중재자’ 행세하지 말고 자주적인 ‘당사자’가 되라고 쓴소리를 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12일 열린 최고인민회의 시정연설에서 미국과의 수뇌회담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올해 말까지 인내심을 갖고 미국의 용단을 기다리겠다며 ‘공’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넘겼다. 문재인 정부에 대해서도 북ㆍ미 간 중재자 역할을 그만두고 남북 민족을 위한 당사자가 돼야 화해협력을 할 수 있다고 밝혔다. 북한이 이제 막 정상회담을 끝낸 미국과 한국에 ‘숙제’를 건낸 모양새로, 이를 어떻게 푸느냐에 따라 북미, 남북 관계가 달라질 전망이다.

김정은의 대미 전략… 트럼프 ‘결단’ 주목

한미정상회담이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고 한ㆍ미 모두 대북관계가 불투명한 가운데 북한이 처음으로 미국에 대한 입장을 소상히 밝히고, 한국에 대해서도 불만을 나타냈다.

김정은 위원장은 12일 최고인민회의에서 육성으로 시정연설을 하고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에 대한 입장과 향후 정상회담 등 북미 협상 전반에 대한 정책 방향을 공개했다.

김 위원장은 2차 북미정상회담에 대해 “미국은 전혀 실현 불가능한 방법에 대해서만 머리를 굴리고 회담장에 찾아왔다”며 회담 결렬의 책임을 미국에 돌렸다. 또 미국이 제시한 ‘일괄타결식 빅딜’에 대해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북미대화에 대해 회의적인 입장을 나타냈다. 미국은 북미회담에서 북한의 핵무기 폐기 및 미국으로의 인도, 생화학무기 등 대량살상무기의 전면 폐기라는 ‘빅딜’을 요구한 바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대통령이 11일 오후(현지시간) 워싱턴 백악관오벌오피스에서 친교를 겸한 단독회담에서 악수하고 있다.(연합)
김 위원장은 “일방적으로 자기의 요구만을 들이 먹이려고 하는 미국식 대화법에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고 흥미도 없다”며 “미국이 지금의 계산법을 접고 새로운 계산법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서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하노이 조미 수뇌회담과 같은 수뇌회담이 재현되는데 대해서는 반갑지도 않고 할 의욕도 없다”고 거듭 밝혔다.

북한은 미국의 태도 변화가 있어야만 대화에 나설 것이고, 트럼프 정부가 핵 문제 해결에 대한 방법론을 바꿔야 회담에 응할 것임을 분명히 했다. 북한에게 ‘비핵화’란 미국이 주장하는 ‘핵폐기’가 아닌 ‘핵군축’을 의미한다. 즉, 현재진행중이거나 미래핵은 포기할 수 있어도 기존의 보유핵은 절대 양보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따라서 핵군축 차원에서 ‘단계적 비핵화’와 이에 상응하는 ‘대북제재 해제’가 이뤄질 때 미국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게 북한의 입장이다.

북한이 미국과 대화의 문은 열어두면서도 시한을 올해 연말로 못 박은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김정은 위원장은 “미국이 올바른 자세를 가지고 우리와 공유할 수 있는 방법론을 찾은 조건에서 제3차 조미수뇌회담을 하자고 한다면 우리로서도 한 번은 더 해볼 용의가 있다”며 “올해 말까지는 인내심을 갖고 미국의 용단을 기다려볼 것”이라고 밝혔다.

김 위원장이 미국의 태도 변화가 있기 전엔 먼저 북미대화에 나서지 않고, 올해 말까지 기다리겠다고 한 것은 미국의 무력도발을 피하면서 미국의 대통령 선거를 활용해 트럼프 대통령을 압박한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현재 일본에는 언제든 평양을 폭격하거나 김 위원장에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전략무기가 집중 배치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위원장이 올해 말까지 미국의 태도 변화를 지켜보겠다고 한 것은 혹시 있을지도 모를 무력도발을 유예시키는 측면이 있다.

또한 트럼프 대통령이 처한 정치상황을 간파한 점도 보이는데 올해 하반기로 가면서 미국은 대통령 선거를 위한 분위기로 접어든다. 내년 11월 3일 대선이 있지만 3월부터 예비선거가 시작된다. 트럼프 대통령으로서는 올해 안에 북핵 문제를 풀어야 하는 상황이다. ‘김정은 권력’에 비해 선거를 치러야 하는 트럼프 대통령은 ‘시간’ 싸움에서 불리하다. 북한의 비핵화를 차기 대선의 최대 카드로 활용하려는 트럼프 대통령은 먼저 북한에 대화의 손을 내밀어야 하는 처지다.

한편, 김 위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나와 트럼프 대통령 사이의 개인적 관계는 두 나라 사이의 관계처럼 적대적이지 않으며 우리는 여전히 훌륭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생각나면 아무 때든 서로 안부를 묻는 편지도 주고받을 수 있다”고 밝혀 트럼프 대통령과 주변 참모들을 분리해 평가하는 모습도 보였다. 하노이 정상회담에서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이 강경한 요구를 하면서 회담이 결렬된 것을 고려한 것으로 분석된다. 이는 김 위원장과 좋은 관계를 강조하고 있는 트럼프 대통령을 통해 대화의 동력을 이끌어내겠다는 속내로 읽힌다.

현재 트럼프 대통령은 대화보다는 주변 참모들의 주장인 대북 제재에 우선 방점을 두고 있어 당분간 북미대화는 어려워 보인다. 나아가 무력도발을 감행할지, 북미대화의 모멘텀을 만들지는 트럼프 대통령의 결단에 달렸다. 일각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이번 한미정상회담에서 문재인 대통령에게 북미대화를 타진하는 ‘미션(mission)’을 전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오지랖 넓은 ‘중재자’ 행세 말라” 경고… 文 정부 딜레마

김정은 위원장은 시정연설에서 문재인 정부에 불만을 쏟아냈다. 한마디로 남북 민족끼리 자주적인 외교를 해야 하는데 남측이 미국의 눈치를 보고, 미국과 동조하는 행보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문 대통령의 북ㆍ미간 ‘중재자’ 역할에 대해 “오지랖 넓다”고 직격탄을 날리기도 했다.

김 위원장은 “남조선 당국과 손잡고 북남 관계를 지속적이며 공고한 화해협력 관계로 전환시키고 온 겨레가 한결같이 소원하는대로 평화롭고 공동번영하는 새로운 민족사를 써나가려는 것은 나의 확고부동한 결심”이라면서 “외세의존 정책에 종지부를 찍고 모든 것을 북남관계개선에 복종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일원으로서 제정신을 가지고 제가 할 소리는 당당히 하면서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김 위원장은 “남조선당국이 진실로 북남관계개선과 평화와 통일의 길로 나아갈 의향이라면 우리의 입장과 의지에 공감하고 보조를 맞추어야 하며 말로써가 아니라 실천적 행동으로 그 진심을 보여주는 용단을 내려야 한다”고 요구했다.

김 위원장이 이처럼 노골적 표현을 사용해 문 대통령에게 강한 불만을 나타낸 것은 처음 있는 일로,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하려는 우리측 시도에 경고장을 날린 양상이다.

김 위원장은 지난 10일 열린 당 중앙위원회 제7기 제4차 전원회의에서 “제재로 우리를 굴복시킬 수 있다고 혈안이 되어 오판하는 적대세력들에게 심각한 타격을 주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일각에서는 김 위원장이 말한 ‘적대세력들’에 미국의 대북 제재에 동조하는 한국도 포함된다고 보고, 무력 시위를 벌일 가능성도 제기한다.

한미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이 제시한 대북 정책 방향은 대부분 트럼프 대통령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오히려 미국의 대북‘빅딜’과 ‘제재’에 동참하라는 식의 우회적 압박을 받았다. 경색된 남북관계를 개선하고 북ㆍ미 간 대화의 계기를 마련하려는 문 대통령은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북한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올해 말까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리겠다고 한 것은 문 대통령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한국의 정치는 올해 하반기로 가면서 총선 국면으로 접어들고, 내년은 연초부터 4월 총선 정국이 지배하는 상황이 된다. 그만큼 문 대통령의 영향력과 관심이 북한에 집중할 수 없다. 남북관계와 한미동맹이라는 양립이 어려운 딜레마에 처한 문 대통령이 어떠한 결단으로 해법을 찾을지 주목된다.

박종진 논설실장



박종진 논설실장 jjpark@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