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경제전쟁'…전략물자 놓고 치고 받아

일본의 대(對) 한국 수출규제 조치 강화를 둘러싼 양국 간 충돌이 국제사회를 무대로 한 외교전으로 번지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상품·무역이사회에 일본의 경제보복 조치가 긴급 의제로 상정돼 채택됐다. 이와 함께 정부는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를 풀기 위해 대미 외교전도 시작됐다. 하지만 미국은 한일 갈등에 개입하는 데 난색을 표하고 있어, 미국의 역할을 기대하긴 힘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이와 함께 정부는 최근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한 강제징용 배상안에 대해 한국 정부의 책임(α)을 높인 새로운 협상안이 제시됐다는 주장이 불거졌지만 청와대와 외교부는 ‘사실무근’이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외교 전문가들은 일본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라면 우군을 확보하는 외교전과 별개로 협상안을 통해 출구를 마련해야 한다는 의견이다.

“전략물자 北에 밀반출한건 오히려 일본” 일본은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 조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무기로 전용 가능한 물자가 북한으로 밀수출됐을 가능성이 있다’ 며 북한 관련설을 주장한다. 한·일 갈등에 북한을 개입시켜 여론을 흔들겠다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정작 북한에 전략물자를 밀반출한 것은 일본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은 11일 일본 민간 연구기관 자료를 인용하면서 “일본에서는 1996~2013년 30건 넘는 대북 밀수출 사건이 발생했고, 이 중에는 핵개발·생화학무기에 활용될 수 있는 전략물자가 포함돼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가 근거로 제시한 자료는 일본 안전보장무역정보센터(CISTEC)로부터 입수한 ‘부정 수출 사건 개요’라는 제목의 문건이다. 이 기관은 안보전략물자 수출 통제 관련 이슈를 연구·분석하기 위해 1989년 설립된 민간 비영리 종합 추진 기관이다.

정부도 전략물자 관리 체계를 겨냥한 일본의 공격에 맞대응으로 나섰다. 청와대 국가안전보장회의(NSC)는 12일 한국을 겨냥한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와 관련해 “상호 불필요한 논쟁을 중단하고 일본 정부의 주장이 사실인지 여부를 명백히 밝히기 위해 적절한 국제기구에 공정한 조사를 의뢰할 것을 제의한다”고 밝혔다. 정부가 이 사태를 돌파하기 위해 ‘제3자를 통한 진실검증’이라는 승부수를 꺼내든 것이다. NSC가 회의 결과를 직접 브리핑을 자처해 특정 국가를 향한 입장을 내는 것은 매우 이례적인 일로, 그만큼 청와대를 비롯한 안보 관련 부처들의 강한 의지를 부각하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김유근 국가안보실 1차장은“UN회원국으로서 UN안보리 대북제재 결의를 철저히 준수해 왔으며 제재결의를 모범적으로 또 매우 투명하게 이행하고 있다. 그간 한미일은 긴밀한 공조 하에 해상 불법 환적 활동도 철저하게 단속해 왔다”고 말했다. 이어 “4대 국제 수출통제 하에서 대부분의 가입국들은 우리와 유사하게 자국의 전략물자 밀반출 적발 사례를 대외에 공개하고 있다. 일본도 그러한 조치를 통해 수출통제 제도를 투명하게 운영하고 있는지 자문해 보기 바란다”고 덧붙였다. 청와대는 제3자를 통한 공정한 조사가 이뤄진다면 일본의 잘못이 드러날 가능성이 크며, 이 경우 일본이 수세에 몰리며 규제 조치 철회 등을 선택할 수밖에 없으리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日, 1112개 품목 전략물자 분류…디스플레이·미래차도 타격 일본 경제산업성은 지난 1일 ‘외국환 및 외국무역관리법’(외국환관리법)에 따른 ‘수출무역관리령’을 다음 달 개정할 것이라고 예고한 바 있다. 법이 개정되면 우리나라는 군사 전용 가능성이 있는 품목의 수출 허가 신청을 면제하는 화이트리스트(포괄적 수출 허가 대상)에서 제외된다. 수출무역관리령 통제 목록에는 반도체에 이어 한국이 세계 1위를 차지하고 있는 디스플레이를 비롯해 국내 전체 산업영역이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 일본이 다음 달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하면 일본 기업은 전략물자를 한국에 수출할 때마다 일일이 당국의 허가를 받아야한다. 한국의 거의 전 소재·부품·장비가 수출 지연은 물론 수출 제한 조치까지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전략물자관리원이 게시한 일본 경제산업성의 ‘일본 수출 통제 목록’에 따르면 원자력과 화학무기 관련뿐 아니라 첨단소재, 소재 가공, 전자, 컴퓨터, 통신, 센서, 반도체 장비 등 거의 전 산업 영역 부품이 포함돼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정부는 민간용 전략물자가 261개, 비민간용 전략물자가 851개 등 총 1112개가 일본의 전략물자로 분류돼 있는 것으로 파악한 상태다. 특히 반도체, 디스플레이, 스마트폰 등 첨단 전자제품 소재 및 핵심 부품, 장비는 대체재를 찾기 힘든 상태다.

일본이 지난 4일 수출 규제를 실시한 것은 반도체 소재 관련 부품인 고순도 불화수소(에칭가스), 플루오린 폴리이미드, 포토리지스트 등이다. 디스플레이 업계는 디스플레이 제조에 비교적 고순도 불화수소 사용량이 적기에 중국, 대만 등에서 대체재를 마련할 수 있다는 반응이었다. 하지만 다음 달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되면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다. 디스플레이 분야의 차세대 먹을거리로 꼽히는 유기발광다이오드(OLED)는 한국이 가장 먼저 상용화했고, 세계 시장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핵심 소재와 장비는 일본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화소를 형성하는 소재인 섀도마스크는 일본 다이니폰프린팅(DNP), 도판프린팅 두 회사에서 전량 수입한다. 섀도마스크의 기반 소재인 초인바(super invar)시트는 히타치메탈이 독점 공급하고 있다. 이런 소재 공급이 끊기면 OLED 생산라인이 멈추고 삼성전자, LG전자의 스마트폰, TV 제조까지 중단된다.

공작기계 분야도 문제다. 대기업의 일본산 수입 의존도는 5% 미만이지만 중소·중견 제조업체들은 일본산 소형 생산로봇 등을 현장에서 폭넓게 활용하고 있어 피해를 볼 가능성이 크다. 중소기업중앙회가 9일 발표한 ‘일본 정부의 반도체 소재 등 수출 제한에 대한 중소기업(반도체·영상기기·화학·무선통신장비 제조업체 269개) 의견 조사’에 따르면 중소기업 10곳 중 6곳이 일본 정부의 수출 규제가 지속될 경우 6개월 이상 감내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보고 있었다. 소재 거래처 다변화에 1년 이상 소요된다는 곳이 42%에 달해 일본을 대체할 판로를 개척하는 데에도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제3국 중재위’ 시한 앞두고 韓·日 물밑 외교전 필요

한국과 일본은 9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상품무역이사회에서 일본의 수출규제 문제를 놓고 격돌했다. 백지아 주(駐)제네바대표부 대사는 이번 조치가 정치적 목적으로 이뤄진 경제 보복이라는 점을 회원국에 설명하고 특히 이번 조치가 한국 기업뿐 아니라 글로벌 공급망 차원에서도 부정적 영향을 줄 수 있고, 자유무역 가치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조치라는 점도 강조했다. NHK에 따르면 일본 측은 이하라 준이치(伊原 純一) 주제네바 일본대표부 대사는 “일본 정부의 조치는 수출규제가 아니며, 안보와 관련된 일본 수출 시스템을 점검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로 WTO 규범상 전혀 문제가 없다”는 일본 정부의 기본 주장을 반복했다. 정부는 일본의 수출규제 조치를 WTO에 제소하기 위한 절차를 밟아나가고 있다.

이와 함께 정부는 미국을 다각적으로 접촉하며 일본 경제보복 조치의 부당성을 알리고 중재를 요청하는 ‘설득 외교’에 나섰다. 그동안 관망만 해온 미국을 설득해 적극 중재에 나서도록 유도하기 위한 의도로 보인다.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은 10일(현지시간) 방미해 워싱턴에서 믹 멀베이니 백악관 비서실장과 만찬회동을 가졌다. 그는 11일 찰스 쿠퍼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부보좌관을 만나고 한·미 고위급 경제대화 실무협의를 가졌다. 차관급 인사인 윤강현 외교부 경제외교조정관도 11일 미국으로 출국했다. 앞서 강경화 외교부 장관은 10일 오후 11시45분부터 약 15분간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통화를 갖고 일본 수출 규제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유명희 산업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은 이르면 다음 주 방미해 로버트 라이트하이저 미 무역대표부(USTR) 대표 등과 만날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노력 속에 우리 정부가 강제징용 피해자 배상 해법으로 ‘1+1+α’(한·일 기업+한국 정부)를 최근 우리 정부가 새로운 협상안으로 제안했다는 주장도 불거졌다. 한·일 양국 기업(1+1)의 기금을 통해 배상하고 추후 제기될 소송에 대해서는 한국 정부(+α)가 책임을 지는 안이다. 청와대와 외교부는 해당 주장에 대해 ‘사실무근’이라고 일축했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일본의 변화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고려할 수 있는 방안이라고 분석했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장은 “일본의 요구에 대한 전향적인 검토와 우리 측의 양보 없이는 이번 문제는 풀기 어렵다”며 “정부가 기존 입장만 계속 되풀이하거나 우리 기업만 만나서는 해결책이 없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오는 18일까지 우리 정부가 강제징용 배상 관련 3국 중재위 구성에 응하지 않으면 추가 보복에 나서겠다고 예고한 상태다. 허 원장은 “사법부의 판결을 일본 기업들에 집행하는 시점을 좀 늦춘다거나 박근혜 정부 때 맺은 위안부 합의를 정부가 다시 한 번 검토하는 등의 유연성을 발휘할 여지가 있다고 본다”며 “국민 정서에 반하는 행동을 우리 정부가 할 수 있을지가 딜레마이지만 국내정치적 저항도 없고 경제에 해악도 없는 ‘왕도’는 없다”고 조언했다. 최희식 국민대 일본학과 교수도 통화에서 “일본이 막고 싶어 하는 것은 미쓰비씨중공업, 일본제철 등의 압류 자산을 현금화하는 것”이라며 “한국 정부가 강제 징용 피해자분과 협의체를 만들고,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피해자분들께 한국 정부의 어려운 상황을 얘기하고, 1년 정도라도 현금화를 유보해줄 것을 설득해야한다”고 말했다.

또 외교 전문가들은 한·일 갈등이 깊어질 경우 미국이 입장을 밝히긴 할 것이지만 적극적 개입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김현욱 국립외교원 교수는 통화에서 “버락 오바마 행정부는 동북아 지역의 외교정책 축인 한미일 3각 협력을 중시했지만, 트럼트 행정부는 동아시아 전략을 인도태평양 전략으로 바꿨고 핵심 축은 일본, 호주, 인도 3국이 됐다. 한반도의 중요성이 이전 같지 않은 상황에서 미국이 한일 관계개선에 개입해야할 가능성이 낮다”고 말했다. 허윤 서강대 국제대학원장은 “트럼프 대통령은 양자협상으로 관계를 재정립해가기 때문에 일본에게 조언할 정당성은 없고, 미국이 한일 간 갈등 진화에 중재자로 나선다 하더라도 시늉에 불과할 것”이라며 “미국은 한국이 미국의 동맹이자 일본의 우방국임을 입증하는 기회로 삼는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미국 역할이 필요하고 미국의 외교적 입장을 충분히 이용해 극한 대립 상황을 감경시켜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조양현 국립외교원 아시아태평양연구부 교수는 “2015년 박근혜 전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첫 정상회담 성사 전, 일본 위안부 문제를 놓고 한일 갈등이 악화됐을 때 이견을 중재하고 개최를 도왔던 미국이다. 미국을 레버리지로 삼으면 한국에 힘이 될 것”이라며 “한일 경제전쟁의 수혜자가 중국이 될 가능성이 높다. 중국은 중국제조 2025에서 반도체 자립 계획을 설정했고 자체 생산 비중을 높일 계획도 마련했다. 미국은 중국을 견제해야 하기에 레버리지로 삼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했다.

결국 한·일간 소통 채널 확보를 통해 양국 간 외교적 해결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곽노성 동국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결국 외교적 해결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외교에서 시작된 문제인 만큼 외교적 해법을 찾아야 한다. 제재가 시작되는 8월 1일 전 정부뿐 아닌 의회 차원에서도 외교 채널을 최대로 가동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이종혜 기자



이종혜 기자 hey33@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