韓, WTO서 부당성 호소… 日, 외교관 대상 설명회 열어 / 일본, WTO제소 대비해 국제 여론전 본격화 / 文 “일본 극복할 수 있어” / 美 전자업계도 우려 목소리 / 볼턴은 한일 갈등에 원론적 입장만

정부는 지난 23~24일에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일반 이사회에 참석해 일본의 무역 보복 조치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수출 통제조치를 철회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지난 24일 김승호 산업통상자원부 신통상질서전략실장은 일본 측 대표단에 별도의 일대일 대화를 제안하며 일본의 무역 보복 조치는 WTO 기반의 다자무역질서에 심대한 타격을 주는 행위라고 지적했다. 일본이 자유무역체제에서 가장 큰 수혜를 받고 있는 가운데 G20 의장국으로 자유무역을 강조한 점도 부각했다.

이에 일본은 강제징용 사안과는 무관하며 안보 차원의 수출 관리 조치이므로 WTO에서 논의할 사안이 아니라는 기존의 입장을 고수했다. 우리 정부는 국제 사회에 일본의 무역 보복 조치의 문제점을 지속적으로 제기하고 WTO 제소 등 필요한 대응조치를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이사회 의장은 양국간 우호적인 해결책을 찾기를 바란다는 원론적인 입장을 내놨다.

전경련 “정부가 대응할 시간 충분했다”

지난 23일 전경련은 서울 여의도 전경련 컨퍼런스센터에서 ‘한일관계를 통해 본 우리경제 현황과 해법 특별대답’을 열고 정부의 대응 방안을 비판했다. 권태신 전경련 상근부회장은 “(올해 초부터) 자민당이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검토한다는 언급이 나올 만큼 오래 전부터 심각한 상황을 알리는 신호가 여러 번 있었으나 (정부) 조처가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일본의 조치가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었고 대응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다는 뜻이다.

대담자로 참여한 윤덕민 전 국립외교원장은 양국이 모두 수용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최우선이라며 “압류된 일본기업 재산을 현금화하는 것은 일본의 경제보복이 격화되고 한일 경제관계가 최악의 상황으로 전개될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대법원 판결에 따라 피해자의 개인청구권은 유효하다는 점을 고려하되 국가간 조약은 현실적으로 일본을 강제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더욱 적극적인 정부의 태도를 강조했다. 윤 전 원장은 “특별법을 통해 정부와 기업이 참여하는 재단을 조성해 강제징용 피해자를 보상하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며 “그러면 일본기업도 도의적 책임을 느껴 동참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文, 청수보회의 “日 극복할 수 있다”

지난 22일 문재인 대통령은 청와대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산업의 경쟁력 우위 확보가 필수적이라며 “우리는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날 문 대통령은 “지금까지 우리는 가전, 전자, 반도체, 조선 등 많은 산업 분야에서 일본의 절대우위를 하나씩 극복하며 추월해 왔다”며 “자유무역질서를 훼손하는 기술패권이 국가경제를 위협하는 상황에 있어서도 신기술의 혁신창업이 중요한 해법이 될 수 있다. 특히 부품소재 분야의 혁신 산업과 기존 부품소재 기업의 과감한 혁신을 더욱 촉진하고자 한다”고 강조했다.

문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은 일본의 무역 보복조치를 계기로 부품소재 산업을 강화하고 국산화에 매진하는 등 대일본 극복 의지를 공개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평가 받는다. 또한 지금의 어려움을 오히려 기회로 삼겠다며 “부품소재 산업의 경쟁력 강화와 제조업 혁신을 위해 국가적 차원의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대기업들에겐 중소기업과의 상생 협력을 당부하며 범국가적인 위기 탈출 의지를 다졌다. 이날 국민 감정에 호소하는 발언이 많이 나온 이유는 존 볼턴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의 방한, WTO 일반이사회 등 굵직한 이벤트가 연속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국가적 대응이 줄기차게 요구되고 있는 까닭이다.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WTO) 일반이사회 회의장에 한국 팻말과 일본 팻말이 나란히 배치돼 있다. 이번 이사회에서는 일본의 수출 규제 조치가 논의됐다. 연합

日, 韓만 빼고 외교관 불러 ‘설명회’ / 아베는 “한국은 약속지켜라”

한편 일본은 WTO 일반이사회가 열리기 하루전인 지난 22일 각국 외교관들을 불러 수출 규제에 관한 설명회를 열고 본격적인 국제 심리전에 들어갔다. 특히 이 자리엔 당사자인 주일 한국대사는 초대받지 못했다. 일본 외무성과 경제산업성은 도쿄 주재 각국 대사관 측을 불러 모아 한국에 대한 수출 규제 배경을 설명했다. 일본 정부는 한 시간에 걸쳐 이번 조치가 양국 간 정치갈등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강조했고 수출관리에 관한 문제라는 식으로 설명한 것으로 전해졌다. 보복 차원이 아닌 안보를 목적으로 한 수출 관리라는 일본의 기존 입장이 되풀이 된 셈이다. 이는 한국의 WTO제소를 염두에 둔 외교 전략으로 풀이된다.

이날 오후 아베 총리는 자민당 본부에서 진행된 기자회견에서 수출 규제가 강제징용과 관련이 없다며 한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는 점을 부각했다. 아베 총리는 “(한국이) 한일 청구권 협정을 위반하는 것으로 국제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라며 “위안부 합의를 시작으로 약속을 일방적으로 깨뜨린다. 약속을 지켜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수출 규제와 징용 문제를 엮지 않으려는 일본의 일관된 태도는 자유무역 질서에 정치적 요소를 배제하기 위한 전략적 포석으로 읽힌다.

美 전자업계, 日 일방적 수출규제에 ‘우려’

미국의 전자업계 단체들도 일본의 수출규제와 관련해 조속한 해결을 촉구하는 공개 서한을 양국 정부에 보낸 것으로 드러났다. 그간 한일 무역 갈등에 중립적인 태도를 보여왔던 미국 정부가 자국 민간단체의 우려에 어떤 자세를 취할지도 관심사다. 지난 23일(미국 현지시간) 미국 반도체산업협회,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 등 미국의 6개 민간 단체는 유명희 통상교섭본부장과 세코 히로시게 경제산업상에게 공개서한을 보냈다.

이들은 일본의 수출 규제가 잠재적인 공급망 붕괴, 출하 지연 등 업계 전반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공개서한에서 그들은 “한국과 일본은 이런 글로벌 밸류체인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며 “글로벌 ICT 산업과 제조업에 대한 장기적인 아영향을 피할 수 있도록 두 나라가 이번 사안에 대한 신속한 해결을 모색하고, 상황을 더 악화시키는 행동을 하지 말 것을 촉구한다”고 말했다.

볼튼 방한 논의는 했지만...

지난 24일 존 볼튼 미국 안보보좌관이 방한해 정의용 국가안보실장과 중·러 군용기 무단 침입, 한일관계, 북핵, 방위비 분담 문제, 호르무즈 해협 등을 논의했다. 이날 볼튼 보좌관이 한일 무역 갈등과 관련해 어떤 메시지를 내놓을지 관심이 집중됐지만 논의의 초점은 안보에 맞춰져 한일 갈등에 관한 구체적인 메시지는 나오지 않았다. 이날 양국은 한반도의 비핵화와 역내 안정과 평화를 위한 목표 달성에 한미·한일 간 공조와 협력이 중요하다는 데 뜻을 모았다. 또한 한일 간 추가적인 상황 악화를 방지하기 위해 대화를 이어가는 등 외교적 해법을 모색하는 것이 모두의 이익에 부합하다는 뜻에 공감하고 양국 간 긴밀한 소통을 이어나가겠다고 밝혔다.

천현빈 기자



천현빈 기자 dynamic@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