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 “대화에 나온다면 일본과 손잡을 것” / 아베는 가해국 책임에 대해 언급 안 해

한일 경제전쟁으로 양국 간 대립이 극심한 상황에서 광복 74주년에 내놓은 문재인 대통령의 8·15 경축사에 그 어느 때보다 큰 관심이 모였다. 정치권 안팎에선 ‘역대 가장 중요한 광복절 경축사’가 될 것이라는 예상도 나왔다. 우리에게는 8월 15일이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광복의 날이지만 일본에겐 패전의 날인 만큼 이날 대일 메시지에 따라 향후 한일 경제전쟁의 판도가 바뀔 수 있다는 소리도 나왔다. 강경한 메시지가 나올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일본을 향한 직접적인 비판 메시지는 없었다. 문 대통령은 8·15 경축사에서 일본에 대한 직설적인 비판 수위를 조절하고 대화의 가능성에 무게를 실었다. 일본도 8·15 관련 메시지를 내놨다. 나루히토 일왕은 과거사에 대해 “깊은 반성 위에 서서”라는 발언을 포함한 반면 아베 총리는 가해국의 반성이나 책임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文 “일본과 기꺼이 손잡을 것”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경축사에서 일본의 과거성찰을 촉구했다. 문 대통령은 “일본이 이웃나라에게 불행을 주었던 과거를 성찰하는 가운데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함께 이끌어가길 우리는 바란다”고 말했다. 강제징용이나 위안부 등의 역사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 대일메시지에서 일본을 지나치게 자극하지 않으면서 대화의 창구를 열어놓기 위한 포석으로 읽힌다. 문 대통령은 “우리는 과거에 머물지 않고 일본과 안보·경제협력을 지속해왔다”며 “일본과 함께 일제강점기 피해자들의 고통을 실질적으로 치유하고자 했고 역사를 거울 삼아 굳건히 손잡자는 입장을 견지해왔다”고 덧붙였다. 과거를 성찰하는 것은 과거를 딛고 미래로 가는 길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문 대통령은 일본과의 관계개선을 의식한 듯 일본과의 협력관계를 강조하며 대화 의지도 드러냈다. 문 대통령은 “지금이라도 일본이 대화와 협력의 길로 나온다면 우리는 기꺼이 손을 잡을 것”이라고 말했다. 공정하게 교역하고 협력하는 동아시아를 만들어나가자는 메시지도 전했다. 반일 감정이 극에 달한 현 상황에 대해서는 “우리 국민이 일본의 경제보복에 성숙하게 대응하는 것 역시 우리 경제를 지켜내고자 의지를 모으면서도 두 나라 국민들 사이의 우호가 훼손되지 않기를 바라는 수준 높은 국민의식이 있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일본의 수출규제의 부당성을 호소하는 메시지도 있었다. 문 대통령은 “먼저 성장한 나라가 뒤따라 성장하는 나라의 사다리를 걷어차서는 안 된다”며 “국제 분업체계 속에서 어느 나라든 자국이 우위에 있는 부문을 무기화한다면 평화로운 자유무역 질서가 깨질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일본의 무역보복 조치는 자유무역질서와 국제 분업체계를 뒤흔드는 행위로 수출규제가 철회돼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어 자유 무역 질서를 기반으로 어떤 나라든 성공을 꿈꿀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15일 오전 천안 독립기념관 겨레의 집에서 열린 제74주년 광복절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는 모습. 연합

일왕 “깊은 반성”, 아베는 책임·반성 언급 없어

일본은 지난 15일 도쿄도 치요다구에 위치한 닛폰부도칸에서 태평양전쟁 74주년 기념행사인 ‘전국전몰자추도식’을 개최했다. 이날 전몰자추도행사에 참석한 나루히토 일왕은 기념사에서 과거사에 대해 ‘깊은 반성’을 한다고 말했다. 나루히토 일왕이 ‘깊은 반성’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부친인 아키히토 전 일왕의 발언을 이은 것이다. 즉위 후 첫 종전기념 추도발언에서 나루히토 일왕은 “깊은 반성 위에 서서”라는 표현을 담았다. 그는 “전쟁 후 오랫동안 평화로운 세월을 회상하고 과거사를 돌아보며 ‘깊은 반성 위에 서서’ 다시 전쟁의 참화가 일어나지 않길 간곡히 기원한다”고 말했다.

일본 언론도 아키히토 전 일왕의 ‘깊은 반성과 함께’라는 표현과 유사한 점에 주목하며 ‘반성’이라는 키워드로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책임을 표명했다고 평가했다. NHK방송은 “표현이 바뀌었지만 깊은 반성이라는 표현은 거의 답습해 평화의 뜻을 계승했다”고 보도했다. 과거사에 대한 반성과 책임으로 역사적 인식을 공유하고 다음 시대를 열어가겠다는 뜻이 전 일왕과 일치한 것이다. 아키히토 전 일왕은 2015년 추도식부터 ‘깊은 반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왔다.

일왕이 ‘깊은 반성’의 메시지를 낸 것과 달리 아베 신조 총리는 전쟁 가해국으로서의 반성이나 책임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아베 총리는 “2차 대전에서 200만여명의 동포가 목숨을 잃었다”며 태평양전쟁 관련 전몰자들에 대한 추모만 열거했다. 전쟁 침략국이 아닌 피해국으로서의 이미지만 강조한 것이라는 비판이 나오는 까닭이다. 아베 총리는 “지금 우리가 누리는 평화와 번영은 전몰자 여러분의 고귀한 희생 위에 세워진 것”이며 “다시 한 번 충심으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바친다”라고 덧붙였다. 아베 총리는 총선에서 승리해 재집권한 2013년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전범국가로서의 책임과 반성을 거론한 적이 없다.

北 “南과 다시는 마주앉지 않겠다” 맹비난

문 대통령이 8·15 메시지를 통해 북한과의 ‘평화경제’를 강조한 다음날 북한은 또다시 발사체 도발을 감행했다. 지난 16일 북한은 강원도 통천 일대에서 동해상으로 탄도미사일로 추정되는 발사체를 2회 발사했다. 벌써 8차례에 걸친 무력 시위다. 북한은 문 대통령이 내놓은 광복절 축사에 대해 노골적인 불만과 비난을 쏟아냈다.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는 대변인 담화에서 문 대통령을 향해 “정말 보기 드물게 뻔뻔스러운 사람”이라고 막말을 거침없이 퍼부었다. 이어 “두고 보면 알겠지만 남조선 당국자들과 더 이상 할 말도 없으며 다시 마주앉을 생각도 없다”고 강조했다. 한미 연합훈련에 반발하며 연일 강도 높은 비난 메시지가 이어지며 악화된 남북관계가 장기화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문 대통령은 경축사에서 평화경제를 강조하며 “평화경제에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쏟아부어 새로운 한반도의 문을 활짝 열겠다”며 “임기 내에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확고히 하겠다고 다짐한다”고 말한 바 있다. 이에 북한은 조평통을 통해 “섬나라 족속들에게 당하는 수모를 씻기 위한 똑똑한 대책이나 타들어가는 경제상황을 타개할 뾰족한 방안도 없이 말재간만 부렸으니 ‘허무한 경축사’, ‘정신구호의 나열’이라는 평가를 받을 만도 하다”고 조롱했다. 북한이 한반도 긴장 수위를 높이는 상황에서 향후 비핵화 협상에서도 한국이 아예 소외될 가능성도 제기되고 있다.

천현빈 기자



천현빈 기자 dynamic@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