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는 어디에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는 ‘귀족’을 뜻하는 노블레스와 ‘책임이 있다’를 가리키는 오블리주가 합쳐진 프랑스어다. 한마디로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를 다한다는 뜻으로 사회적 존경의 대상을 가리킨다. 최근 고려대, 서울대, 부산대 학생들이 촛불을 든 것은 한국 사회에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인물의 부재를 아쉬워하는 외침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 사회적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경우를 보자. 그와 가족들에 대한 수많은 의혹이 불거지기 전까지 조 후보자는 한국사회에서 나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로 꼽혀왔다. 그의 민낯이 언론을 통해 드러나자 학생들은 하나둘씩 촛불을 들기 시작했다. 왜 한국사회에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상징하는 인물이 없는 것일까?

외고, 수시, 의전원, 로스쿨…기득권을 위한 제도?

조 후보자는 2012년 3월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개천에서 (용이 아닌) 가재나 붕어로 살아도 행복한 세상을 만들자’고 했지만 정작 자신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자녀의 스펙 높이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조국 후보자 딸, 조모씨는 고등학생 때 논문 제 1저자로 등재되는가 하면 외고, 고려대, 의학전문대학원 모두 필기시험 없이 합격했다.

각급 학교의 입학에서 제도의 혜택을 빠짐없이 누린 셈이다. 이에 대해 고려대 총학생회는 페이스북을 통해 “그동안 논란이 돼온 입시제도의 문제점들이 이번 사건을 통해 수면 위로 부상했고, 한국 대학사회의 구성원 모두 이와 같은 문제의식에 공감할 것”이라며 촛불 집회 개최의 취지를 밝혔다. 사법고시 존치를 위한 모임 이종배 대표는 “기득권층이 자신들에게 유리한 제도를 만들고 혜택을 누려왔다”며 조 후보자에 대한 실망감을 드러냈다. 조 후보자의 아들도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조 후보자의 아들 조모씨는 군 입대를 다섯 차례나 연기한 바 있다. 비난이 일자 조 후보자는 공식적으로 자신의 아들이 내년에 입대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기대감 컸던 만큼 배신감도 커 서울대 총학생회는 8월 26일 입장서에서 “(조 후보자는) 여러 의혹에 대해 ‘법적인 문제는 없다’는 후안무치의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며 “원칙과 상식이 지켜지는 나라, 정의가 살아 있는 사회를 위해 사퇴를 강력하게 촉구한다”고 밝혔다. 연이은 학생들의 촛불집회에 대해 김찬호 성공회대 교수는 “불공정 거래에 대한 배신감”이라고 풀이했다. 김 교수는 “사회에서 권력과 부, 명예는 희소자원”이라며 “희소자원을 가진 기득권층이 의무를 다할 경우 사람들은 존경심을 표한다”고 설명했다. 즉 의무와 존경심이 교환관계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이번처럼 ‘존경심’에 비해서 ‘의무’가 따라주지 않을 경우 사람들은 배신감을 느끼며 존경을 철회하게 된다는 것이다.

빨리 성장한 한국사회, 노블레스 오블리주 배양하지 못해

그렇다면 한국사회에서 도덕적 의무를 다하는 기득권층을 찾기는 불가능한 것일까? 이에 대해 김 교수는 “한국사회는 빠른 시간 동안 발전했기 때문에 축적된 문화가 없다”며 “부유하거나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자기 나름의 문화를 만들기엔 시간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문화를 한국정서에 맞게 배양하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최홍재 신문명연대 대표 역시 “급속한 근대화에 따라 귀족층의 도덕적 책무에 대한 정신이 형성될 여지가 우리 사회에서는 없었다”고 진단했다.

선비 정신은 일제를 거치면서 쇠락하고, 현대사회에 연결되지 않았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최 대표는 “엘리트를 존경해야 사회가 안정되는 경향이 있다”며 영국 귀족층의 예를 들었다. 영국 귀족층은 혜택에 대한 사회적 책임감 때문에 전쟁시 국가를 방어하는데 헌신하는 전통이 존재한다. 그런 전통이 살아서 연결돼 온 덕분에 오늘날에도 귀족층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는 높은 편이라는 것이다.

기득권층 비리는 진영과 무관

최 대표는 또 “조국 사태는 기득권층의 비리가 진영 논리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촛불 집회는 진보 진영이라고 해서 도덕적으로 반드시 우월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 선명한 사례라는 얘기다. 다시 말해, 진영 논리를 넘어서 한국사회에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미비하다는 경종을 울린 셈이라는 게 최 대표의 진단이다.

추홍희씨는 자신의 저서 ‘한국의 특권층&노블레스 오블리주’에서 “경제가 이만큼 성장하고 교육수준도 세계 최고인 나라에서 민주시민의 가장 기초적인 자질인 ‘타인에 대한 배려’ 능력을 결여하게 된 이유는 그동안 우리 사회가 지나치게 경쟁 중심의 사회로 흘러왔기 때문”이라며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없는 한국사회를 진단했다. 폐쇄적이고 관료화된 사회에서 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동료와 경쟁자를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는 기득권층이라도 타인을 배려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기 힘들다는 게 추 씨의 분석이다. 조 후보자와 촛불 집회를 계기로 기득권층의 도덕성에 대한 자성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경쟁위주의 사회문화 자체가 문제가 아닌지 되짚어봐야 한다는 주장이다.

노유선 기자



노유선기자 yoursun@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