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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버스터도 내로남불? 진보진영, 필리버스터 세계최장기록 보유

  • 11월 29일 개회 예정인 본회의가 자유한국당의 필리버스터 신청으로 열리지 못하고 있다. /연합
지난달 29일 자유한국당이 본회의에 상정되는 199개의 안건에 대해 필리버스터를 신청해 논란이 일고 있다. 필리버스터는 의회에서 다수당의 독주를 막기 위해 소수당이 합법적으로 의사 진행을 방해하는 행위를 뜻한다. 한국당은 불법적인 패스트트랙을 저지하기 위해선 필리버스터가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더불어민주당은 한국당의 무더기·무제한 필리버스터 때문에 민생 법안이 본회의에 묶여 있다며 역공을 펼치고 있다. 한국당이 민생과 관련한 비쟁점 법안까지도 필리버스터를 신청했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이같은 비판에 한국당은 지난 2일 비쟁점법안만을 채택한 원포인트국회를 열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민주당은 필리버스터 철회 없이 본회의 개최는 불가하다는 강경한 태도를 고수하고 있다. 지난달 29일 이인영 민주당 원내대표는 "민식이법을 비롯해 순수한 민생경제 법안을 원포인트 본회의라도 열어서 처리하자는 제안에 동의한다"면서도 "전제조건은 아무 것도 없어야 한다"고 밝혔다. 필리버스터가 완전 철회돼야만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이 원내대표는 "한국당의 필리버스터 신청은 국회를 봉쇄하고 마비하겠다는 정치적 폭거"라고도 했다.

필리버스터 논란에 때아닌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거론되기도 했다. 진보진영의 대표주자격인 조 전 장관은 2016년 자신의 SNS에 필리버스터를 지지하는 글을 올렸다. 이 내용이 현재 민주당의 당론과 대립하면서 온라인상에 일파만파 퍼지고 있다. 당시 조 전 장관은 "필리버스터만으로 악법 통과를 완전히 막을 수는 없지만 이러한 경험은 두고두고 소중하게 작동할 것”이라며 필리버스터를 옹호했다. 또 민주당 비대위가 필리버스터를 중단할 것을 요청하자 비판의 날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민주당 비대위의 필리버스터 중단 요청은 급전직하 경착륙 출구전략”이라며 “지지자와 소통하며 사전 양해를 구하는 방식의 다른 출구전략이 있는데, 순서가 뒤바뀌었다. 후과가 상당할 것”이라고 했다.

韓, 세계 최장기록 보유국
민주당은 한국당의 필리버스터 철회를 강하게 요구하고 있지만 사실 필리버스터와 친숙한 쪽은 진보진영이다. 조 전 장관이 언급한 2016년 필리버스터는 민주당 의원 108명이 주도한 것이었다. 당시 민주당은 정의당, 국민의당과 연계해 필리버스터를 시행하면서 필리버스터 세계최장기록도 갈아치웠다. 2016년 2월 정의화 국회의장이 ‘국민보호와 공공안전을 위한 테러방지법안(테러방지법)’을 본회의에 직권상정하자 민주당 의원들은 곧바로 필리버스터를 신청했다. 이후 총 38명의 의원들이 연단에 올라 192시간 27분 동안 릴레이 필리버스터를 시행했다. 이는 ‘단체 최장기록’인 캐나다의 58시간을 넘겨 세계최장기록으로 남았다. 마지막 발언자였던 이종걸 민주당 의원은 12시간 31분 동안 연설해 국내 최장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한국 최초 필리버스터, 김대중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필리버스터를 시행한 국회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다. 1964년 당시 초선이었던 김대중 의원은 동료 김준연 자유민주당 의원의 구속동의안을 무산시키기 위해 5시간 19분 동안 원고 없이 발언했다. 김준연 의원은 여당인 공화당이 한·일 협정 협상과정에서 1억3000만달러를 들여와 정치자금으로 사용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공화당은 김준연 의원을 명예훼손과 허위사실 유포로 서울지검에 고소했으며 박정희 대통령과 김종필 당의장을 대신해 명예훼손 혐의로 고발했다. 회기 마지막날인 1964년 4월 21일, 국회의장은 김준연 의원 구속 동의안을 본회의에 상정했다. 하지만 김대중 의원의 연설로 안건 통과는 무산됐다. 국민대 강상호 교수는 “연설 시간이 길었음에도 내용이 논리정연했다”며 “이슈에 적합한 명연설로 꼽히고 있다”고 평가했다. 또 “필리버스터는 홍보효과는 있지만 실제로 성공한 사례는 별로 없다”며 “김대중 의원의 연설은 성공한 필리버스터이자 내용 자체도 좋은 경우”라고 설명했다.

스타워즈 패러디로 진행 방해
필리버스터는 법안 처리를 무한정 지연시킨다는 문제점도 있다. 안건과 무관한 발언으로 의사 진행을 방해하는 경우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2013년 9월 미국 공화당의 테드 크루즈 의원은 건강보험 개혁안(오바마케어)이 포함된 2014년도 예산안에 반대해 21시간 19분 동안 연설했다. 혼자서 긴 시간을 감당하기 힘들었던 그는 쿠바 난민 출신 아버지가 요리사로 일했던 가정사를 고백하거나 ‘녹색 달걀과 햄’이란 동화책을 읽는 한편 스타워즈 패러디도 언급하는 등 좌중의 실소를 자아냈다. 그의 필리버스터는 실패로 끝났다. 필리버스터가 끝나자마자 2014년도 예산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됐다. 테드 크루즈 의원은 법안 저지 효과도 보지 못한 채 시간만 낭비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한국당 필리버스터의 성공여부
한국당은 필리버스터를 시작하기도 전에 민생보다 당리당략을 우선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경희대 김민전 교수는 “한국 국회에서 원내 소수파가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며 “미국처럼 크로스보팅(교차투표)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한국당이 꺼낼 수 있는 카드는 필리버스터뿐”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미국은 더 나은 법안이 나오면 의원들이 소속 정당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주관대로 투표할 수 있지만 한국은 그렇지 못하다”며 “한국에는 당 지도부의 의견에 따라야 하는 암묵적 강제가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민주당 내부에 선거법 개정안에 반대하는 의원들이 많지만 이들 대다수가 내년 총선 공천 때문에 당 지도부의 눈치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강상호 교수는 “법안 199건에 필리버스터를 신청한 것은 무리”라면서 “민주당에 한국당을 제외한 채 다른 당과 공조할 명분을 줬다”고 말했다. 필리버스터 성공 여부에 대해선 “상대방의 법안 통과 의지가 강하면 필리버스터로는 막기 어렵다”고 했다. 필리버스터가 신청된 본회의가 끝난 뒤 임시회가 열리면 바로 표결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강 교수는 “한국당 필리버스터가 국민에게 주는 이미지는 둘로 나뉜다”며 “강력한 법안 저지 의사를 표명했기 때문에 홍보효과는 누렸지만 민생법안 발목을 잡았다는 비난도 받았다”고 설명했다.

노유선 기자 yoursun@hankooki.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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