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역사는 영토 확장의 역사… 텍사스·알래스카·하와이에 이어 그린란드 인수에 팔 걷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대통령이 덴마크의 그린란드 매입 의사를 흘려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그의 공식적 발언은 2019년 8월 중하순 중국과의 무역 분쟁, 이란 제재, 북한 핵문제, 자신의 탄핵문제 및 2020년 재선 등 국내외의 난제들이 많은 가운데 나왔기에 정략적일 수도 있다. 그린란드는 어떤 곳인가? 그린란드는 캐나다 북쪽 대서양과 북극해 사이에 있는 면적 216만 6000㎢의 크기로 세계에서 가장 큰 섬이다. 호주는 훨씬 더 큰 섬나라지만 5대륙의 하나이기에 섬 크기 경쟁에 낄 수 없다. 그린란드와 인접한 아이슬란드는 10세기경 똑같이 덴마크의 선조인 바이킹족들에 의해 발견된 땅으로 알려져 있다. 그린란드(Greenland)는 80%가 얼음으로 뒤덮인 동토의 땅으로 1721년 덴마크 식민지에서 1979년 이후 덴마크령이 되었고, 아이슬란드(Iceland)는 초원을 보유한 땅으로 1944년 이후 덴마크 연합에서 독립한 국가이다. 둘 다 이름 명칭이 자연환경과 정반대인 점이 흥미롭다. 그린란드 인구는 약 5만 6000명이다.

18세기 초반 덴마크 영토로 편입된 그린란드는 주민투표를 통해 2009년부터 자치권 확대를 달성했지만 외교와 국방, 통화 정책 등은 여전히 덴마크에 의존한다. 그린란드는 현재로선 덩치만 크고 GDP는 주로 수산업으로 20억 달러에 불과하다. 그러나 최근 지구온난화 추세로 광물자원, 석유가스 등의 개발에 속도를 낼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덴마크 본토면적은 4만 3000㎢이고, 본토의 배타적 경제수역 면적은 10만 6000㎢이다. 그린란드의 배타적 경제수역(EEZ) 면적은 세계 15위로 218만 4000㎢이다. 본토의 배타적 경제수역에 비해 무려 20배 크기이다. 강대국의 최대 각축장의 하나인 북극해 항로가 열리면 정치·경제·군사적으로 중요한 위치가 된다. 미국은 덴마크와 군사방위조약을 맺고 1951년부터 그린란드에 툴레공군기지를 운영하고 있다. 툴레공군기지는 세계 미군기지 전체를 통틀어 최북단 기지다.

빙하의 나라 그린란드.

지금은 세계 최강이지만 미국의 독립은 1776년 독립선언서 선언 이후 영국과 약 8년 동안의 치열한 독립전쟁(1775~1783년)의 진통 끝에 결실을 맺었다. 미국의 독립전쟁은 세계전쟁사에서 하나의 기적이었다. 보스턴 홍차사건으로 촉발된 독립전쟁이 경제와 산업발전을 촉진시켰기 때문이다. 당시 유럽대륙은 중상주의 보호정책이 유행할 때, 미국은 자유무역항으로 관세를 폐지했고 국제무역을 장려했다. 전 세계상선이 미국으로 활발한 교역활동을 할 수 있었고, ‘모든 길은 로마로’처럼 ‘세계의 무역항로는 미국으로’ 이어졌다. 미국은 이후 국력을 키웠고 마침내 20세기에는 옛 로마제국에 버금가는 초강대국에 오르게 되었다. 미국이라는 거대한 배는 긴 항로를 거쳐 왔다. 그 쉽지 않은 항로의 굽이굽이마다 기록된 미국의 영광은 이름 없는 수많은 국민들의 노력과 눈물 덕분이지만, 배의 선장들이었던 대통령들과 책략가들의 새로운 나침반 설정과 방향타 조정 덕분이기도 했다. 미국은 19세기 초부터 국가 영토와 인구, 두 가지 면에서 모두 급성장했다. 역사상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은 국가는 많았지만, 미국처럼 협상 테이블에서 대국이 된 나라는 거의 없다. 물론 군사력의 위협과 행사로 협상이 가능했던 경우도 있었다. 예를 들어, 파나마 운하 협정은 사실상 협상보다 무력과 음모가 주도적 역할을 했다. 그렇다 해도 영토를 확장하면서 직접적인 무력에 덜 의존하고 협상과 금전거래로 결실을 본 경우가 많은 점이 특별하다.


1803년 미국의 제3대 대통령인 토머스 제퍼슨은 프랑스 나폴레옹 황제로부터 미시시피 강 서부 유역의 214만㎢에 이르는 프랑스령 루이지애나 지역(프랑스 왕인 루이 14세의 이름을 따서 붙인 지역)을 불과 1500만 달러에 매입(현재 가치로 3억 4000만 달러, 약 4080억 원에 불과)하였고, 신흥국가 미국의 영토는 급기야 두 배가 되었다. 이 국가전략은 ‘미국 역사상 가장 현명했던 토지거래’ 중 하나다. 루이지애나 매입을 계기로 미국은 본격적인 서부 개척 시대를 열었다. 18세기에서 19세기 초까지 프랑스는 줄곧 미국에 도움을 주어왔다. 프랑스는 ‘프랑스·인디언 전쟁’(1754~ 1763년)으로 북아메리카의 광활한 식민지를 잃었다. 유럽에서 칠년전쟁이 일어나고 있을 때,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오하이오 강 주변의 인디언 영토를 둘러싸고 일어난 영국과 프랑스의 식민지 쟁탈 전쟁이다. 영국과 프랑스 모두 인디언들과 동맹을 맺었지만, 영국 측에서 볼 때 프랑스가 인디언과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프랑스·인디언 전쟁’이라고 한다. 이 전쟁의 승리로 영국은 제2차 백년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북미 식민지 전쟁의 참전국 중 가장 큰 발전을 이룰 수 있게 되었다. 그 이후 영국을 원수처럼 여기게 된 프랑스는 어떻게든 영국의 힘을 약화시키고자, 1775년 아메리카 식민지의 봉기가 일어났을 때 적극적으로 미국 후원에 나섰다. 스스로의 재정난에도 불구하고 거액의 자금을 원조했을 뿐 아니라, 1778년부터는 라파예트 등이 이끄는 수천 명의 원정군이 아메리카로 건너가 독립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웠다. 1778년 9월의 체사피크 만 해전과 10월의 요크타운 전투에서 영국군에게 치명타를 안김으로써 미국 독립전쟁의 승리를 가져온 주역도 프랑스군이었다.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매각한 나폴레옹의 결정은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매우 어리석어 보인다. 프랑스로서는 나폴레옹이 넬슨에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패해 세계쟁패에 실패한 것 못지않게, 루이지애나를 미국에 팔아넘긴 나폴레옹의 협상을 두고두고 한이 되는 실패한 책략으로 평가할 것이다. 그토록 야심차게 구상했던 신대륙 제국 ‘뉴 프랑스’의 기반을 미국에게 통째로 넘겨줬을 뿐만 아니라, 그 땅의 면적이 무려 214만㎢로 한반도의 10배를 넘고 당시 프랑스 육지 영토의 세 배가 훨씬 넘는 대규모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략의 천재 나폴레옹은 나름대로 냉정한 분석을 통해 그런 결정을 내렸다고 평가하는 주장도 있다. 첫째, 나폴레옹의 프랑스는 영원한 적수 영국과의 사생결단을 위한 결전을 위해 급전이 필요했다. 둘째, 나폴레옹은 당장은 미국에게서 루이지애나를 힘으로 지키기 어렵고, 지금까지 우호적인 미국이 자칫하면 영국과 동맹을 맺을 가능성을 우려했다. 셋째, 당시 나폴레옹을 비롯한 누구도 루이지애나의 참된 가치를 몰랐다. 아니면, 영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후 다시 프랑스가 되 살 수 있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다. 이 지역은 오늘날 전체 미국 영토의 23%에 해당하며, 아이오와, 아칸소, 오클라호마, 콜로라도, 루이지애나 등 15개 주에 걸쳐 분포한다. 본격화된 영토 팽창은 끊임없이 진행되어 1840년대에는 북아메리카의 태평양 연안까지 이르렀다.

미국은 1840년대부터 1890년대까지 노예 문제, 남북 전쟁, 전쟁 뒤 남부의 재건, 서부 개척과 사회 개혁 때문에 국력을 해외로 전환할 수 없었으나, 역설적으로도 그 시기는 미국이 영토를 오늘날의 거대 국토로 확장한 중요한 때였다. 미국의 제11대 대통령인 제임스 녹스 포크(재임 1845-1849년)는 “미국은 더 넓은 영토를 차지할 ‘명백한 운명(Manifest Destiny)’을 지니고 있다”고 신호탄을 쏘아 올리면서 영토 확장의 역사는 가속되었다. ‘명백한 운명’이라는 말은 1840년 대 미국 정치가와 정부의 리더들에 의해 널리 사용되었다. 이 논리는 1845년 뉴욕 시의 한 저널리스트 존 오설리번에 의해 처음 소개되었다. 그는 “서부로 계속 팽창해 나아가 대륙 전체로 확대, 손에 넣는 것은 우리의 ‘명백한 운명’으로 해마다 증가하는 수백만 인구의 자유로운 발전을 위하여 신이 베풀어 주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포크 대통령은 1845년 멕시코-미국 전쟁에서 독립한지 20년밖에 안 된 신생 멕시코 영토의 약 55%에 해당하는 135만 6000㎢를 빼앗았고 미국의 제28번째 텍사스 주로 합병했다. 멕시코는 1500만 달러를 받고 325만 달러의 빚을 청산받았다. 이처럼 미국은 스페인, 멕시코와는 타협, 거래, 또는 전쟁으로 콜로라도 강에서 리오그란데 강에 이르는 광활한 서남부 지역을 손에 넣었다. 1846년에는 오리건을 영국에게서 얻었고, 1848년과 1854년에 캘리포니아와 네바다, 유타, 애리조나 등을 멕시코에게서 양보받았거나 매입했다. 1867년 미국의 제 17대 대통령 앤드류 존슨 대통령(재임 1865~1869년)과 국무장관 윌리엄 시워드는 태평양에서 미드웨이 군도를 획득하고, 러시아로부터 알래스카를 720만 달러에 사들임으로써 북극해까지 영토를 넓혔다. 제18대 대통령 율리시스 심프슨 그랜트(재임 1869~1877년)는 하와이의 전략적 가치를 인식하여 1875년에 자유무역협정을 맺었다. 미국의 배들이 진주만 항을 자유롭게 이용하면 하와이에서 생산되는 설탕에 부과되는 관세를 낮춰주겠다는 조건이었다. 1878년에는 태평양 무역의 중계지 사모아에 해군 기지를 설치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였다. 1893년에는 하와이를 공격하여 점령했고, 1898년 미국의 제25대 대통령인 윌리엄 매킨리(재임 1897~1901)는 필리핀과 괌을 식민지로 삼았다. 이렇게 미국은 북미 대륙 영토 확장과 동시에 대서양과 태평양 양쪽에서 바다를 활용하고 양동작전을 쓸 수 있는 힘을 갖추게 된 것이다. 20세기를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로 만들려는 국가비전은 해외영토 확장전략에서 출발했다. 해외영토의 확장은 당연히 섬과 바다의 영토 및 배타적 경제수역의 확장을 수반하였다.



주간한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