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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승용의 해양책략… ⑦ 중국의 백년 마라톤 국가설계와 해양책략Ⅱ

아편 교역 둘러싼 英과의 전쟁서 패한 청, 서구 해양세력과 잇따라 불평등 조약
  • 아편전쟁 중국 문을 열다.
미국 싱크탱크인 허드슨연구소의 중국전략 센터장 마이클 필스버리는 그의 책 <백년의 마라톤 The Hundred-Year Marathon, 2016)>에서 중국의 100년 계획을 설명했다. “중국강경파들은 마오쩌둥부터 현재 지도부에 이르도록 중국은 1842년 아편전쟁에 패배한 시점부터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된 1949년 이전까지를 ‘치욕의 세기(Century of Humiliation)’로 정의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1949년부터 2049년까지 백년의 마라톤을 통해 치욕을 설욕하고 경제·군사·정치적으로 미국을 추월해 글로벌 선두국이 되고자 열망해 왔다.”치욕의 세기를 출범시킨 아편전쟁을 짧게 살펴보자. 영국이 중국에 아편을 밀수출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8세기 서양이 산업혁명과 계몽주의로 급변하는 새 시대를 맞고 있었다면, 청나라 중국은 강희^ 옹정^건륭제의 통치기, 이른바 3대 134년(1661∼1796년)에 걸친 이 시기를 흔히 ‘강건성세(康乾盛世)’라고 부른다. 이 태평성세가 전반적인 이완현상을 겪게 된 것은 건륭 중기 무렵부터였다. 명나라 때부터 유럽 상인들은 광저우를 중심으로 교역을 했다. 그러나 1757년 건륭제는 아예 광저우를 제외한 무역항에서의 무역을 불법으로 규정해 버렸다. 이에 유럽 국가들은 새로운 무역항을 확대하려고 시도했으며 영국 정부는 1792년 조지 매카트니의 사절단을 건륭제에게 파견한다. 매카트니 사절단은 치외법권을 보장받는 차와 생사 생산지역 할양, 안정적인 무역량을 확보하기 위한 정식 조약 체결, 광저우의 폐단 근절 등을 골자로 한 6대 임무를 받고 공식적으로는 건륭제의 80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한 사절로 파견됐다. 청나라도 이것을 동아시아식 조공사절로 판단하고 최상의 예우를 다했으나 곧바로 분쟁이 발생했다.

부패 만연, 아편 수요 폭발적 증가

당시 청나라는 늘어난 인구를 부양할만한 생산성의 향상이나 행정제도의 뒷받침을 이미 부패해버린 관료들에게 기대하기 어려웠다. 무사안일주의, 사회전반에 걸친 사치풍조와 부패의 만연, 청나라 조정 타도를 외치며 들고 일어난 반란풍조와 진압과정 등은 중국 국민들로 하여금 현실의 쾌락이나 고통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아편을 피우게 되었다. 아편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청나라 옹정제 초기인 1729년에 이미 첫 번째 아편 금지령이 내려졌으나 19세기에 이르러 폭발적인 성장세를 보였다. 1780년 무렵 약 1000상자에 불과했던 아편의 수입량은 1830년에는 1만 상자, 아편전쟁 직전에는 4만 상자 정도로 늘어났다. 무게로 치면 거의 300만 톤에 육박하는 것이었다. 중국 청나라 정부는 여러 차례 아편금지령을 내렸으나 통하지 않았다. 영국은 중국에서 홍차를 들여올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인도산 아편을 중국인들에게 판매하였고, 산업혁명 이후의 영국은 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아편을 선택했다.

인도에 대한 무역독점권을 놓고 영국은 프랑스와의 플래시 전투에서 승리한 이후 동인도회사가 인도의 벵갈 지방에서 아편을 재배해 상인을 통해 중국 근해로 운반한 다음 몰래 중국에 파는 삼각무역 방식을 썼다. 1829년 말부터 쾌속 범선이 등장하여 항해시간이 짧아지면서 더 많은 아편을 밀수출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침내 도광제(道光帝, 재위 1820∼1850년)는 임칙서(林則徐)를 특사(흠차대신)로 파견하여 광저우의 아편거래를 막게 했다. 1839년 정월, 광저우에 도착한 임칙서는 상황을 파악한 후 과감하게 손을 쓰기 시작했다. 외국인에게는 남은 아편을 관청에 넘기고 다시는 아편을 판매하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하도록 고시했다. 외국인들이 이 조처에 대해 별로 개의치 않자 한 달 후 임칙서는 바로 군대를 동원해 광저우의 번화가인 13행 거리를 포위하며 행동을 개시했다. 광저우에는 자기 나라 상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영국 통상 감독 찰스 엘리어트가 군함 2척을 이끌고 들어와 있었다. 찰스 엘리어트는 난징조약으로 얻은 홍콩의 첫 총독이 된다.

청나라 강경한 아편무역 금지조치

임칙서는 총독이 부임하자마자 외국상인들로부터 아편을 몰수, 석회를 뿌려 바다에 모두 흘려보냈다. 찰스 엘리어트는 교묘하게 영국 상인들로부터 아편을 자신에게 넘기도록 하였다. 영국 상인들의 아편이 대영제국의 아편으로 둔갑했다. 그는 2만 80상자의 아편을 내놓았다. 도광제는 승리에 흥분했고 영국 상인들은 임칙서가 아직도 더 많은 뇌물을 위해 흥정을 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강직한 임칙서는 호문에서 단호하게 아편을 불태웠으며, 이 사건은 급기야 아편전쟁(제1차 1839~1842, 제2차 1856~1860)의 빌미가 되었다. 청나라의 강경한 아편무역 금지조치에 대해 영국의 자본가들은 의회에 압력을 가했다.이때 나타난 인물이 윈스턴 처칠, 벤저민 디스레일리 등과 더불어 영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총리로 꼽히는 윌리엄 글래드스턴이었다. 그는 무려 4차례에 걸쳐 영국총리를 역임했다. 초선 의원 시절인 1840년 영국 내각이 청나라와의 아편전쟁을 감행하려고 하자, 의회 연설을 통해 이를 통렬히 비판했다.

“그 기원과 원인을 놓고 볼 때 이것만큼 부정한 전쟁, 이것만큼 영국을 불명예로 빠뜨리게 할 전쟁을 나는 이제껏 보지 못했습니다.(중략) 우리 국기가 부끄러운 아편 밀무역을 보호하기 위하여 중국 연안에 나부끼고 있습니다. 위풍당당한 영국 국기를 볼 때마다 느꼈던 벅찬 감동을 앞으로 다시 느낄 수 없게 될 것을 생각하면 고통스러울 따름입니다.” 비록 아편전쟁 자체를 막지는 못했지만, 그의 연설을 계기로 아무런 이의 없이 진행될 뻔했던 영국의 전쟁 선포가 의회 표결에서 불과 몇 표 차이로 간신히 결정될 정도로 격론을 일으켰다. (《Wikipedia》, 윌리엄 글래드스턴)

영국 원정 함대, 청나라 위협

이 무렵 영국 정부를 이끌었던 휘그당의 파머스턴 내각은 중국무역을 안정된 기초 위에 두는 데 필요한 조건의 획득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원정군을 파견하기로 했다. 당시 파머스턴 총리는 이때 다음과 같은 말로 유명하다. “우리에겐 영원한 적도, 영원한 친구도 없다. 다만 영원한 국가 이익이 있을 뿐이다.” 이에 따라 영국 전권대사 조지 엘리어트(앞에서 언급한 찰스 엘리어트와는 다른 인물)는 1840년 6월 20척의 함선과 육해군 4000여 명의 원정군을 이끌고 광동 앞바다에 도착했다. 영국은 인류역사상 가장 더럽고 부도덕한 전쟁을 일으킨 것이다. 영국 사령관인 조지 엘리어트는 결단력도 없었고 비효과적인 인물로 평가됐지만, 대포와 강한 해군을 갖춘 영국군 앞에 중국의 군대는 무력하기 짝이 없었다. 재래식 범선이 대부분이었고 군사 장비는 240여 년 전에 주조된 낡은 것이었다.

영국은 주산 군도를 점령하여 양자강 하구를 봉쇄하고 톈진 인근까지 함대를 파견하여 청나라를 위협하면서 타협을 시도했다. 영국 원정 함대의 위용에 놀란 청나라 정부는 광저우에서 교섭할 것을 약속하고 임칙서를 파면시키고 타협파인 기선(琦善)에게 교섭을 담당시켰다. 기선은 호문에 침입한 영국군의 압력에 가조약에 조인했다. 도광제는 격노하여 기선을 파면시켰기 때문에 영국군은 공격을 재개했다. 영국군은 1841년 5월 광주성에 육박하여 배상금 지불, 광주성에 있는 청군의 철수, 영국군의 광저우 주둔 승인 등을 약속한 광저우 화약을 맺었다. 1841년 가을, 전쟁이 재개되어 영국군이 닝보(寧波)를 점거했다. 이제 영국군의 병력은 1만으로 불어나 있었고, 증기선 14척이 대기하고 있었다. 주강구와 주산에서 중국군이 결사 저항했으나 속수무책이었다.

서구 열강, 대륙으로 상륙 본격화

1842년 8월의 남경조약은 중국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인 조약이며 불평등조약이다. 이 조약으로 중국이 오랫동안 유지해오던 중화사상은 여지없이 깨졌으며 중국사회는 커다란 충격에 빠졌다. 광저우에만 제한시켰던 외국상인들의 활동은 확대되었고, 문제가 되었던 아편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었다. 아편무역을 계속하겠다는 영국의 입장이 관철된 것이다. 영국은 중국에 대한 공세를 강화하여 1842년 6월 상해를 점령하고 난징으로 진격했다. 청나라는 아주 불리한 조건으로라도 타협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렸다. 결국 1842년 8월 영국함대의 갑판에서 영국과 청나라 사이에 역사적인 ‘난징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의 주요 내용은 ①홍콩을 영국에 할양, ②광저우^샤먼^푸저우^닝보^상하이 등 5개 항구 개항, ③중국은 전쟁 배상금 1200만 달러, 몰수된 아편 배상금 600만 달러 등을 3년 안에 영국에 지불 등의 내용을 담았다. 이후 관세에 관한 내용, 영사 재판권, 최혜국 대우, 5개 항에서의 군사 정박권 등을 추가시키게 된다.

이후 중국은 미국, 프랑스 등 다른 서양 여러 나라들과도 영국과 맺은 조약의 내용과 비슷한 불평등조약을 맺게 됐다. 1844년에는 미국과 왕샤조약, 프랑스와는 황포조약, 1858년 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와 톈진조약, 1860년 영국^프랑스^러시아와 베이징조약을 맺게 되었고 마치 아편을 물고 잠자던 거대한 중국은 불평등조약으로 서구 열강에 서서히 잠식되었다. 중국이 무너진 후 일본도 1854년 미국과 화친조약에 이어 1856년에는 통상조약을 맺는다. 조선은 메이지 유신으로 불과 20년 만에 서구화된 일본에 의해 일본이 당한 방식으로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게 되었다. 이처럼 서구 열강에 의한 아시아 점령인 서세동점(西勢東漸)은 해양으로부터 대륙으로 상륙이 본격화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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