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소평 ‘해양 통한 개혁·개방전략’ 매진… 선전·상하이 등 연안도시 ‘해양책략’ 거점

등소평

‘백년의 마라톤’ 정신은 중화민족의 부흥을 꾀하는 ‘중국몽(中國夢)’에 맞닿아 있다. 2001년‘9^11테러’ 이후 미국이 중동에 집중하는 동안 중국은 그 틈을 놓치지 않았고 거침없이 국력을 키웠다. 어느덧 빅 2로 급성장한 중국의 성장에 놀란 미국은 중국과 무역전쟁과 해상봉쇄로 맹공을 퍼부으면서 중국의 ‘백년의 마라톤’에 제동을 걸었다. 중국과 미국은 신흥 패권국과 기존 패권국이 충돌하며 파국을 맞는 ‘투키디데스의 함정(Thucydides Trap)’은 일단 피해왔다.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는 용어는 아테네 출신의 역사가이자 장군이었던 투키디데스(Thukydides)가 편찬한 역사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서 비롯됐다. 기원전 5세기 기존의 맹주였던 스파르타는 급격히 성장한 아테네에 대해 불안감을 느끼게 되었고, 이에 양 국가는 지중해의 주도권을 놓고 전쟁을 벌이게 됐다. 투키디데스는 이와 같은 전쟁의 원인이 아테네의 부상과 이에 대한 스파르타의 두려움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여기에서 유래된 ‘투키디데스의 함정’은 급부상한 신흥 강대국이 기존의 세력 판도를 흔들면 결국 양측의 무력충돌로 이어지게 된다는 뜻의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고 처음 명명한 사람은 미국 클린턴 정부에서 국방부 정책담당 차관보를 거쳐 하버드대 케네디 스쿨교수인 그레이엄 앨리슨(Graham Allison)이다.

물론 그레이엄 엘리슨 교수의 투키디데스 함정이론에 대해 인디애나대학교의 에릭 로빈슨 교수는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전략과 함정(trap)의 실체에 대한 해석을 놓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레이엄 앨리슨은 ‘투키디데스의 함정’이라는 역사 패턴을 공부하면서, 왜 신흥 세력인 중국과 지배 세력인 미국이 그 누구도 원하지 않는 과격한 충돌로 이어질 수 있는지와 어떻게 이 상황을 해결해야 하는지에 대한 연구했기에 하나의 연구 틀로서 매우 유용할 수밖에 없다. 그는 투키디데스 프로젝트를 진행하여 지난 500년 동안 16개의 투키디데스 함정의 결말을 분석했다. 그 결과 16개의 사례에서 14개가 전쟁으로 해결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중국은 ‘백년의 마라톤’이라는 결승점에 도달하려면 많은 장애물을 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저서인 <예정된 전쟁(Destined for War), 2017년>에서 미국과 중국은 상대를 죽이려면 전쟁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으며, 잠재적 탈출구로 진지한 ‘경쟁자 간 협력(coopetition)’이 전략적으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미국과 중국이 투키디데스의 함정을 피하기 위해서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이 제창하여 유럽을 부흥시킨 마셜플랜과 같은 창의적 발상이 필요함을 강조한다. 마셜플랜을 위해 미국은 4년 동안 세금을 걷어 매년 GDP의 1.5%를 유럽 국가 재건을 위해 보냈다. 독일과 이탈리아도 포함됐는데 그 군대가 미국인들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마셜 플랜은 UN을 만들고, 세계은행, NATO(북대서양 조약 기구) 등 모두 평화와 번영을 위한 시스템을 태동시켰다.

앨리슨 교수는 2019년 12월 12일 도쿄의 한 학술세미나에서 “미국과 북한의 대립이 자칫 2차 한국전쟁으로 이어질 확률이 50% 이상은 아니지만 매우 높다”고 발언해 행사장을 술렁거리게 했다.(최원석 기자, ‘한반도의 작은 불씨, 큰 불 될 수도’<조선일보>, 2020.1.1.) 그는 미국과 중국의 투키디데스 경쟁에서 한국은 중국과의 경제이익과 미국과의 안보이익을 균형 있게 유지하는 포지셔닝이 중요하다고 말한다.(김재중 특파원, ‘그레이엄 앨리슨 교수 “미·중, 상대 죽이려 하면 자신도 죽게 돼”<경향신문>, 2019. 12.31.) 해양을 외면해 ‘백년치욕’을 겪은 중국은 덩샤오핑 이후 지역 패권은 육지 확장으로 충분하지만, 세계 패권을 쥐려면 해양 장악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해양책략’을 국가정책으로 추진했다. 우여곡절 끝에 마오쩌둥의 후계자가 된 덩샤오핑이 취한 전략은 남중국해의 지정학적 중요성을 감안하여 1979년 2월 20만 명의 병력으로 베트남을 침공한 것이었다. 그러나 미국과의 전쟁에서도 지지 않았던 베트남이 아니던가. 중국은 두 달여 만에 4만 명의 전사자를 내면서 패전했다. 여기서 값비싼 교훈을 얻은 후부터 덩샤오핑의 국가전략은 내실위주의 경제발전에 일로매진하게 된다.

중국 상하이.

20세기 후반 중국개혁개방 현대화 총설계자인 덩샤오핑 鄧小平은 개혁개방을 선언하며 ‘선부론(先富論)’을 내세웠다. 선부론의 핵심은 중국 동측의 특구와 해안지역을 부유하게 만드는‘연안개방전략’, 나아가서는 ‘해양을 통한 개방전략’ 등이다. 덩샤오핑식 해양책략이라고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 덩샤오핑의 개방정책은 ‘흑묘백묘론 (黑猫白猫論)’으로 상징되며, 이는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융합전략이다. 중국은 덩샤오핑의 ‘흑묘백묘론’으로 출발하여 ‘선 연안개방ㆍ후 내륙개발정책’을 추진해 왔고, 외교정책도 수동적인‘도광양회(韜光養晦, 칼날의 빛을 숨기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름)’에서 능동적인‘화평굴기(평화적으로 우뚝 섬)’, ‘분발유위(奮發有爲·떨쳐 일어나 해야 할 일을 한다)’로 바꾸었다. 대륙에 웅크리던 국가가 해양국가로 팽창하고 있으며 ‘해양굴기’는 대표적 국가전략이다. 덩샤오핑은 평생 바다를 사랑했다. 중국 건국의 주역 마오쩌둥이 강이나 호수에서의 수영을 즐겼다면 덩샤오핑은 거센 파도가 치는 바다 수영을 좋아했다. 헤엄칠 때 마오쩌둥의 시선이 내륙을 향했다면 덩샤오핑의 눈길은 바다 수평선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각막은 기증하고 시신은 해부한 뒤 화장해 바다에 뿌려 달라.” 중국 개혁·개방의 총설계사 덩샤오핑의 유언이다. 1997년 3월 2일, 오색 꽃잎에 쌓인 덩의 유해는 그렇게 중국 동남부 앞바다에 뿌려졌다.

덩샤오핑에게 바다는 진출할 시장이자 확장해야 할 영토의 대상이었다. 선박과 물자가 자유롭게 다녀야 할 바다에 대해 덩샤오핑은 ‘일국양제(一國兩制, 한 나라 두 제도)’나 ‘외상투자 기업제도’ 등 창의적이면서도 실사구시적인 정책을 추진하였다. 덩의 정책기조는 수비적이고 폐쇄적 내륙성향에서 개방적이고 공격적인 해양성향으로 전환했고, 자본주의 근성회복을 주창하면서 사회주의 중국 동남부 연해지역에 5개의 자본주의 섬이라고 할 선전과 주하이(珠海) 등과 같은 경제특구를 건설했다. 덩샤오핑이 이루어 낸 것들 중의 또 하나는 1984년 12월 19일 영국과 중국 간에 체결한 중영 공동 선언이다. 이 조약에 따라서 홍콩이 1997년 7월 1일에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되었다. 99년 동안의 조차를 마치는 홍콩에 대하여 덩샤오핑은 향후 50년 간 홍콩의 자본주의 체제를 간섭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덩샤오핑은 1984년과 1987년, 각각 절묘한 홍콩, 마카오 흡수 통치이론인 ‘일국양제(一國兩制)’로써 중국-영국 공동성명과 중국-포르투칼 공동성명을 체결하였다. 중국이 용이라면 여의주로 비견되는 홍콩을 피 한 방울 묻히지 않고 반환받는 위업을 거두었다. 중국학 석학인 존 페어뱅크 미 하버드대 교수도 “덩샤오핑의 개혁·개방 정책은 중국의 유구한 대륙성 전통에서 나온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1974년 1월 덩샤오핑은 이렇다 할 선전포고도 없이 북베트남(월맹)의 시사(西沙, 파라셀) 군도를 순식간에 점령해 하이난다오에 편입시켰다. 또 87년 3월 중앙군사위 주석이던 덩은 난사(南沙, 스프래틀리) 군도마저 삼켰다. 미국과 중국이 가장 첨예하게 충돌하는 곳은 영유권 분쟁이 벌어지는 남중국해다. 남중국해는 중국과 대만 베트남 필리핀 싱가포르 등이 맞닿아 있는 해역이며, 서태평양과 인도양, 중동을 잇는 해상 물류 중심지다. 세계 해양 물류의 약 25%, 원유 수송량의 70%가 이곳을 지난다. 금액으로는 한 해 5조 3000억 달러(약 5954조원)에 달한다. 남중국해는 자원의 보고이기도 하다. 석유 매장량은 최소 110억 배럴, 천연가스는 190조 입방피트로 추정된다.(<한국경제>, 2018.12.30)

2006년 12월 개최된 중국해군 제10차 당 대표대회에서 당시 국가주석 후진타오(胡錦濤)는 <해양대국·해군강국> 건설을 선언했다. 그리고 이듬해인 2007년 9월 중국은 일본과 영유권 분쟁을 빚는 센카쿠(尖閣, 중국명 釣魚島 댜오위다오) 열도는 물론 오키나와 본도를 포함한 류큐(琉球)군도 160여 개 섬을 모두 돌려달라는 주장을 제기했다. 최근 후진타오의 뒤를 이은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은 해양 탐험정신과 글로벌 사고와 앙트러프러너십(entrepreneurship)을 바탕으로 해양굴기 전략을 무섭게 추진하고 있다. 덩샤오핑 이후 중국의 권력은 공산주의 청년단(共靑團), 상하이방(上海幇), 타이즈당(太子黨) 등 3대 계파가 분점하고 있다. 덩샤오핑의 개방정책은 상하이방이자 ‘성장우선론자’인 장쩌민과 공청단으로‘분배강조 개혁파’인 후진타오에 의해 해양화 전략으로 이어졌다. 지금은 타이즈당이자 국가주석인 시진핑의 ‘일대일로(一帶一路, 육로·해상 실크로드)’ 정책이 ‘중국몽 (中國夢)’의 핵심이다. 시진핑 시대의 메가 프로젝트는 ‘일대일로’ 건설이다. 일대일로 정책은 “미국은 1896년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선언한 <새로운 먼로 독트린> 대로 북미와 중남미 신대륙을 맡아라. 중국은 아시아-아프리카-유럽을 아우르는 구대륙의 맹주가 되겠다’라는 선전포고와 같다. 군부를 장악한 시진핑은 특히 해군의 핵심 요직에 측근을 포진시켰다. 좋은 예는 현 중앙군사위 상무위원 8인 중 실세인 해군총사령관 우성리(재임 2006~2017년)다. 시진핑의 부인 펑리위안(彭麗媛)은 해군 소장이다.

중국은 ‘백년의 마라톤’에서 마이클 필스버리가 설명한 대로 국가전략의 핵심으로‘해양책략’을 추진해 오고 있다. 코스코를 중심으로 한 글로벌 해운선대 확충, 선박건조분야 세계 선두 진입, 선전 상하이 칭다오 위하이 등 항만개발을 통해 상전벽해의 변화를 이룩해 왔다. 세계의 공장이자 시장이 되면서 중국은 아프리카를 비롯한 전 대륙에서 육상자원을 수입하기 위한 항로개발이 생명줄임을 절감했다. 이에 국제해로 구축과 함께 인도양 연안마다 진주목걸이 형태로 포진된 거점항만을 확보하는데 국력을 투자하고 있다. 중국은 미국을 상대로 경쟁적으로 전 세계적인 자원ㆍ에너지 전쟁을 벌이고 있으며, 운송수단인 해운능력을 급신장시키고 있다. 영국 해운조사 기관인 ‘베셀스 밸류 (Vessels Value)’에 따르면 해양작업지원선OSV를 포함한 국가의 지배 선대는 2017년 6월 현재 그리스가 3억 6391만 톤(4461척), 중국 2억 5804만 톤(4830척), 일본 2억 4567만 톤(4270척)으로 각각 1, 2, 3위를 차지했고, 독일과 싱가포르가 그 뒤를 잇고 있다. 중국은 막대한 해외자원을 중국의 배에 의해, 중국이 건설해 놓은 전 세계의 항구를 활용해 실어나를 태세이다.

중국은 ‘중국 항공모함의 아버지’로 불리는 류화칭(劉華淸^1916~2011)이 주창한 해양방어선 확대전략인 제1도련과 제2도련을 끝내고, 제3도련을 추진하고 있다. 2008년 북경올림픽개막식과 폐회식에서 ‘중국의 세계 4대 발명품인 종이, 화약, 나침반, 인쇄술’과 ‘15세기 정화의 해양 대 원정’을 핵심행사로 시연하면서‘해양책략’의 야망을 전세계에 거리낌 없이 표출했다. 2010년에는 아편전쟁으로 서구 외세에 의해 통상조약을 맺은 광저우에서 아시안 게임을 개최했다. 이러한 일련의 퍼포먼스는 미국 하버드대 교수이자 철학자였던 조지 산타야나의 말처럼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은 그것을 되풀이하게 운명 지어진다”는 교훈을 실천하는 것 같다. ‘만리장성전략’에서 ‘정화전략’으로의 패러다임 변화는 중국 국가전략에서 BCE(Before Common Era, 공통시대 이전)와 CE(Common Era, 공통 시대)로 연대가 구분될 만큼 획기적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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