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안 공개되자 정계·재계·노동계 '반발'

[주간한국 주현웅 기자]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통계에 따르면 한국은 가입국 중 산업재해 사망률 1위 국가다. 우리 정부 통계로 보면 2001~2017년 산재 사고 피해자가 154만3797명에 달한다. 이 같은 실태를 개선하기 위해 국회가 논의 석상에 올린 법안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중대재해법)이다. 더불어민주당과 정의당 등 범진보 진영 의원들이 저마다의 개선 방안을 담아 해당 법을 발의했다. 다만 그 안에서도 이견이 많았다. 이에 따라 국회는 각 중앙부처 의견을 정리한 ‘정부안’을 구심점 삼아 법안을 재정비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하지만 막상 뒤늦게 제출된 정부안의 포장지를 뜯어보니 되레 더 큰 혼란을 낳았다. 당초 초안보다 책임 및 처벌 수위를 낮춰 진보 진영 및 노동계 반발을 불렀다. 이 와중에 민주당 의원들은 교과서 제1장 격인 ‘산업재해란 무엇인가’ 등 개념 정의에서부터 탁상공론을 벌였다. 그렇다고 재계에서 만족할 만한 수준도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정계와 재계 및 노동계의 서로 다른 목소리만 키웠다. 민주당은 고심은 더 깊어졌다. 여야 합의는 고사하고, 지지층 균열이라는 부작용이 불거진 탓이다.

갈등 키운 정부안

정의당 강은미 원내대표(오른쪽부터), 고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 김용균재단 이사장, 고 이한빛PD 아버지 이용관씨가 30일 여의도 국회에서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촉구하고 있다.
“중대재해 사고의 원인은 복합적이고 기업으로서는 불가항력적인 부분도 있다. 모든 사고 책임을 일방적으로 기업·경영인·원청에게 귀속시키며 과중하게 짓누르는 입법 추진을 중단해 달라.”(2020년 12월 24일, 한국경영자총협회 성명서)

“누더기 법안으로 정말 안전한 나라를 만들 수 있다고 보나. 정부안은 중대재해기업 ‘면제법’이다. 이 같은 정부안은 폐기돼야 마땅하다. 국민 대다수가 동의하고 촉구하는 내용으로 논의를 진행하고 온전하게 즉각 입법화해야 한다.”(2020년 12월 28일, 민주노총 성명서)

국회에서 논의 중인 중대재해법에 관한 재계와 노동계의 평가는 이처럼 극명하게 갈렸다. 두 단체 모두 부적격이란 점에는 의견이 일치했다. 그러나 판단의 배경이 완전히 달랐다. 재계는 “너무 세다”는 입장인 반면 노동계에선 “너무 약하다”고 일갈했다.

경총이 내놓은 논평은 박주민·이탄희·박범계 민주당 의원 등이 발의한 법안을 향한 의견이다. 하지만 경총 관계자는 뒤늦게 공개된 정부안에 대해서도 “입장은 같다”고 <주간한국>에 전했다. 노동계는 정부안이 공개된 뒤 위와 같이 입장을 밝혔다.

앞서 정부는 지난달 28일 중대재해법 정부안, 정확히는 ‘중대재해 기업 및 경영책임자 등의 처벌법’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전까지 국회에서 주요하게 논의됐던 법안의 공식 명칭은 민주당 박주민·이탄희·박범계 의원이 각각 발의한 ‘중대재해에 대한 기업 및 정부 책임자 처벌법’이었다. 법안명에서 ‘정부처벌’을 지운 게 정부안의 특징이다. 말 그대로 중대재해 발생에 따른 처벌 및 책임 주체에서 공무원은 빠지겠다는 것이다.

산업재해는 사후조치보다 예방이 중요하다. 정부와 지자체 등이 관리·감독하는 행위의 본질도 사고를 미연에 방지하려는 데에 있다. 그런 점에서 이 같은 정부안 내용은 재계와 노동계 양측의 불만을 샀다. 재계는 사고 책임을 기업에만 떠넘긴다고 토로하며, 노동계는 사업장 관리 등에 관한 책임이 느슨해질 수 있다고 우려한다.

정부안이 원안보다 완화한 사항은 더 있다. 법 시행 시기를 연장했다. 100인 이상 사업장은 공포 후 1년 뒤, 50~100인 사업장은 2년 뒤, 50인 미만은 4년 뒤로 각각 명시했다. 민주당 의원들이 발의한 초안에는 50인 미만 4년 유예만 담겼다.

처벌 수위도 낮췄다. 정부는 징벌적 손해배상액을 손해액의 '5배 이하'로 제시했다. 초안은 ‘5배 이상’ 혹은 ‘3배 이상 10배 이하’ 등을 담고 있다. 정부는 또 사업주 및 경영책임자 처벌 수위도 '5000만~10억 원 이하'로 제한했다. 초안은 '2년 이상의 유기징역 또는 5억 원 이상의 벌금'이다.

‘인과관계 추정’은 삭제했다. 무죄추정의 원칙 등 헌법에 위배될 수 있다는 법무부 의견이 반영됐다고 알려졌다. 박주민·이탄희 의원 안의 경우 ▲사고 이전 5년간 안전조치의무 관련법을 위반한 사실이 3회 이상 확인되거나 ▲증거 인멸 혹은 사건 현장 훼손 등 조사 내지 수사를 방해한 사실이 확인된 경우 업주는 사고 책임이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중대재해법 통과를 촉구하며 국회에서 단식 농성 중인 고(故) 김용균씨 유족들은 정부안이 공개되자 항의를 쏟아냈다. 김용균씨 어머니 김미숙씨는 “(처벌 수위를) 너무 낮췄다”며 “사람을 살릴 수 없는 법안”이라고 울분을 토했다.

개념 정의도 간신히…갈 길 먼 여야 합의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산재 유가족 및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운동본부 관계자들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을 촉구하는 2400배를 하고 있다.
민주당은 임시국회가 끝나는 오는 8일 안으로 중대재해법을 통과시키겠다고 못박았다. 하지만 실제 법 제정에 속도가 붙을지는 아직 불투명하다.

예컨대 지난달 29일 ‘처음으로’ 열린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소위는 ‘중대재해란 무엇인가’식의 개념 논쟁에만 반나절을 소비했다. 중대재해 기준은 ‘사망자 1명 이상’이라고 정의 내리기까지 꼬박 하루가 걸렸다.

당장 여야는 지방자치단체장과 행정기관장도 책임 주체에 포함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하지만 합의에 이르기까지 아직 갈 길이 멀다. 논란을 빚는 대척점이 많아서다. 특히 영세업주가 다수인 카페, 제과점 등 공중이용시설 적용 여부를 놓고 첨예한 주장이 나오고 있다. 국민의힘은 “소상공인 피해가 우려된다”며 제외하자는 입장이다. 민주당과 정의당은 규모나 면적을 기준으로 한 공중이용시설에는 적용하자는 입장이다. 여당 안에서는 노동자 피해는 산업재해, 시민 피해는 시민재해로 분류해 규제를 적용하자는 안도 거론되고 있다.

‘범진보’에 속한 정의당의 거센 반발도 집권여당의 어깨를 무겁게 한다. 정호진 정의당 수석대변인은 “취지를 무색게 하는 누더기 정부안도 문제인데, 심지어 단일안조차 마련하지 못했다니 어이가 없다”며 “명백한 직무유기”라고 민주당을 비판했다.

이를 두고 국민의힘 관계자는 “민주당은 단일안을 마련하기 어렵고, 현 정부는 경제가 약점으로 꼽히다 보니 당장 노동계가 수긍할 정도의 과감한 정책이 나오긴 힘들 것”이라며 “이런 배경에서 국민의힘은 중대재해법 대원칙에 찬성한다는 이미지를 연출, 민주당 지지층 균열까지 노리면서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는 전략”이라고 전했다.

실제 정부안이 공개된 날 노동계는 정부와 여당을 상대로 한 투쟁을 예고했다. 민주노총은 성명서를 내고 “인과관계 추정의 삭제와 공무원 처벌의 면제 등 핵심이 빠졌다”며 “시민이 발의한 원안이 온전하게 반영된 정부안을 제출하라”고 요구했다. 이어 양경수 민주노총 위원장 당선인이 단식 농성에 돌입했다. 강경투쟁파로 알려진 양 당선인은 “더 이상 일하다 죽지 않는 세상, 노동자 시민이 안전한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며 이 같이 나섰다.

재계의 반발도 잇따를 전망이다. 손경식 경총 회장은 법사위 법안소위 당시 국회를 찾아 독소 조항 제외를 촉구하기도 했다. 손 회장은 올해 신년사에서도 “중대재해법 제정은 기업·경제적 영향 등을 고려하여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고 피력했다. .

한편 이낙연 민주당 대표는 지난달 30일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을 만나 중대재해법 처리에 협조해달라고 제안했다. 이번 회기 내 합의처리를 요청했다고 알려졌다. 이에 김 위원장은 “정부안을 토대로 의원들이 절충해가면 좋겠다”는 답을 내놓은 것으로 전해졌다.

여야는 오는 5일 법사위 법안심사소위를 다시 열어 논의를 이어갈 예정이다.



주현웅 기자 chesco12@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