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2012년 대선 때 ‘여론조사 문구’로 갈등

안철수 서울시장 보궐선거 국민의당 후보(사진=연합뉴스 제공)

후보 단일화가 아름답기는 쉽지 않다. 특히 ‘디테일’에 대한 논의는 갈등의 주된 원인이다. 4·7 서울시장 보궐선거가 한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야권은 단일화 협상에 난항을 겪고 있다. 단일화라는 큰 틀에는 합의했어도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선 이견이 있을 수 있다. 여론조사 방식, 여론조사 문구, 토론회 횟수, 토론회 방식 등에서 의견이 갈리기 쉽다.

2002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당시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와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는 단일화 협상 과정에서 ‘여론조사 문구’를 두고 치열하게 대립했다. 2012년 대선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상대로 여론조사 문구에 이견을 좁히지 못했던 안철수 무소속 후보는 급기야 후보직을 사퇴했다. 이때 문 후보는 "악마는 디테일 속에 있다"며 단일화를 한 마디로 요약했다. 그래서 서울시장 야권 후보들 간의 ‘아름다운 단일화’가 성사될 수 있을지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디테일’이 뭐길래
4·7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나선 오세훈 국민의힘 후보와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가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두 후보가 크게 대립하는 지점은 ‘여론조사 문구’다. 자신에게 유리한 문구를 여론조사 질문에 설정하기 위한 기싸움이다.

오 후보는 ‘적합도’를 밀고 있다. ‘어느 후보가 야권 단일후보로 적합하다고 생각하느냐’는 것이다. 안 후보는 ‘경쟁력’을 내세우고 있다. 안 후보 측은 '여당 후보를 상대로 누가 경쟁력이 있느냐'는 질문이 유리하다고 보고 있다. 그밖에 협상 쟁점은 △투표 방식 △단일화 이후 소속 정당(기호) △토론회 횟수 △토론회 방식 등이다.

양측 실무협상단은 디테일을 놓고 첨예하게 갈등을 벌이고 있지만 후보들은 큰 틀 내에서 속전속결로 합의에 나설 태세다. 두 후보는 지난 7일 서울 모처에서 90분간 ‘맥주 회동’을 가지며 ‘아름다운 단일화’의 시작을 알렸다. 이에 대해 오 후보는 지난 8일 한 라디오 방송에서 안 “(단일화 협상에서) 큰 물꼬를 터주는 역할은 우리 둘이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말을 주고받았다”고 전했다. 안 후보도 이날 오전 최고위원회의 후 기자들과 만나 “만약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합의가 잘 안 되면 후보들이 나서서 풀자, 이런 이야기들에 서로 공감대를 이뤘다”고 전했다. 현재까지 합의된 사항은 비전 발표회 개최와 서울시 공동운영을 위한 양당 정책 협의체 구성 등이다.

2002년, 2012년엔 어땠나
2002년 대선 때 후보 단일화도 여론조사 문구로 갈등을 빚었다. 노 후보는 ‘어느 후보를 선호하느냐’고 묻는 적합도 문구를, 정 후보는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와 맞붙어 누가 더 경쟁력이 있느냐’고 묻는 경쟁력 문구를 포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치열한 협상 끝에 최종 여론조사 문구는 '이회창 후보와 경쟁할 단일 후보로 노무현·정몽준 후보 중 누구를 지지하느냐'는 절충안이 채택됐다.

2012년에도 비슷한 사례가 있었다. 다만 단일화가 ‘반쪽짜리 단일화’라는 한계점은 있었다. 대선 당시 문 후보는 ‘적합한 후보’ 문구를, 안 후보는 ‘이길 수 있는 후보’ 문구를 여론조사 문항에 넣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두 후보는 이견을 좁히지 못했고 결국 안 후보의 후보직 사퇴로 마무리가 됐다. 당시 안 후보는 기자회견 열고 "문재인 후보와 이견을 좁히지 못하고 제 마지막 중재안은 합의를 이끌어 내지 못했다”며 “여기서 더 이상 단일화 방식을 놓고 대립하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며 사퇴 이유를 밝혔다. 이에 대해 한 정치평론가는 “‘반쪽짜리 단일화’로 인해 안 후보 지지층이 문 후보 지지층으로 흡수되지 않았다”며 “덕분에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가 어부지리로 당선될 수 있었다”고 분석했다.

그 이후 달라진 안철수
2012년처럼 여론조사 문구로 후보간 갈등이 있다 해도 올해 보궐선거에서는 후보들간의 표면적인 기싸움이 연출되지 않고 있다. 특히 단일화를 여러 번 겪은 안 후보가 이번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도 눈길을 끈다. 안 후보는 ‘선의의 경쟁’, ‘감동적인 단일화’ 등을 언급하며 성공적인 단일화에 대한 절실함을 드러내고 있다. 한 정치평론가는 “안 후보는 두 차례의 단일화 모두 결과적으로 실패했기 때문에 이미지 개선이 필요하다”며 “국민의힘에 대한 유화적인 태도는 선거 전략의 일환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달 28일 “국민의힘 후보가 단일후보가 안 된다는 것을 상상해본 적이 없다”며 미묘한 신경전을 벌일 때에도 안 후보의 태도는 차분했다. 그는 지난 1일 “이번 선거는 야권 전체가 힘을 합치지 않으면 여당을 이기기 힘든 선거”라며 “힘을 합치기 위해 원만하고 아름다운 단일화 과정이 필수적이다. 그런 부분들에 대해 (김 위원장과 만나) 말씀을 나눌 기회가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안 후보는 오 후보에게도 긍정적인 메시지를 남기고 있다. 안 후보는 지난 11일 최고위원회의에서 “손흥민 선수에게는 케인이라는 훌륭한 동료가 있고, 손기정 선생에게는 남승룡이라는 고독한 레이스를 함께 한 동지가 있었다”며 “국민의당과 국민의힘은 그런 관계”라고 말했다. 이어 오 후보를 향해 “국민이 바라는 아름답고 감동적인 단일화를 이뤄내자”고 제안했다.

노유선 기자



노유선기자 yoursun@hankooki.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