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미’ 박지원과 ‘깜짝 임명’ 성 김

미국 방문하는 박지원 국정원장. (사진=연합뉴스 제공)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의 한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우리 정부의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가 사실상 ‘리부팅’했다. 지난 26일 박지원 국가정보원장의 방미는 그런 점에서 가장 주목되는 대목이다.

박 원장은 우리 정부의 남북 관계 관련 핵심 인사이지만 이번 한미 정상회담에 동행하지 않았다. 2018년 첫 북미 정상회담을 성사하는 데 앞장선 현 서훈 국가안보실장(당시 국정원장)과 정의용 외교부 장관(당시 국가안보실장)은 이번 정상회담에 동행했었다.

박 원장까지 방미하면서 한미간 정보라인을 통한 협상의 물꼬를 트기 위한 움직임에 나설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바이든 정부는 외교라인을 통한 북한과의 협상을 희망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보지 못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이 외교적 접근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 상황은 자연스럽게 정보기관 비선라인을 통한 접촉 시도의 가능성을 높인다.

일각에서는 박 원장의 뉴욕 방문을 유엔(UN)주재 북한 대표부와 접촉하려는 의도로도 풀이했지만 이는 현실성이 낮다. 외교가에 따르면 최근 북한 대표부 인사들은 좀처럼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대북 핫라인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박 원장이 굳이 뉴욕을 찾을 이유가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오히려 한국의 정보라인을 이용한 미국의 대북 접촉 시도 가능성을 예상해 볼 수 있다. 미 중앙정보국(CIA)은 2017년 설립한 코리아미션센터를 통해 북미 정상회담에 깊숙이 개입했다. 당시 앤드루 김 센터장은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부 장관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회담에도 배석했었다.

존 메릴 전 미국 국무부 정보조사국(INR) 동북아분석실장은 북한이 한국에 한미 정상회담 브리핑을 요청할 수도 있다고 예상했다. 이 경우 북한의 카운트 파트는 외교라인보다는 정보 당국이 될 가능성이 크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한미 정부당국자 간의 긴밀한 협의가 있을 수 있다는 평가다.

미국은 한미 정상회담 과정에서 북한을 자극하는 행보는 극히 자제했다. 두 대통령이 한국전 참전 용사 랠프 퍼켓 예비역 대령에 대한 명예훈장 수여식에 참석했지만 북한과 싸웠다는 발언은 나오지 않았다. 퍼켓 대령은 중국군과 맹렬하게 싸운 영웅으로만 그려졌다.

공동기자회견과 공동선언문에 대만이 거론되며 중국을 일정부분 자극했지만 북한에 대한 비난 수위는 극히 제한됐다. 미국이 대북정책 재검토를 마무리 한 시점에서 북한을 자극하는 행보는 극도로 자제하며 대화의 동력을 유지하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성 김 국무부 대북특별대표 임명은 바이든 대통령이 둔 ‘신의 한수’가 될 수도 있다. 바이든 대통령은 법에 규정된 대북 인권특사 임명 대신 북한과의 협상을 위한 대북 특별대표를 먼저 임명했다. 그것도 북한에 친숙한 인사인 성 김 인도네시아 주재 미국 대사를 앞세웠다.

트럼프 전 정부의 대북 협상에 참여했던 성 김 대표는 인도네시아 대사직을 수행하던 중 바이든 정부 출범과 함께 국무부 동아태차관보 대행을 맡아왔다. 이제 그는 인도네시아로 복귀하면서 북한과의 협상이라는 중요한 임무를 추가로 받았다.

국무부는 성 김 대표가 인도네시아 대사직을 겸임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미국이 북한과의 협상을 차순위로 두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들기도 했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와 북한의 관계를 고려하면 그의 대북특별대표 임명과 겸직이 크게 어색하지 않다. 오히려 그가 인도네시아 대사와 대북특별 대표를 동시에 맡는 것은 북미 대화에 상승 요인이 될 수 있다.

인도네시아는 북한과 수교국이다. 자카르타에는 북한 대사관도 있다. 성 김 대표가 눈에 띄지 않게 북한과 접촉하는 것이 쉽다. 대북 특별대표가 미국이 아닌 아시아에 근무 중이라는 점은 언제든 북한과의 교섭에 나서기 쉬운 환경을 만들고 있다.

성 김 대표의 임명 발표 후 북한이 부정적인 반응을 아직까지 내비치지 않는 것도 이와 연계해 볼 수 있다. 외교가 인사들은 트럼프 정부 시절 스티븐 비건 대북 특별대표가 협상 타결을 위해 동분서주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가 소지하고 다녔던 두툼한 서류철은 항상 관심의 대상이었다. 전문 외교관이 아닌 비건 대표는 창의적인 외교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됐지만 톱다운식 협상에서 그의 역할은 한계가 분명했다. 이제 숙제는 성 김 대표의 몫이다.

성 김 대표의 임명은 미국이 싱가포르 합의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의미를 부여하는 효과도 기대된다. 성 김 대표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에 앞서 판문점에서 북한과 협상을 주도했다. 자신이 직접 개입한 싱가포르 선언의 의미와 북한의 입장을 누구보다도 잘 이해할 수밖에 없다. 그의 임명은 미국이 국가 대 국가로 합의한 싱가포르 선언을 부정하지 않겠다는 신호를 북한에 보낸 것이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바이든 정부가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을 담은 것도 바이든 정부가 대북 정책을 틀을 마련했다는 인식을 내보인다.

바이든 정부 출범 초기 당국자들은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을 혼재해 사용했다. 이에 대해 논란이 확산되자 미 측은 북한 비핵화 대신 한반도 비핵화라는 표현으로 통일해왔다. 최근 미 인사들이 한반도 비핵화라는 용어를 사용하게 된 배경이다.

이는 미 측이 북한의 입장을 파악해 반영한 것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미국은 대북 정책 재검토 과정에서 과거 정부의 경험을 청취했다. ‘전략적 인내’를 표명한 오바마 행정부, ‘톱다운 방식’의 외교를 추진했던 트럼프 행정부 인사들의 의견이 모두 반영된 것이라 볼 수 있다.

바이든 정부는 자신들의 대북 정책이 전략적 인내도 아니고 도박은 더욱더 아니라는 입장이다. 사실상 새로운 해법을 시도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미국의 입장 변화 중 가장 눈에 띄는 부분은 제재 강화에 대한 언급이 사라졌다는 점이다. 토니 블링컨 국무부 장관은 지난 2월만 해도 대북 제재를 강화할 수도 있다고 했지만 미묘한 변화를 보였다.

그는 한미 정상회담 후 ABC 방송과 인터뷰하며 “미국은 북한과의 외교적 관여에 준비돼 있다”면서 “공은 북한에 있다”고 언급했다. 이 역시 북한을 대화로 유도하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이제는 북한이 공을 다시 미국에 넘길 때다.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미 관계가 공고해진 만큼 북한이 던진 공이 한국을 거쳐 미국으로 넘어간다면 더 큰 효과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북한도 인정해야 할 때다.

백종민 아시아경제 뉴욕특파원



백종민 아시아경제 뉴욕특파원 cinqange@asia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