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군대를 필요로 했을 때 귀하께서는 장교로 투신했습니다. 한국이 현대경제를 위해 기업인을 찾았을 때 귀하께서는 기업인이 되었습니다. 한국이 미래의 비전을 필요로 할 때 귀하께서는 정치인이 되었습니다. 한국에 봉사하고 또 봉사하는 것, 그것이 귀하의 삶에는 끊임없는 지상명령이었습니다" - 1990년 11월 16일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이 바친 헌사

금주의 최대 이슈는 '철(鐵)의 사나이'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의 별세 소식이었다. 1960~70년대 한국의 경제발전ㆍ산업화를 박 명예회장과 함께 경험했던 이들은 한 주간 그를 기억했고, 추모했으며,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84세로 영면에 든 박 명예회장의 빈소에는 이명박 대통령, 전두환 전 대통령, 박근혜 전 한나라당 대표, 손학규 민주당 대표,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안철수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 박원순 서울시장 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찾아와 그의 마지막 길을 애도했다.

조국에의 충성(두 번의 부름)

박태준 명예회장은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라는 좌우명을 항상 가슴에 품고 살아왔다.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도 "포스코가 국가산업의 동력이 되어서 대단히 만족스럽다. 더 크게 성장해 세계 최강의 포스코가 되길 바란다. '애국심'을 가지고 일해 달라"는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 그만큼 박 명예회장의 인생은 그만의 것이 아니었다. 군인에서 경제인으로, 다시 정치인으로 이어진 삶의 변곡점에는 조국을 대표하는 박정희, 전두환 전 대통령 두 사람의 부름이 있었다.

박 명예회장과 박정희 전 대통령은 스승과 제자로 처음 만났다. 박 명예회장이 1948년 6기로 졸업했던 남조선경비사관학교(오늘날의 육군사관학교)의 중대장이자 선생님으로 박 전 대통령이 있었던 것이다. 5.16 군사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박 명예회장을 의장비서실장으로 발령했고 두 사람은 계속 인연을 이어갔다.

이명박 대통령이 14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을 찾아 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빈소에 청조근정훈장을 올리고 있다.
재미있는 점은 오늘날 보편적으로 박 전 대통령의 '영예'로 평가되는 공적의 자리에는 박 명예회장의 영예도 함께 빛났지만, 박 전 대통령의 '음영'으로 평가되는 과오의 자리에서는 박 명예회장의 모습을 발견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는 박 전 대통령이 박 명예회장을 어떻게 생각하고 대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대목이다.

1963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하고 이듬해 텅스텐 수출업체인 대한중석 사장으로 변신한 박 명예회장에게 종합제철소 건설 임무를 부여한 것도 박 전 대통령이었다. 당시 자본, 기술, 경험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두 사람은 포항 영일만에 제철소 건립을 꿈꿨고 3년여의 공사 끝에 마침내 포항제철 증후판공장에서 첫 제품이 출하됐다.

박 명예회장이 인사청탁, 리베이트 요구 등 설비공급사나 정치권의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배경에 박 전 대통령의 신임이 있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청와대 실세인 박종규 경호실장의 압박을 참다 못한 박 명예회장은 당시 정치권의 압력 배제, 설비 공급업자 선정의 재량권 인수 등을 골자로 하는 내용을 메모에 적어 전달했고 박 대통령은 그 메모에 친필 사인을 해서 돌려줬다. 이후 "박태준을 건드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내용으로 소위 '종이마패'로까지 불리운 이 메모는 박 명예회장에게 보내는 박 전 대통령의 신뢰와 지원의 상징으로 전해져 왔다.

경제인으로서 최고의 자리에 오른 박 명예회장을 정치권으로 부른 것은 육사 후배였던 전두환 전 대통령이었다. 1980년 신군부가 주도한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입법회의에 경제분과위원장으로 참여한 박 명예회장은 이듬해 제11대 국회위원(민정당 전국구)으로 정치계에 입문한다.

박 명예회장의 정치 인생은 경제인으로 있을 때처럼 순탄치만은 않았다. 3선 경력을 쌓고 1990년 집권여당의 민정당 대표까지 올랐지만 며칠 만에 이뤄진 '3당 합당' 이후 박 명예회장의 정치인생은 시련을 맞이했다.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내각제 대선공약화'를 요구하다 김영삼 대선후보와의 관계가 틀어진 것이다.

결국 박 명예회장은 대선 직전 민자당을 탈당했고 문민정부 출범 직후인 1993년에는 포항제철 명예회장직 박탈, 수뢰 및 뇌물수수 혐의 기소 후 일본 망명 등 굴곡진 정치인생을 경험하게 된다. 이후 국민의 정부 때인 2000년 '21세기 첫 총리'로 발탁됐지만 조세 회피 목적의 부동산 명의신탁 의혹이 불거져 결국 4개월 만에 불명예 퇴진했다. 이를 마지막으로 박 명예회장은 "정치에 환멸을 느꼈다"며 끝내 현실 정치에 등을 돌렸다.

끊임없는 도전과 완벽주의

군인ㆍ경제인ㆍ정치인이라는 다양한 이력을 지닌 박태준 명예회장이지만 세상은 그를 무에서 유를 창조한 '철강왕'으로 기억하고 있다. 1968년 초기 자본금 140억원으로 세운 포항제철주식회사를 철강회사 중 시가총액 세계 1위, 생산량 세계 4위로 키운 것은 전적으로 박 명예회장의 도전정신과 완벽주의였다.

박 명예회장의 도전정신은 제철소 설립 때부터 드러났다. 당시 아무것도 없었던 그가 의지할 것은 차관뿐이었다. 하지만 예정됐던 국제제철차관단(KISA)의 자금 제공이 '후진국인 한국이 제철사업을 하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는 세계은행(IBRD)의 부정적 전망으로 무산되자 박 명예회장은 파격적인 방안을 계획했다. 농어업분야에만 사용하기로 돼 있었던 대일청구권자금을 전용한다는 내용이었다. 박 명예회장은 일본의 정ㆍ재계 유력인사들을 직접 만나 설득했고 마침내 1970년 연산 103만톤 조강 규모의 일관제철소 1기 설비 착공에 들어갈 수 있었다. 착공 당시 박 명예회장이 직원들을 모아놓고 "이 제철소는 식민지배에 대한 보상금으로 받은 조상의 혈세로 짓는 것이니 만일 실패하면 바로 우향우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한다는 각오로 일해야 한다"고 강조한 일화는 유명하다.

박 명예회장의 완벽주의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는 1977년 8월 발전송풍설비 폭파 사건이다. 공사 현장을 돌아보던 박 명예회장은 10cm 가량 콘크리트가 덜 쳐진 불량 부분을 발견하고 이미 80% 공정이 진행된 발전송풍설비를 폭파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이튿날 건설현장에 있는 모든 임직원, 간부, 외국인 기술감독자들을 모아놓고 다이너마이트로 설비를 폭파했다. 그때까지 투입한 인력, 자재, 공기 등에서 적지 않은 손실을 보았지만 '포항제철의 사전에 불량시공은 없다'는 값진 무형의 자산을 얻게 됐다. 1983년 광양제철소 호안공사 시공 때에는 감사팀 직원들에게 스쿠버 장비를 갖추게 한 뒤 바닷속에서 13.6km 호안의 돌을 일일이 확인해 불량시공을 점검하기도 하는 등 박 명예회장의 완벽주의는 이후로도 이어졌다.

박 명예회장의 도전정신과 완벽주의는 해외에서 더 큰 인정을 받았다. 1978년 당시 중국의 최고 실력자였던 등소평이 일본의 기미츠제철소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나야마 요시히로 당시 신일본제철 회장에게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했다가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느냐"라는 대답을 들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다.

완전무결한 청렴함

박태준 명예회장을 가장 빛내는 것은 그의 완전무결한 청렴함이었다. 경영능력을 견줄만한 이들은 많지만 박 명예회장만큼 검소한 길을 걸었던 이는 단 한 명도 찾을 수 없으리라는 게 재계의 공통된 시각이다.

1988년 6월 유가증권시장에 상장된 포스코의 주가는 시초가와 비교해 10배 이상 올랐다. 올해 3분기까지 매출 50조2,000억원, 영업이익 4조4,000억원을 기록한 포스코는 '가치투자의 달인' 워렌 버핏도 "미국 이외의 지역세 10억달러 이상을 투자하는 기업은 3~4개 정도인데 포스코가 그 중 하나"라고 하며 4.5%의 지분을 갖고 있을 정도로 높은 가치를 지닌 회사다. 그러나 박 명예회장은 설립 이후 포스코 주식을 단 한 주도 보유하지 않았다.

박 명예회장 유족 측 대변인을 맡은 김명전 삼정KPMG 부회장은 지난 13일 서울 연세대 신촌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된 빈소 앞에서 "박 회장 본인 명의의 재산이나 유산이 전혀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밝혔다. 이어 "박 명예회장은 (예전부터) 개인적으로 재산을 많이 갖고 있지 않았다"며 "최근까지 큰딸의 집에서 살면서 생활비도 자제들의 도움으로 마련해왔다"고 전했다.

박 명예회장의 청렴을 보여주는 가장 큰 일화는 일본 미쓰비시 그룹과의 인연으로 탄생한 거양해운의 탄생 비화다. 거양해운은 미쓰비시 그룹이 1990년대 초 과거 20년 동안 포스코가 제철 설비를 가장 많이 팔아준 데 대한 답례 차원에서 박 명예회장에게 준 선물이었다. 미쓰비시 은행이 돈을 출자해 화물선을 건조하고 화물 알선도 책임지겠으니 그 수익금을 전액 박 명예회장이 관리하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당시 박 명예회장은 개인적으로 받을 수 없다며 지배주주를 포항공대 재단으로 해 거양해운을 설립, 수익금 전액을 장학재단에 들어가도록 했다.

박 명예회장의 빈소를 찾은 박원순 서울시장이 "강철의 이미지를 갖고 계신 분이지만 따뜻하게 세상을 포용했던 사람"이라며 꺼낸 사연도 언론의 주목을 끌었다. 박 서울시장은 "아름다운 재단을 운영하던 2000년대 초반부터 알고 지냈는데 당시 박 명예회장이 아현동 자택을 매각하고 그 돈을 기부했다"며 "10억원 가량의 금액을 청년의 미래를 위해 써달라고 했다"고 전했다.

빈소를 찾은 이재용 삼성전자 사장은 "스티브 잡스가 IT산업에 기여한 것보다 우리사회에 더 큰 역할을 하신 분"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박 명예회장은 한국 경제의 토대를 닦은 기업인상에 순연한 불굴의 정신, 애국심이라는 무형의 자산을 남긴 우리 시대의 거목이다.

"미치광이 안되면 아무것도 못 이룬다"

● 박태준 말 말 말

박태준 명예회장은 말보다는 행동으로 모범을 보였지만 그만큼 한마디 말을 꺼낼 때마다 간결하면서도 힘 있는 어록을 남겼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짧은 인생을 영원 조국에. 절대적 절망은 없다(좌우명)

▲철은 산업의 쌀이다. 싸고 좋은 품질의 철을 충분히 만들어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것, 이것이 곧 제철보국이다.

▲사람은 미치광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가 아니면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나는 많은 시간을 사람 문제에 골몰한다. 기업은 사람이 하는 것이고, 사람만이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다.

▲이 돈은 우리 조상님들의 피 값이다. 공사를 성공하지 못하면 우리 모두 다 우향우해서 저 포항 앞바다에 빠져 죽자.(대일청구권 자금으로 포항제철 건설에 나서면서)

▲무엇인가를 이루려면 10년은 걸린다. 몇 날 밤이고 진지하게 10년 후의 청사진을 그려 보라. 인생은 집을 짓는 것과 같아서 청사진이 나와야 주춧돌을 놓을 수 있다.

▲이 땅에서 태어난 것 그 자체가 큰 인연이다. 나에게 일관제철소를 만드는 일이 주어졌을 때, 나는 회피할 수 없는 사명감을 느꼈으며 경건한 마음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박정희와 각별한 인연, 김영삼과는 정치적 악연

●박태준 누구인가

▲1927년 경남 동래군 장안면(현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 임랑리에서 박봉관(父)과 김소순(母)의 6남매 중 장남으로 출생.

▲1944년(17세) 일본 와세다대 공대로 진학 결심.

▲1946년(19세) 와세다대 기계공학과 2년 마치고 중퇴.

▲1948년(21세) 귀국 후 부산 국방경비대에 자원, 남조선경비사관 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6기로, 제2중대장으로 탄도학을 강의하던 박정희 당시 대위와 첫 대면.

▲1953년(26세) 육군중령으로 5사단 참모. 5사단의 지리산 잔비토벌작전을 위한 부대이동작전 수립 뒤 11월 육군대학 입교.

▲1954년(27세) 육군대학 수석 졸업, 장옥자와 결혼.

▲1957년(30세) 박정희 장군(1군단 참모장)과 재회.

▲1961년(34세) 육군본부 경력관리기구 위원으로 근무 중 5.16 발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

▲1963년(36세) 미국 유학 준비, 육군소장으로 예편.

▲1964년(37세) 박정희의 강력한 요청으로 미국 유학 포기, 대한중석 사장으로 발령.

▲1965년(38세) 대한중석 흑자체제로 전환. 일본 최고 제철소 가와사키제철소 견학, 종합제철 프로젝트에 관심.

▲1967년(40세) 종합제철건설사업추진위원장에 임명, 박정희의 '제철공장 완수' 특명.

▲1968년(41세)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 사명 확정(영문 약자표기 'POSCO'), 초대 사장 취임.

▲1969년(42세) 차관 도입 무산, 대일청구권 제철소 건설자금으로 전용 추진.

▲1970년(43세) 포항1기 건설착공, 열연공장, 중후판공장 착공.

▲1971년(44세) 제선공장, 제강공장 등 주요 공장 착공.

▲1972년(45세) 영일만의 첫 공장으로 증후판공장 준공, 첫 제품 출하.

▲1973년(46세) 제1고로 첫 출선 성공, 일관 종합제철공장 완공(연산 조강 103만t 체제), 포항2기 건설 종합착공.

▲1981년(54세) 포철 초대 회장 취임, 제11대 국회의원 민주정의당(민정당) 비례대표 당선.

▲1985년(58세) 포항공과대학교 설립 착수.

▲1990년(63세) 민정당 대표 취임.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의 3당 합당으로 민주자유당(민자당) 출범, 최고위원 취임.

▲1992년(65세) 광양 4기 설비 종합준공. 포철회장 사퇴 및 명예회장 추대. 민자당 탈당.

▲1993년(66세) 해외 유랑, 포철 세무조사로 본인, 가족, 친인척, 측근들에 대한 전방위 비자금 조사.

▲1997년(70세) 5월 초 귀국, 포항 북구 보궐선거 당선, 김대중-김종필(DJP) 연대, 자민련 총재 취임.

▲2000년(73세) 자민련 총재 사퇴, 국무총리 취임과 사임, 포철 민영화 완료.

▲2001년(74세) 폐 밑 물혹 제거수술, 포철 명예회장 재위촉.

▲2005년(78세) 포스코청암재단 확장 설립.

▲2008년(81세) 포스코청암재단 이사장(현).

▲2011년 12월 13일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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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