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최근 학생들이 왜 학교 폭력을 경찰(공권력)보다 두려워 하는지와 학부모조차 학교 폭력에 노출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심각한(?) 사건이 생겼다.
서울 종암경찰서는 같이 어울려 다니던 친구를 상습 폭행한 중학생 다섯 명을 검거했다고 지난달 30일 발표했다. 그러나 비골(코뼈) 골절상으로 전치 4주 진단을 받은 피해자인 성북구 모 중학교 3학년 박모(15) 군은 자신이 매를 맞는 동영상을 보면서 "제가 정신을 잃으니까 깨우려고 때린 거에요"라고 폭행당한 사실을 부인했다. 이 동영상을 근거로 박모군을 때린 가해자를 붙잡은 경찰은 박 군의 진술에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다. 학교 폭력에 노출돼 코뼈가 부러질 정도로 구타를 당했는데도 피해자는 "제가 먼저 기절놀이를 하자고 했어요"라고 진술한 것이다.
하지만 박 군은 누가 뭐래도 피해자였고, 아직 어린 탓에 경찰 조사에서 진술을 수 차례 뒤집었다. 또 진술 도중에 울음을 터뜨리는 등 감정(분노)과 공포(또다른 폭력)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직도 정신적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게 전문가의 진단이다.
경찰 조사 결과, 가해자 황모 군 패거리는 피해자 집을 무단 침입해 박 군의 할머니까지 협박했다. 학교 폭력의 손길이 할머니에게까지 뻗치자 박 군은 더 이상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선지 박 군은 경찰서에서도 학교 폭력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진술하지 못했다. 학부모와 교사의 애정만으로 학교 폭력이 사라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다.
평소 학교에서 '왕따' 취급을 당했던 박 군은 지난해 태권도장에서 황 군을 만났다고 한다. 황 군은 평소 학교 폭력과 금품 갈취로 강제 전학 처분을 받아 학교를 세 군데나 다닐 수밖에 없었던 문제아. 황 군은 지난해 12월 20일 박 군을 패거리에 합류시켰으나 박 군이 약하고 가장 늦게 가담했다는 이유로 상습적으로 폭행했다.
우두머리였던 황 군은 약속시각에 늦거나 거짓말한 친구를 무차별 폭행했다. 폭력을 통해 복종심을 강요했던 황 군은 친구끼리 싸우게 한 뒤 승패에 따라 패거리 서열을 정하는 등 조직 폭력배 흉내를 내기도 했다.
박 군 폭행 사건이 불거진 것은 지난해 12월 31일께. 흥청거리는 연말 분위기를 타고 함께 어울려 다니던 황 군 패거리들이 박 군에게 망을 보라고 한 뒤 담배를 피우다 어른에게 들키자 '망도 제대로 못본다'며 박 군의 얼굴을 심하게 때렸다.
얼굴이 빨갛게 부은 모습을 본 박 군의 할아버지는 자초지종을 캐물었다. 부모가 이혼한 뒤 조부모와 함께 사는 박 군에게 할아버지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 화가 치민 할아버지는 지난달 4일 황 군 패거리를 불러 "우리 ○○와 어울리지 마라"고 훈계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훈계는 오히려 손자에게 독이 됐다.
폭행 사실을 할아버지에게 알렸다는 이유로 황 군 패거리는 담을 넘어 박 군 집에 무단 침입해 병상에 누워 있던 할머니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겁에 질린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부르러 간 사이 이들은 박 군을 주변에 있던 아파트 지하 주차장으로 끌고 갔다.
패거리는 대걸레 자루와 우산으로 박 군의 온몸을 구타했다. 그들은 박 군의 몸에 올라타 얼굴을 때리는가 하면 몽둥이로 박 군의 무릎과 정강이를 때렸다. 피해자 머리를 왼쪽 발로 밟고 올라서 오른쪽 발로 얼굴을 걷어차기도 했다. 이렇게 맞다 보니 코뼈가 부러질 수밖에 없었다. 또 라이터 불을 엉덩이에 대는가 하면 패거리 중 최 군은 구타 장면을 휴대전화 영상통화로 여자친구에게 생중계했다.
황 군 등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집에 가면 어른들이 (폭행 사실을)알게 된다'며 이틀간 박 군을 감금했다. 겨우 풀려난 박 군은 지난달 6일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경찰서를 찾았다. 그러나 무자비한 학교 폭력에 길든 박 군은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가해자를 두둔할 정도로 하는 등 정서가 불안했다.
박 군이 경찰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황 군 패거리의 귀에도 들어갔다. 황 군이 피해자가 입원한 병원을 수소문한다는 첩보에 경찰은 보복 범죄 예방 차원에서 황 군 등 세 명을 지난달 27일 검거했다. 경찰은 황 군 패거리가 폭행하는 장면이 담긴 폐쇄회로 TV를 확보한 뒤 황 군 등을 집단 폭행 및 감금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황 군을 붙잡은 경찰 관계자는 "가해 학생들이 대부분 폭력적인 인터넷 게임을 평소 즐겼다"면서 "CCTV를 보면 일반인으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잔인하게 폭행하는 장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학교 폭력의 심각성을 인지한 경찰 관계자는 "앞으로 학교 폭력에 신속하고 단호하게 대처하겠다"고 말했다.
현재 박 군은 서울경찰청 범죄피해자 케어센터에서 심리 상담 치료를 받고 있고, 경찰은 황 군 패거리가 다니는 학교를 대상으로 다른 피해자가 있는지 조사하고 있다.
이상준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