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폭력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 지난해 12월 20일 발생한 소위 '대구 중학생 자살 사건' 이후 도를 넘는 학교 폭력 사건이 각종 매체를 통해 쏟아지고 있다. 이주호 교육과학기술부 장관이 새해들어 "무엇보다도 학생에 대한 교사와 학부모의 열의, 애정이 필요하다"고 말하자 '교육장관의 자녀가 피해자였다면'이란 칼럼(한국일보 1월 16일자)이 나오기도 했다. 학교 폭력을 경험한 학부모와 교사라면, 누구보다도 '열의, 애정을 갖고' 학교 폭력이라는 괴물과 싸우고 있는데, 교육 수장이 현실을 제대로 파악조차도 못해 안타깝다는 게 칼럼 내용이었다.

그런데 최근 학생들이 왜 학교 폭력을 경찰(공권력)보다 두려워 하는지와 학부모조차 학교 폭력에 노출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심각한(?) 사건이 생겼다.

서울 종암경찰서는 같이 어울려 다니던 친구를 상습 폭행한 중학생 다섯 명을 검거했다고 지난달 30일 발표했다. 그러나 비골(코뼈) 골절상으로 전치 4주 진단을 받은 피해자인 성북구 모 중학교 3학년 박모(15) 군은 자신이 매를 맞는 동영상을 보면서 "제가 정신을 잃으니까 깨우려고 때린 거에요"라고 폭행당한 사실을 부인했다. 이 동영상을 근거로 박모군을 때린 가해자를 붙잡은 경찰은 박 군의 진술에 어안이 벙벙해질 수밖에 없었다. 학교 폭력에 노출돼 코뼈가 부러질 정도로 구타를 당했는데도 피해자는 "제가 먼저 기절놀이를 하자고 했어요"라고 진술한 것이다.

하지만 박 군은 누가 뭐래도 피해자였고, 아직 어린 탓에 경찰 조사에서 진술을 수 차례 뒤집었다. 또 진술 도중에 울음을 터뜨리는 등 감정(분노)과 공포(또다른 폭력)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아직도 정신적인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게 전문가의 진단이다.

경찰 조사 결과, 가해자 황모 군 패거리는 피해자 집을 무단 침입해 박 군의 할머니까지 협박했다. 학교 폭력의 손길이 할머니에게까지 뻗치자 박 군은 더 이상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 그래선지 박 군은 경찰서에서도 학교 폭력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진술하지 못했다. 학부모와 교사의 애정만으로 학교 폭력이 사라질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예다.

평소 학교에서 '왕따' 취급을 당했던 박 군은 지난해 태권도장에서 황 군을 만났다고 한다. 황 군은 평소 학교 폭력과 금품 갈취로 강제 전학 처분을 받아 학교를 세 군데나 다닐 수밖에 없었던 문제아. 황 군은 지난해 12월 20일 박 군을 패거리에 합류시켰으나 박 군이 약하고 가장 늦게 가담했다는 이유로 상습적으로 폭행했다.

우두머리였던 황 군은 약속시각에 늦거나 거짓말한 친구를 무차별 폭행했다. 폭력을 통해 복종심을 강요했던 황 군은 친구끼리 싸우게 한 뒤 승패에 따라 패거리 서열을 정하는 등 조직 폭력배 흉내를 내기도 했다.

박 군 폭행 사건이 불거진 것은 지난해 12월 31일께. 흥청거리는 연말 분위기를 타고 함께 어울려 다니던 황 군 패거리들이 박 군에게 망을 보라고 한 뒤 담배를 피우다 어른에게 들키자 '망도 제대로 못본다'며 박 군의 얼굴을 심하게 때렸다.

얼굴이 빨갛게 부은 모습을 본 박 군의 할아버지는 자초지종을 캐물었다. 부모가 이혼한 뒤 조부모와 함께 사는 박 군에게 할아버지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 화가 치민 할아버지는 지난달 4일 황 군 패거리를 불러 "우리 ○○와 어울리지 마라"고 훈계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훈계는 오히려 손자에게 독이 됐다.

폭행 사실을 할아버지에게 알렸다는 이유로 황 군 패거리는 담을 넘어 박 군 집에 무단 침입해 병상에 누워 있던 할머니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겁에 질린 할머니가 할아버지를 부르러 간 사이 이들은 박 군을 주변에 있던 아파트 지하 주차장으로 끌고 갔다.

패거리는 대걸레 자루와 우산으로 박 군의 온몸을 구타했다. 그들은 박 군의 몸에 올라타 얼굴을 때리는가 하면 몽둥이로 박 군의 무릎과 정강이를 때렸다. 피해자 머리를 왼쪽 발로 밟고 올라서 오른쪽 발로 얼굴을 걷어차기도 했다. 이렇게 맞다 보니 코뼈가 부러질 수밖에 없었다. 또 라이터 불을 엉덩이에 대는가 하면 패거리 중 최 군은 구타 장면을 휴대전화 영상통화로 여자친구에게 생중계했다.

황 군 등은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집에 가면 어른들이 (폭행 사실을)알게 된다'며 이틀간 박 군을 감금했다. 겨우 풀려난 박 군은 지난달 6일 할아버지 손에 이끌려 경찰서를 찾았다. 그러나 무자비한 학교 폭력에 길든 박 군은 보복을 두려워한 나머지 가해자를 두둔할 정도로 하는 등 정서가 불안했다.

박 군이 경찰에서 조사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황 군 패거리의 귀에도 들어갔다. 황 군이 피해자가 입원한 병원을 수소문한다는 첩보에 경찰은 보복 범죄 예방 차원에서 황 군 등 세 명을 지난달 27일 검거했다. 경찰은 황 군 패거리가 폭행하는 장면이 담긴 폐쇄회로 TV를 확보한 뒤 황 군 등을 집단 폭행 및 감금 등의 혐의로 기소했다.

황 군을 붙잡은 경찰 관계자는 "가해 학생들이 대부분 폭력적인 인터넷 게임을 평소 즐겼다"면서 "CCTV를 보면 일반인으로선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방법으로 잔인하게 폭행하는 장면이 있다"고 설명했다. 학교 폭력의 심각성을 인지한 경찰 관계자는 "앞으로 학교 폭력에 신속하고 단호하게 대처하겠다"고 말했다.

현재 박 군은 서울경찰청 범죄피해자 케어센터에서 심리 상담 치료를 받고 있고, 경찰은 황 군 패거리가 다니는 학교를 대상으로 다른 피해자가 있는지 조사하고 있다.



이상준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