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8일 서울 서초동 서울법원종합청사 기자실에서 서울지방변호사회 오영중 인권이사(가운데)가 "삼성전자를 비롯한 반도체 사업장을 보유한 기업들은 반도체 공정 환경과 백혈병 발병 사이의 인과관계를 인정하고 백혈병 환자와 가족, 국민에게 사과하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마침내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최근 삼성, 하이닉스 등 반도체 사업장에서 백혈병 및 폐암 유발인자가 나온다는 사실이 공공연구기관을 통해 처음으로 확인되면서 관련 피해자 모임, 시민단체, 언론 등에서 터져나온 반응이다.

삼성전자는 그간 자사의 반도체 사업장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이 백혈병, 폐암 등 질병에 시달리면서 그 원인으로 사업장 내 환경이 지목되자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부인해 왔다. 해외 유수의 안전보건컨설팅회사를 통한 자체 조사와 매년 진행된 국가기관의 조사 또한 삼성전자의 '무고함'을 뒷받침하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이번에 반도체 사업장에서 1급 발암물질이 처음으로 확인되면서 '발암 환경' 문제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현재 진행 중인 산재소송과 근로자들에 대한 앞으로의 처우 등 상당 부분이 수정될 것으로 예상된다.

백혈병 유발인자 공식 확인

삼성전자 반도체사업부에 근무하다 백혈병에 걸린 직원과 유족들이 지난달 11일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유족급여 지급거부 등 취소 소송을 내기전 기자회견을 열고 소송의 취지 등을 설명하고 있다.
고용노동부 소속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의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이하 '연구원')이 6일 발표한 '반도체 제조 사업장 정밀 작업환경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삼성전자, 하이닉스 등 국내 반도체 사업장 생산라인에서 백혈병 유발인자인 벤젠과 포름알데히드, 그리고 폐암 유발인자로 알려진 비소와 전리방사선이 검출됐다. 반도체 작업공정에서 백혈병 및 폐암 유발인자가 나온다는 사실이 공공연구기관을 통해 공식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연구원의 조사는 2009~2011년 3년간 삼성전자 기흥ㆍ온양사업장, 하이닉스 이천ㆍ청주사업장, 페어차일드코리아 부천사업장 등 3개 회사의 5개 사업장을 대상으로 이뤄졌다.

조사에 따르면 사업장 근로자의 호흡기 주변에서 시료를 채취ㆍ분석한 결과 삼성 기흥사업장 가공라인 1곳을 제외한 4개 사업장의 모든 라인에서 백혈병 유발인자인 벤젠이 부산물로 검출됐고, 또 다른 백혈병 유발인자인 포름알데히드도 삼성전자 기흥ㆍ온양사업장, 하이닉스 이천ㆍ청주사업장의 모든 라인에서 검출됐다. 폐암 유발인자인 비소는 하이닉스 사업장에서, 다른 발암물질인 전리방사선은 삼성 5개 사업장의 모든 라인에서 측정됐다.

연구원은 그러나 "검출된 벤젠과 포름알데히드, 전리방사선은 인체에 영향을 미치는 수준이 아닌, 노출기준치 이하"라고 설명했다. 백혈병 및 폐암 유발인자의 검출농도 최대치가 벤젠 1ppm, 포름알데히드 0.5ppm, 전리방사선 50밀리시버트인데 반해 이번에 측정된 수치는 각각 0.0099ppm, 0.015ppm, 0.015밀리시버트로 노출기준치에 크게 미달해 건강에는 문제가 없는 수준이라는 내용이다. 다만, 폐암이 원인이 되는 비소는 노출기준을 초과했으나 이 또한 이온 주입공정을 유지 보수할 때 일시적으로 증가하는 것이라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고 밝혔다.

'삼성전자의 인정'도 처음

연구원의 발표가 처음 났을 때 삼성전자 측은 "극미량의 발암물질이 검출된 것으로 자연환경 수준과 큰 차이가 없고 인체에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다"라며 "사업장 환경을 글로벌 업계 최고 수준으로 관리해 왔지만 앞으로 관리기준을 더욱 엄격히 적용하겠다"라고 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이어 "검출된 벤젠 등의 물질을 백혈병 근로자와 직접 연관지어서는 안 된다"라고 못 박았다.

그러나 해당 결과를 바탕으로 시민단체, 노동조합, 정치권의 자성 요구가 거세지자 삼성전자는 반도체 사업장 근로자의 백혈병 발병 문제에 대해 적극 해결하겠다는 쪽으로 노선을 선회했다. 다만 작업장에서 발생한 질병을 모두 보상할 수 없다는 기존 입장은 고수했다.

이인용 삼성 커뮤니케이션팀 부사장은 8일 "반도체 발암물질 발생과 관련한 내용을 가장 해결하고 싶은 이해 당사자는 회사"라면서 "이 문제를 그룹 차원에서 매듭지을 중요한 사안으로 보고 투명하게 해결하겠다"고 밝혔다. 삼성전자가 고위 관계자의 입을 통해 사업장 근로자들의 백혈병 발병 문제를 그룹 차원의 주요 사안으로 보고 해결할 의사가 있음을 내비친 것은 처음이라 이 부사장의 발언은 더욱 시선을 끌고 있다.

"백혈병 발발 가능성 충분"

그러나 관련 피해자모임과 시민단체들은 삼성전자의 반응에 대해 '여전히 무책임하다'라는 목소리를 높였다. 질병 유발요인이 공식적으로 증명됐음에도 사과는커녕 구체적인 해결방안조차 제시하지 않은 채 상투적인 답변만을 내놓고 있다는 주장이다. 단순히 질병 유발물질이 극미량만 발생했다는 것만으로 책임에서 회피하려고 하는 행위 자체가 납득하기 힘들다고 반발하고 있다.

삼성전자 백혈병 및 폐암 피해 근로자들은 "이번에 제시된 '노출기준' 자체가 애초에 건강한 사람을 기준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며 "술 한잔을 마셔도 사람, 시간에 따른 개인차가 발생하기 마련"이라고 불만을 표시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의 백혈병 진상규명을 위해 구성된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이하 반올림) 관계자는 "이번 조사는 작업환경이 최첨단화된 2009년 이후 시기를 대상으로 했는데 현재 피해자 대다수는 1990년대나 2000년도 초중반에 근무했던 분들"이라며 "당시 환기가 잘 안 되고 수동생산했던 피해자들에게 이번 조사가 얼마나 유의미한지 의문"이라고 전했다.

민주노총 또한 성명을 통해 "직업병 역학조사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와 대책 수립이 시급하며 협력업체나 중소 전자업체 사업장에 대한 조사도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실제로 발암물질에 대한 노출기준이란 절대 암이 발생하지 않는다는 안전기준이 아닌 현재 국내 환경을 고려해서 정하고 있는 관리기준에 불과하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에 따르면 창문 하나 없이 밀폐된 반도체 사업장은 공기의 90% 이상이 계속 순환된다. 특정 공정에서 발생한 부산물이 같은 건물 안의 모든 근로자에게 지속적으로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신체적 조건, 노출경로, 노동시간 등 다양한 요소가 영향을 미치는 까닭에 기준치만을 믿고 맘 편히 있을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산재처리는 할 수 없다"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의 백혈병 환자 문제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지난 2007년 삼성전자 근로자들이 근로복지공단에 산업재해 신청을 한 이후 현재까지 반올림에는 백혈병 등 희귀질환 피해자 150여 명의 제보가 이어지고 있다. 그 중 20~30대 암 피해자만 100명이 넘었고 50여 명은 결국 사망했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그동안 피해자들의 산재신청을 일절 인정하지 않았다. 반올림 관계자들에 의하면 삼성전자는 본인ㆍ유족과 산재신청 포기를 전제로 보상금에 합의하거나 입증 책임을 노동자에게 돌리는 방식으로 산재신청을 무마시켜왔다. 그 결과 50여 명의 피해자가 사망했음에도 삼성전자는 여전히 무재해 사업장으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

근로복지공단 또한 연구원의 역학조사 결과를 근거로 반도체 전자산업 피해자들의 모든 산재신청을 불승인해왔다. 심지어 근로복지공단은 서울행정법원이 백혈병에 걸려 숨진 근로자 2명에 대한 산재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리자 이에 불복, 항소까지 했다.

비난 여론이 높아지자 삼성전자는 미 산업보건 컨설팅 전문업체인 인바이론사에 의뢰, 1년 동안 기흥과 화성, 온양 사업장 등에 대해 정밀조사를 진행해 지난해 7월 백혈병 사망과는 무관하다는 결과를 내놓은 바 있다. 그러나 인바이론사의 조사는 이번과 달리 내부에 의한 부산물 발생 여부는 염두에 두지 않아 좀 더 세밀한 역학조사의 필요성이 대두되고 있다.

산재소송에 영향 미칠까?

기준치보다는 낮은 수치이지만 반도체 사업장에서 공식적으로는 처음 백혈병 및 폐암 유발인자가 확인되면서 해당 질병에 대한 산재처리 문제는 지금까지와 사뭇 다른 방향으로 진행될 전망이다. 공공연구기관을 통한 첫 확인인 탓에 삼성전자도 지금까지처럼 유야무야 넘어가기에는 큰 부담이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 삼성전자는 기존 반도체 사업장만을 대상으로 했던 건강연구소의 역할을 삼성전자 전 사업장으로 확대하고 전문인력을 내년까지 23명으로 늘릴 계획도 세웠다.

지난 2007년 백혈병으로 사망한 삼성전자 근로자의 유가족이 근로복지공단에 산재를 신청한 이후 지금까지 모두 9건이 법원에 계류 중이다. 현재 1심 진행 중인 사건이 4건, 2심이 5건이며 2심 중에서는 법원이 산재를 불승인한 건이 3건, 승인한 건이 2건이다.

법원에서 산재가 인정된 사례의 경우 반도체 공정 중 '확산'과 '습식식각' 업무에 종사하던 이들에 대한 것으로, 웨이퍼 가공라인과 반도체 조립라인을 대상으로 한 이번 조사 결과와는 직접적으로 연관이 없다. 그러나 업계 관계자는 "이번 결과를 토대로 좀 더 다각적인 역학조사가 시행될 가능성이 높다"라며 "새로운 결과가 나올수록 현재 행정소송 중인 피해자들이나 소송을 준비 중인 근로자들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라고 전했다.

삼성 '세계 최악 기업 3위'

● 그린피스·베른선언 주최 온라인 투표 결과
1위 아마존댐 건설 브라질 광산기업 발리, 2위 도쿄전력

산업안전보건연구원의 발표가 있기 불과 일주일 전 삼성전자는 세계 최악의 기업 3위에 뽑혔다. 국제 환경단체인 그린피스와 스위스 시민단체인 베른선언이 지난달 26일(현지시각) 전 세계 시민 들을 대상으로 온라인 투표를 벌인 결과다.

매년 1월마다 인간과 환경에 해를 끼친 기업을 뽑는 '공공의 눈 상' 투표에서 삼성전자는 총 8만8,766표 중 1만9,014표를 얻어 3위로 확정됐다. 1위는 브라질 아마존댐 건설을 위해 원주민 4만명을 강제로 이주시킨 브라질 광산기업 발리가 2만5,042표를 받으며 차지했고, 일본 후쿠시마 원전사태 때 안전조처를 무시해 방사능 오염을 일으킨 도쿄전력이 2만4,245표로 2위에 올랐다.

주최 측은 온라인 투표 사이트에 "삼성전자가 노동자를 보호하거나 알리지 않은 채 금지된 유독성 물질을 (반도체 등) 사업장에서 사용해 노동자 140명이 암 진단을 받고 그중 50명이 이미 사망했다"고 소개했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는 주최 측에 항의서한을 보냈다.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지킴이 반올림' 이 공개한 서한에 따르면 브렌든 고어 삼성전자 유럽본부 홍보담당자는 "정확하지 않은 주장과 묘사를 근거로 삼성전자를 후보로 선정했다"라며 "암 사례들과 작업장 노출 사이의 연관성은 과학적 근거로 뒷받침되지 않았다"고 강력 항의했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