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성, CJ 미행했나● CJ측미행·업무방해로 고소 "누구 지시인지 해명하라"● 김씨·삼성측"부지 검토중 우연한 사고" "미행해서 얻을 게 없다"

20일 낮 12시2분쯤 삼성물산 직원 김모씨가 오피러스 승용차를 타고 이재현 회장 자택 인근을 돌아다니는 장면. CJ 제공
삼성과 CJ가 또 충돌했다. 20년 가까이 갈등을 빚어온 삼성과 CJ이기에 "이제는 정말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 같다"는 세간의 입방아도 무리는 아닌 듯하다. 다시 손을 잡기엔 너무 멀어 보이는 게 사실이다.

삼성그룹은 창업주인 고(故) 이병철 회장의 삼남인 이건희 회장이 이끌고 있고, CJ그룹은 고 이 회장의 장남인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의 장남 이재현 회장이 지휘봉을 잡고 있다. 삼성과 CJ는 '한 뿌리'에서 나온 형제 기업이다.

CJ는 그러나 지난 23일 서울중부경찰서에 고소장을 제출했다. 이재현 그룹 회장의 비서실장인 김홍기 부사장 명의로 제출한 고소장에서 CJ는 "이 회장을 수행해 업무를 보좌하는 과정에서 미행당해 업무에 방해를 받았다"며 "폐쇄회로(CC)TV 영상 등 미행 사실을 입증할 증거자료를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고소장에는 '삼성물산' '삼성그룹' 등 삼성과 관련된 용어는 없었다. 피고소인 이름에도 미행의 주범으로 지목되고 있는 삼성물산 소속의 김모 차장 대신 '성명 불상자 다수(이름을 알 수 없는 여러 명)'라고만 돼 있다. 경찰 수사를 통해 시시비비가 가려지기 전까지는 신중하게 대처하겠다는 게 CJ 측 입장이다.

하지만 고소장 제출에 앞서 CJ는 "세계 초일류 기업인 삼성에서 이런 일을 했다는 데 대해서 누구도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라며 "삼성은 누구의 지시에 의해 이뤄진 것인지 해명과 사과를 해야 한다"고 삼성을 겨냥했다.

21일 오후 3시55분쯤 삼성물산 직원 김모씨가 렌터카 업체에서 41허 XX29 오피러스를 다른 차량으로 교체하기 위해 내리고 있다. CJ 제공
교통사고로 막 내린 미행

CJ에 따르면 이재현 회장의 운전기사는 지난 16일쯤부터 출퇴근 시간에 누군가 미행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CJ의 CCTV에도 41허 XX29 번호판을 단 검은색 오피러스 승용차가 17일 오전 8시쯤 서울 중구 장충동 이 회장 자택 근처를 배회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CJ는 이 회장이 주말에 약속 장소에 나갈 때도 이 차량이 미행했고, CJ 측에서도 CCTV를 통해 차량을 감시하기 시작했다. 지난 20일 오전 8시와 낮 12시쯤에도 이 차량이 이 회장 자택 앞에 머물러 있는 장면이 화면에 잡혔고, 21일 오후 3시 55분쯤에는 오피러스 승용차를 몰던 운전자가 렌터카 업체를 통해 차량을 41허 XX93 검은색 그랜저로 바꾸는 모습이 찍혔다.

이 운전자는 차량을 바꾼 직후인 오후 4시 8분쯤 다시 나타났고, 미행임을 확신한 이 회장의 비서실 직원들은 오후 7시 30분쯤 차량을 가로 막았다. 이 과정에서 CJ 측 김모 비서가 다리를 살짝 부딪히는 사고를 당한 뒤 경찰에 신고했다.

미행 당사자로 지목된 김씨는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또 삼성도 "김씨는 신라호텔 인근 부지 활용을 검토하기 위해 장충동 일대를 돌아다니다 우연히 사고가 났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CJ는 "사고가 나면 운전자가 나와 신분증이나 명함을 제시해야 하는 게 상식인데 김씨는 이를 거부했다"고 반박했다.

21일 오후 4시8분쯤 삼성물산 직원 김모씨가 그랜저 승용차로 바꾼 뒤 이 회장 자택 근처로 다시 나타났다. CJ 제공
정말 혼자서 한 일일까

실체적 진실을 떠나 많은 이들은 이번 일을 '삼성그룹의 이재현 회장 미행 사건'으로 믿고 있다. CJ는 "삼성은 이 회장의 부친인 이맹희 전 제일비료 회장의 소송에 이 회장이 관련돼 있다고 믿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CJ가 '삼성 미행 사건'임을 확신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전 회장은 지난 14일 이건희 회장을 상대로 차명재산 반환 청구소송을 서울지방법원에 제기했다. 소장에서 이 전 회장은 "삼성생명과 삼성전자 주식은 아버지 생전에 제3자 명의로 신탁한 재산이다. 그런데 이 회장이 다른 상속인에게 알리지 않고 명의신탁을 해지한다는 이유로 이 회장 단독 명의로 변경해 버렸다"며 "삼성생명 주식 824만 주와 삼성전자 주식 20주, 현금 1억 원 등을 지급하라"고 요구했다. 이 전 회장의 청구액은 최소 7,000억원에서 최대 2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이번 사건의 가장 큰 쟁점은 김씨가 정말 혼자서 한 일이냐는 것이다. 삼성은 "이 회장을 미행해서 뭘 어쩌겠다는 거냐"고 반문한다. CJ 주장대로 미행이 맞는다면, 보다 조직적이고 치밀하게 움직이지 않았겠냐는 게 삼성 측 해명이다.

하지만 김씨가 삼성물산 감사팀 소속이라는 점을 주목하면 얘기는 달라질 수도 있다. 삼성물산 감사팀은 그룹이 직접 관리하는 조직이다. 삼성물산 감사팀은 김순택 부회장과 장충기 사장 휘하에 있는 미래전략실 소속이다. 미래전략실 소속 인원은 30여 명, 계열사 전체 감사인력은 200여 명으로 철저하게 시스템에 의해 활동한다. 개인이 임의대로 움직인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21일 오후 8시쯤 이재현 회장의 차량을 미행하던 삼성물산 소속 김모씨가 사고 직후 경찰관에게 조사를 받고 있다. CJ 제공
루비콘강 건넌 양측 결론은?

서울중부경찰서는 이 사건을 형사과에 맡기기로 했다. 처음 사고가 접수됐을 때는 교통과 업무였지만, CJ 측이 업무방해 혐의로 고소장을 제출했기 때문이다.

형사과는 CJ가 제출한 고소장과 CCTV 화면 등을 토대로 수사에 착수했다. 또 CJ 측 관계자를 고소인 자격으로 불러 조사하는 한편 '성명 불상자'로 기재된 피고소인을 지정하는 등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 CJ가 피고소인을 특정하지 않은 만큼 경우에 따라 삼성 측 관계자는 소환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이와 함께 경찰은 "신라호텔 인근 부지의 사업성을 검토하기 위해 다녔던 것"이라는 삼성물산 측 해명에 대해서는 인근 CCTV 판독 등을 통해 진위를 가릴 방침이다.

그럼에도 경찰은 이 사건에 적용할 형법 조항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경찰은 CJ의 고소는 일단 받아들였지만, "피고소인이 물리력(위력)을 통해 업무방해를 했다"는 주장은 선뜻 판단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피고소인인 김씨의 행위가 미행이 아닌 단순한 '동향 파악'으로 인정된다면, 업무방해죄가 성립되기 어려울 수 있다는 게 법률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판단이다.

특정인의 움직임을 뜻하는 동향이 곧 업무가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결론이 어떻게 나든 '한 뿌리'인 삼성과 CJ 모두 회복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른 것은 이미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최경호기자 squeez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