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구 현대차 회장
지난달 30일부로 12월 결산법인 1,702개사의 2012년 주주총회가 모두 마무리됐다. 올해 주주총회의 최대 화두는 총수일가의 사내이사 진출이었다. 그룹의 총수 및 총수 자제들에 대한 계열사 사내이사 선임이 그 어느 때보다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총수일가의 사내이사 선임이 많아지며 이사회의 독립성을 훼손하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이사진의 책임은 줄이고 권한은 늘린 새 정관 탓에 모럴 해저드 논란도 일어났다. 한편, 권력기관 출신의 사외이사들도 대거 재선임되면서 '방패막이용', '거수기'라는 비난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강덕수회장 4개사 재선임

그룹 총수 중 계열사 사내이사로 신규선임된 사례로는 현대건설 사내이사로 이름을 올린 과 두산건설 사내이사로 다시 들어간 이 있다. 두 사람 다 이미 여러 계열사의 사내이사직을 겸하고 있긴 하지만 새로 선임되는 회사들이 최근 크게 부진했던 탓에 직접 경영을 챙기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재선임된 그룹 총수들도 상당수 눈에 띈다. 롯데쇼핑 등 13개 계열사의 등기이사를 겸하고 있는 은 아들 신동빈 롯데 회장과 함께 롯데제과 사내이사로 재선임됐다. 이로써 신 총괄회장은 45년간 재직해왔던 롯데제과의 사내이사를 연장하며 기록을 이어가게 됐다.

박용현 두산 회장
여러 계열사에 재선임된 사례도 있다. 조양호 한진 회장은 한국공항 사내이사 및 한진해운홀딩스 기타비상무이사로 재선임됐다. 신춘호 농심 회장 또한 농심과 농심홀딩스 사내이사를 다시 맡게 됐다. 강덕수 STX 회장은 총 4개사에서 재선임됐다. STX메탈, STX조선해양, STX엔진, STX팬오션이다. 강 회장은 현재 2개 계열사의 대표이사와 5개사의 사내이사를 겸직하고 있다.

사내이사가 된다는 것은 이사회 구성원으로서 기업경영에서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고 그에 대한 법적인 지위와 책임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룹의 총수들이 사내이사로 대거 선임되는 것이 책임경영으로 읽힐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유다.

문제는 그룹 총수의 자제들이다. 총수 자제들은 이번 주주총회에서 사내이사로 상당수 편입됐다.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은 현대제철의 사내이사로 신규선임됐다. 대한항공 남매인 조현아-조원태 대한항공 전무도 사내이사에 새로 이름을 올렸다. 그 밖에도 신동익 메가마트 부회장은 농심의 사외이사로 구본진 LG패션 부사장은 LG패션 사내이사로 신규선임됐다. 재선임된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재계 관계자는 "그룹의 총수들이야 백번 양보해 위태로운 계열사들 챙기기로 이해할 수 있다"며 "그러나 경험도, 능력도 완전히 검증되지 않은 총수 자제들이 여러 계열사에 이름을 걸어놓는 것은 후계구도 강화를 위한 입지 키우기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이사회 독립성 훼손 우려

신격호 롯데 총괄회장
사내이사가 총수일가로 채워지면서 이사회의 독립성을 훼손한다는 지적도 있다. 이사회 안에서 그룹의 총수들을 견제할 수 있는 수단이 사라지며 소액주주들의 직접적인 피해로 이어질 수 있다는 내용이다.

(주)효성은 이번에 조석래 회장을 비롯, 조현준 사장과 조현문 부사장까지 모두 재선임되며 사내이사의 75%가 총수일가로 채워지게 됐다. 대한항공과 (주)두산 역시 사내이사진 6명 중 4명이 총수 일가로 채워졌다. 농심의 지주회사인 농심홀딩스는 아예 신춘호 회장과 신동원 부회장, 신동익 메가마트 부회장, 신동윤 율촌화학 부회장까지 재선임되며 사내이사 모두를 한 식구로 채웠다.

더 큰 문제는 정관 변경으로 사내이사의 책임은 줄어들고 권한은 늘어나고 있다는 점이다. 상장계열사 중 상당수는 2012년 주주총회를 맞이하여 경영실패에 따른 사내이사의 책임은 감면하고 권한은 대폭 강화하는 쪽으로 정관을 변경했다. 개정된 상법에 바탕을 둔 행동이었다.

이달 15일부터 시행되는 개정상법 400조에 따르면 이사진의 책임을 이사가 그 행위를 행한 날 이전 최근 1년간 보수액의 6배(사외이사는 3배)를 초과하는 금액에 대해 면제할 수 있다. 또 기존에는 주주총회 권한으로 돼 있던 재무제표 승인 및 배당에 관한 결정권한을 이사회에 부여할 수 있도록 하고, 금전배당 외에 현물배당도 허용할 수 있도록 했다.

물론 개정상법에 따른 정관 변경으로 기업 입장에서는 자금운용의 통일성을 높일 수 있게 됐고 재무관리의 자율성도 높아졌다. 그러나 개정상법이 최근에 불거지고 있는 총수일가 사내이사 대거 진출과 결합되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가뜩이나 소수의 총수일가가 장악하고 있는 이사회인데 행동에 따른 책임한도를 줄이고 권한은 늘려줌으로써 모럴 해저드의 위험이 커진 셈이다. 늘어나는 이사회의 권한에 반비례하여 주주들의 입김이 줄어드는 등 회사에 대한 견제가 무뎌지면서 기업 투명성이 크게 악화될 가능성도 높아졌다.

권력기관 출신 방패막이요

사내이사를 견제하기 위해 세워진 사외이사들은 이미 거수기로 전락한 지 오래다. 사외이사 제도는 총수일가와 관련 없는 전문가들을 이사회에 참가시켜 총수의 독단경영과 전횡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외이사는 주요 경영 사안에 대한 총수의 결정에 전혀 반대의견을 내놓지 않아 오래전부터 비판의 대상으로 전락해 있는 상태다. 제대로 된 사외이사가 선출되지 않는 것이 문제의 최초 발단이다.

사외이사직을 제대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그룹의 총수 몇 경영진으로부터 독립되는 것이 최소 선결 조건이다. 이를 위해 한국상장사협의회는 사외이사인력뱅크를 만들어 놓고 신상정보를 데이터베이스에 올려 기업들이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인력뱅크에 등록된 855명 가운데 실제 사외이사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은 2월 중순 기준 46명에 불과하다.

문제는 사외이사에 재선임된 이들 중 상당수가 권력기관 출신이라는 점이다. 10대그룹의 지주사 및 대표 계열사들에서 이번에 재선임된 사외이사들의 면면만 살펴봐도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삼성전자에서 이번에 사외이사로 재선임된 윤동민 김앤장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검사를 거쳐 법무부 기획관리실장을 맡은 바 있다. 현대자동차도 대전지방 국세청장 출신의 강일형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과 공정거래위원회 정책국장을 역임했던 임형철 법무법인 세종 변호사를 사외이사로 재선임했다.

(주)SK는 행정자치부 제1차관을 맡았던 권오룡 위원장을, LG는 대통령비서실 경제수석실 출신의 이윤재 전 비서관을 재선임했다. 롯데쇼핑은 건설교통부 차관을 역임했던 김세호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과 대검찰청 감찰부장을 지낸 김태현 법무법인 율촌 변호사를 사외이사로 챙겼다. (주)한진은 한강현 전 서울행정법원 부장판사를, (주)두산은 서울지방국세청장을 거쳐 국세청 조사국장을 역임했던 오대식 법무법인 태평양 고문을 재선임했다.

이처럼 그룹들이 권력기관 출신 사외이사들을 대거 영입하는 배경에 대해 일각에서는 '방패막이용'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반기업정서가 확산되며 사정기관들의 압박이 심해지는 요즘, 권력기관 출신 사외이사를 이용해 로비에 나서는 것이 아니냐는 내용이다. 이에 대해 익명을 요구한 한 10대그룹 관계자는 "얼마 되지 않는 사외이사 연봉을 받으며 방패막이해주려는 사람이 어디있겠느냐"면서도 "일단 해당 사정기관 출신 사외이사가 있으면 마음이 든든한 것은 사실"이라고 전했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