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형 경영리더십의 재발견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1993년 '프랑크푸르트 선언' 사장단 200여명 이끌고
68일간의 해외 벤치마킹… 20년 고속성장 이끈 리더십
'나홀로' 정몽구 회장도 변화… 현대차는 '오너 친위대'
재경 축소 기획조정실 확대… 삼성 미래전략실에 주목

4월 총선이 막을 내린 데 이어, 대선 잠룡들도 대권을 잡기 위해 은밀히 새 리더십을 가동하고 있다. 올해는 미국, 중국, 러시아 등 세계열강의 국가 통수권자가 바뀌는 해이기도 하다. 세계 정치 리더십의 지형도 또한 일대 변화를 겪을 전망이다.

리더십의 변혁은 정치 이슈에만 국한된 게 아니다. 1990년대 중반 이후 한국 CEO들은 혁신적 경영리더십을 발휘, 회사를 세계 선진기업 반열에 하나둘 올려놓았다. 오너십으로 대변되는 제왕적 리더십이 기업을 위기에서 살려내는 데 큰 역할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국내 경영리더십에 대한 체계적 연구는 아직 미비하다. 포춘코리아는 4월호에 '한국형 경영리더십의 재발견'이라는 특집기사를 게재했다. 최근 10년간 한국형 리더십의 성과는 어땠으며, CEO 리더십은 어떻게 만들어지고 전달됐는지를 조명했다.

글로벌 리더십의 태동

1993년 6월 어느 날.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 손욱(67) 교수는 삼성 이건희 회장과 함께 독일행 비행기에 탑승했다. 손 교수는 당시 삼성그룹 비서실 팀장으로 이 회장을 수행했다. 일본 도쿄 출장을 마친 이 회장은 독일 프랑크푸르트로 떠나는 출발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혁신경영의 고전이 된, 이 회장의 '프랑크푸르트 신경영 선언'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손 교수는 "수행원은 모두 6명. 비행기 안에서 누구도 잠을 청하지 않고 긴 회의를 거듭하다가, 도착해서도 긴 토론을 이었다"고 말했다.

손욱 서울대 교수
6월 7일, 삼성그룹 사장단 200여명이 프랑크푸르트로 긴급 호출됐다. 이 자리에서 이 회장은 신경영을 발표했다. 평소 길게 말하는 걸 피하는 스타일이지만, 이날은 장시간에 걸쳐 경영비전을 역설했다. 이어 모두 비행기에 태워 유럽과 일본 출장길에 나섰다. 68일간의 대장정이었다. 1명의 그룹 총수가 수백 명의 사장단을 이끌고 해외 벤치마킹을 2달 넘게 다닌 일은, 세계 기업 역사상 유례를 찾을 수 없는 혁명적 행보였다. 이병철 선대회장에게 경영권을 이어받은 이건희 회장이, 최초로 자신만의 강력한 경영리더십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손 교수는 "1990년대 초반만 해도 대부분의 한국 CEO들은 밤낮 없이 노동 강도를 높여 생산량을 늘리는 데만 집착했다"며 "세계 1등이 못 되더라도 실적만 오르면 만족하던 때였다"고 회고했다. 그에 따르면 삼성의 신경영 선언은 한국기업으론 최초로,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으로 경영 행로를 뜯어 고친 것이었다. 시대를 꿰뚫는 이 회장의 강력한 리더십이 성공적으로 적용됐기에 가능했다는 얘기다.

지난 20여 년간 삼성을 고속성장시킨 이건희 회장의 글로벌 리더십에는 한 가지 전제조건이 따라다닌다. 바로 지금이 회사의 최대 위기라고 임직원들에게 강조한다는 것. 이 회장이 추구한 한국형 경영리더십의 기본 원리는, 위기를 미리 내다보고 사전에 조직을 재정비하는 방식이었다. 윤정구 이화여대 교수(대한리더십학회장)는 "사람들은 위기 상황에서 구심점 역할을 하는 리더 밑으로 자동적으로 모여든다"며 "불확실성이 동반된 경제위기가 불어 닥칠수록 강력한 오너십이 그룹 전반에 순식간에 전파되고, 직원들은 그것을 믿고 따른다"고 말했다. 실제로 잠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던 이 회장은 지난 2010년 3월 복귀를 선언하면서 "앞으로 10년 내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이 대부분 사라질 것"이라며 위기 경영론을 제시했다. 이어 삼성그룹의 5대 신수종 사업을 결정하고, 수십조 원에 달하는 투자 계획을 확정했다. 그 결과 삼성전자는 2010년 매출 150조 원 돌파, 영업이익 17조 3000억 원을 기록하며 150-15클럽(매출 150조 원-영업이익 15조 원 이상)에 처음 가입했다. 지난해엔 160-16클럽에 오르며 성장세를 이어갔다.

이건희와 정몽구의 리더십

재계 서열 2위 현대차그룹은 어떨까. 익명을 요구한, 현대차그룹 한 관계자는 "현대차가 삼성전자를 닮아가고 있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작년부터 현대차 제1 기획조정실에서는 비밀리에 삼성전자 미래전략실을 벤치마킹하고 있다. 정몽구 회장의 기획실과, 이건희 회장의 전략실은 태생부터 차이가 난다. 삼성 미래전략실은 이병철 선대회장의 비서실과 이건희 회장의 전략기획실을 거치면서 진화했다. 3세 경영인인 이재용 사장의 미래전략실로 체질이 변화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정몽구 현대차그룹 회장
하지만 현대차는 이제 막 오너의 친위대를 꾸리는 중이다. 리더십을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는 강력한 조직을 필요로 하기 시작했다는 설명이다. 정몽구 회장은 평소 가신 조직을 두지 않고 혼자 판단하기를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그의 경영 스타일에 변화가 생기고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현대차는 엄밀히 말해 이제 창업한 지 10년 조금 넘은 신생기업이다. 고 정주형 회장의 현대그룹은 지난 2000년 왕자의 난에 의해 현대차, 현대, 현대중공업 등으로 쪼개졌다. 현대차는 2000년대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 도요타나 GM 등 선두 기업을 따라 잡느라 그룹 통제력을 개선하는 데 관심을 둘 겨를이 없었다.

익명의 관계자는 "현대차는 내부적으로 2007년부터 도요타를 경쟁상대로 보지 않고 있다"면서 "도요타를 따라잡을 게 없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며, 요즘엔 이건희 회장의 리더십과 미래전략실의 관계에 대해 관심이 높다"고 전했다. 그에 따르면 현대차는 최근 재경본부를 축소하고 기획조정실의 자금기능을 확대했다. 재무 관리까지 흡수한 기획조정실이, 그룹 내에서 정몽구 회장과 정의선 부회장으로 이어지는 핫라인을 형성했다는 것이다. 지난 3월초 기획조정실 호출로 현대차그룹 계열사 기획팀장들이 전부 본사 대회의실에 모였다. 그곳에서 위기관리와 관련한 교육프로그램이 진행됐다. 향후 문제점이나 리스크가 발생하면 빠짐없이 기조실로 보고해야 한다는 전언이다.

기획조정실 기능이 강조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설명이다. 현대차는 창사 이래 가장 크게 몸집을 부풀리며 성장 중이다. 반면 경영진에서는 자동차, 금융, 건설, 제철 등 이종산업 간 효율적 통제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었다. 익명의 관계자는 "지난해 현대캐피탈 개인정보유출 사태로 그룹 차원의 위기관리가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며 "한 곳에서 문제가 터지면 그룹 전체로 번질 수 있는 걸 염려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현대차그룹은 또 산하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의 연구기능을 강화했다. 삼성의 싱크탱크인 삼성경제연구소를 따라잡자는 판단에서 비롯됐다는 얘기다. 윤정구 교수는 "정 회장은 현장 경영을 중시하며, 팀워크를 강조하는 리더십을 구사한다"면서 "이건희 회장의 통찰력과 정 회장의 실천력이 만나면 가장 완성에 가까운 한국형 리더십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새로운 리더십의 등장

이 같은 한국형 경영리더십은 오너뿐 아니라 전문경영인들도 발휘하고 있다. LG그룹 부회장에 오른 차석용 LG생활건강 대표이사는 2005년 취임 후 27분기 연속 두 자릿수 이상 매출과 영업이익 성장을 이끌었다. 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팬택의 워크아웃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던 작년 12월 초 돌연 사퇴를 선언했다. 채권단과의 마찰로 워크아웃이 지지부진해지자 승부수를 던진 것. 샐러리맨 출신으로 신화를 구축했던 그의 리더십은, "진심을 담은 경영철학'의 결과물"이라는 평가도 따른다.

구본준 LG전자 부회장
윤정구 교수는 "박 부회장에게 감동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가 진심이 담긴 경영 철학을 가졌기 때문"으로 분석했다. 팬택의 경영 철학은 애플의 스타일과 닮은 구석이 많다. 윤 교수는 "애플 임직원들은 세상에 없던 새로운 것을 만드는 회사에서 일한다는 자부심이 강하다"며 "지난 10년간 아이팟, 아이폰 등 성공작을 만든 것도 애플의 이런 '진성 리더십'이 작용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박병엽 부회장도 큰 줄기에서 비슷한 진성 리더십을 보이고 있다. 그는 올해 신년사에서 직원들에게 역설했다. "제겐 시대를 뛰어넘는 기업을 해보고 싶다는 꿈이 있습니다. 시스템이나 기업문화, 부의 분배, 존경받고 사랑받는 기업이란 점에서 앞 세대보다 뭐 하나라도 나은 걸 만들어야죠."

그렇다면 오늘날 한국형 경영리더십은 어디로 이어지고 있으며, 학계는 이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먼저 손욱 교수는 "3명의 CEO가 한국형 경영리더십을 창조했다"고 분석했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 정주영 현대 창업주, 그리고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이 그 주인공들이다. 모두 카리스마적 리더십을 뿜어내며 기업을 성장시킨, 산업화 시대 역군들이다. 윤 교수는 "3명의 CEO는 충분히 연구할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들이지만, 한국형 경영리더십이 어디로 이어지고 있는지 또한 고민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만큼 리더십에 대한 연구가 홀대받는 곳도 없다. 국내 대형 서점가 한 직원은 "가장 안 팔리는 자기계발서에 항상 리더십 관련 서적이 들어간다"면서도 "2000년대 들어 출판업계가 경쟁적으로 해외 리더십 이론과 사례를 엮어 책으로 냈지만, 독자들은 그게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지 오래"라고 설명했다. 윤정구 교수도 "리더십의 본질에 대한 얘기보다는 성과를 낼 수 있는 리더십 스킬이나 스타일만 강조된 면이 많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백기복 국민대 교수는 "국내에 도입된 리더십 이론의 99%는 미국 학문이라 한국 실정에 맞지 않는다"면서 "한국형 리더십 사례를 분석하고 해외에 알릴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백 교수는 요즘 한국형 리더십을 분석할 학문적 이론을 새로 만들려 준비 중이다. 해외 이론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순수 한국 실정에 맞는 이론체계를 수립하기 위한 연구다. 예컨대 리더십에는 해당 국가의 문화, 풍습, 전통 등 이른바 '원산지 변수'가 따르며, 미국 기업의 경우 해외에 지사장을 파견할 때 그 나라의 원산지 변수를 학습시킨다. 반면 한국은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그런가하면 포스코는 지난 2007년부터 한국형 리더십 연구회를 매월 한 번씩 열고 연구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 연구회에는 손욱 교수를 비롯한 학계 및 정재계 핵심 인사들이 참석한다. 안철수 서울대 교수도 대선 출마설이 돌기 전까지 이 커뮤니티 멤버였다. 포스코 첫 여성 임원인 오인경 상무도 이곳 회원이다. 연구회에서 회원들은 한국형 리더십 사례를 발표하고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누고 있다. 손 교수는 "이를 발판으로 지난 3월 한국형 리더십개발원을 출범시킬 수 있었다"며 "이제 한국에도 미국의 케네디스쿨이나 일본의 정경숙 같은 훌륭한 리더십 양성소가 나올 때가 됐다"고 강조했다.

박병엽 팬택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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