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12월, 대한전선의 정기 임원인사 발표를 지켜본 재계는 깜짝 놀랐다. 이제 막 30대에 접어든 설윤석 당시 부사장이 단번에 두 계단 올라서면서 부회장 직함을 달았기 때문이다. 당시 만으로 29세였던 설 부회장은 재계 최연소 부회장에 이름을 올렸다.

2012년 2월, 재계는 설 부회장의 인사 때문에 또 한 번 술렁였다. 최연소 부회장 기록을 세웠던 설 부회장이 이번에는 스스로 직급을 한 단계 내렸다. 기업의 실질적인 오너가 자신의 직급을 낮춘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라 많은 이들의 놀라움을 자아냈다. '위기'에 처한 대한전선을 살리기 위해 설 사장이 둔 초강수가 먹힐지 재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최연소 부회장 관심 한몸에

설윤석 사장은 고 설원량 회장과 양귀애 명예회장의 장남이자 고 설경동 대한전선 창업주의 손자다. 설 사장은 2004년 연세대 경영학과를 졸업하자마자 스테인리스 사업부 마케팅팀 과장으로 대한전선에 입사했다. 당초 대학졸업 후 미국 유학길에 오르려 했던 설 사장이었지만 부친인 설 회장이 2004년 3월 세상을 떠나자 유학일정을 접고 바로 경영수업을 받기로 결정했다.

설 사장은 2006년 경영전략실 차장과 부장(2007년)을 거쳐 2008년 임원(전력사업부 해외영업부문 상무보)을 달았다. 이어 2009년 10월 경영기획부문 전무로 승진한 설 사장은 3개월 뒤인 2010년 1월 부사장을 거쳐 그 해 12월 마침내 부회장에 올랐다.

설 사장이 부회장 자리에 올랐을 때 회사 안팎에서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았다. 나이도 어릴뿐더러 경영능력도 아직 검증되지 않았던 까닭이다. 영업과 경영, 기획 파트를 두루 거쳤다고 하지만 짧은 기간에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면서 그냥 맛보기에 그친 것 아니냐는 곱지 않은 시선도 받았다.

실제로 설 사장은 입사한 지 채 7년도 되지 않아 부회장이 됐다. 삼성전자의 이재용 사장이 10년 만에 겨우 임원을 달았음을 감안한다면 재계 3세 중에서도 파격적인 속도로 승진한 셈이다. 설 사장의 빠른 승진 속도는 대학졸업 직후 미국 유학을 떠나지 않고 대한전선에 입사한 것과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평범한 주부로 살다가 남편 설 회장이 급사하면서 갑자기 회사를 떠맡게 된 양 명예회장의 짐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는 내용이다.

다행스럽게도 설 사장이 부회장 직함을 단 직후, 대한전선은 38억원의 경상이익을 기록하며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2008년 4분기 이후 9분기 연속 적자행진의 마침표를 찍은 것이다. 물론 대한전선은 여전히 유동성 위기와 실적 불안에 떨고 있고 설 사장이 경영에 참여하는 비중은 미비하다는 것이 재계의 중론이지만 특유의 책임경영은 여전히 주목받고 있다.

슬림한 조직에서 책임경영

대한전선은 지난달 1일부로 조직개편을 마쳤다. 2총괄 6부문 35본부 53팀으로 운영되던 조직을 2총괄 4부문 20본부 42팀제로 축소하고 임원진도 기존의 25명에서 16명으로 36% 줄인 것이 이번 조직개편의 핵심이었다. 조직개편 이유에 대해 대한전선 측은 "유사 업무와 기능을 통합해 인적 자원을 집중하고 조직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조직개편보다 더욱 주목을 받았던 부분은 설 사장이 부회장 직함을 내려놓은 일이었다. 대한전선 관계자는 "직위 변경은 설 부회장이 결정한 사안"이라며 "오너로서 책임경영을 강화하고 임직원과 고객에게 한 걸음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지분구조 탄탄

부회장 직함을 내려놨지만 지니고 있는 지분만으로도 설윤석 사장의 대한전선 장악은 전혀 문제 될 것이 없다. 설 사장은 지난해 말 기준 대한전선의 지분 6.07%를 보유하고 있다. 대한전선의 최대주주(12.42%)이자 그룹의 실질적 지주회사인 티이씨(TEC)리딩스 지분은 53.77%나 갖고 있다.

설 사장 가족이 100% 지분을 쥐고 있는 티이씨리딩스는 대한전선 등을 통해 20여 개의 계열사들을 거느리고 있어 그룹 지배구조의 핵으로 꼽히는 회사다. 티이씨리딩스는 2004년 세상을 떴던 고 설원량 회장이 지니고 있던 지분 일부를 넘겨받으면서 지주회사로 자리잡을 수 있게 됐다. 동시에 설 회장의 티이씨리딩스 지분은 설 사장을 비롯한 가족들에게 상속되며 후계구도를 다졌다. 티이씨리딩스는 대한전선이 자사 물량을 몰아주는 방식으로 급속 성장하면서 한때 구설수에 오른 바 있다.

차입금 낮추고 턴어라운드?

현재 설윤석 사장이 가장 큰 부담을 느끼는 부분은 역시 대한전선의 재무상태다. 대한전선은 2000년대 들어 사업 다변화와 외국 진출을 무리하게 꾀하다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맞아 유동성 위기에 내몰렸다. 부채는 2010년 기준 4조원을 넘어섰고 같은 기간 부채비율은 492%까지 치솟았다. 1955년 설립 이후 2008년까지 계속되던 흑자행진도 처음으로 멈췄다.

설 사장 가족은 지난 1월 대한전선과 계열사 보유 지분 전량을 채권단에 담보로 내놨다. 자금난에 빠진 회사에 대한 책임을 지는 동시에 회생에 대한 자신감을 표현한 행동으로 해석된다.

재무구조 개선을 위한 설 사장 가족의 노력에 채권단 또한 응답했다. 지난 2월 주채권은행인 하나은행을 비롯한 11개 채권은행은 대한전선의 회사채 만기를 앞두고 4,300억원 규모의 협조융자를 지원하기로 합의했다. 산업은행, 정책금융공사, 수출입은행 등 '조건부 협조융자'를 고집하던 국책은행들도 조건 없이 동참했다. 만약 채권단이 자금을 추가 지원하지 않았다면 회사채 만기를 앞둔 대한전선은 부도처리될 가능성도 있었다. 그러나 결국 채권단의 자금 지원 합의로 대한전선의 유동성에 조금은 숨통이 트이게 됐다.

협조융자 이후 채권단이 주도한 실사도 비교적 좋은 결과로 나타났다. 지난 12일 채권단은 대한전선의 계속기업가치가 약 2조6,000억원으로 청산가치의 2배 이상으로 보고 있다고 밝혔다. 전선업의 우수한 펀더멘탈을 바탕으로 안정된 영업기조를 유지하고 있어 비영업부문의 구조조정을 실행해나갈 경우 2013년 실질적인 턴어라운드를 할 것이라는 내용도 덧붙였다.

대한전선은 올해 조직 슬림화, 설계 최적화로 원가 절감을 이루고 남부터미널, 옛 시흥공장 부지 등 1조3,000억원에 달하는 보유 자산 매각도 마무리 지을 계획이다. 전문가들은 대한전선이 매각대금으로 차입금을 낮추고 3,000억원 규모의 유상증자까지 성공하면 자율협약이 마무리되는 내년 정도에는 턴어라운드도 가능하리라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유상증자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주가가 기대만큼 받쳐주지 않아 고난의 행군이 더 길어질 것이라 전망하는 이들도 상당수다.

설 사장이 그동안 '초고속 승진한 황태자', '재계 최연소 부회장' 등의 이미지를 벗어나 회사 회생의 발판을 마련한 진정한 전문경영인 오너로 거듭날 수 있을지 재계가 주목하고 있다.



김현준기자 realpeac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