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드 결제 거부하고 현금 수수

국세청이 최근 서울 강남의 유명 여성전문병원의 탈루 사실을 포착, 병원장에게 19억원의 벌금을 추징했다. 사진은 국세청이 급습한 병원장 자택에서 발견된 24억원의 현찰다발.
얼마 전 국세청이 세금 탈루 여부를 적발하기 위해 급습한 서울 강남의 여의사 집 현금 뭉치 이야기가 주요 언론에 실렸다. 문제의 여의사가 현금으로 진료비를 받은 뒤 제대로 소득 신고를 하지 않는다는 제보에 국세청이 전격적으로 나선 것인데, 그 결과는 보는 이로 하여금 입을 딱 벌어지게 만들었다. 탈루한 수입 중 일부로 보이는 현금이 여의사 집에서 무려 24억 원이나 쏟아져 나온 것. 현장을 목격한 국세청 직원에 따르면 방 하나가 5만 원과 1만 원권으로 가득 차 있었다고 한다. 방이 통째로 금고 역할을 한 것이다.

<주간한국>은 강남 유명 병원들의 탈세 실태를 담은 시민단체 보고서를 입수, 사실 여부를 조사했다. 보고서에 나온 일부 병원을 직접 찾아가 어떤 방식으로 운영되는지 잠입 취재도 곁들었다.

"현금 아니면 다른 데로 가세요"

이 보고서는 한 시민단체에서 국세청에 고발할 목적으로 작성한 것이다. 시민단체는 일부 강남 유명 병원들의 일그러진 상술에 경종을 울리기 위해 이 같은 보고서를 만들었다고 했다.

보고서에서 언급된 병원 가운데 A성형외과가 가장 먼저 눈에 띈다. 이 병원의 K병원장은 TV에 출연할 정도로 유명인사. 서울 삼성동에 위치해 연예인들과 유흥업소 여종업원들이 주 고객이라고 한다.

K원장은 주로 VIP 고객만 상대하며 일반인들이 진료를 받으러 가면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다른 병원으로 가보는 게 좋을 것 같다"며 진료 자체를 거부한다. 대신 골라낸 성형수술 환자에게는 진료 뒤 현금으로 계산할 것을 종용한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 병원은 환자가 오면 간호사들이 먼저 "카드로 계산할 경우 금액이 많이 오를 수 있다"며 현금 계산을 유도한다. 만일 그래도 환자가 카드로 결제하겠다고 하면 각종 약제 사용과 진료 내용을 추가해 진료비를 부풀려 청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병원은 그러나 지난 2월 초 한 환자가 "수술이 잘못됐다"며 환불을 요구하자 수술 비용의 절반만 돌려주겠다고 했다. 이 환자가 "국세청에 고발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자 전액 환불해 준 것으로 보고서에 나와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 병원의 연 수입은 '공식적으로' 14억 원 정도이지만 실제로는 500억 원대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신사동에 위치한 R병원은 유명 여자 연예인이 단골손님인 것으로 알려지면서 유명세를 타 양천구 목동 인근에 분원 설립을 계획 중이다. 이 병원은 벼락 성장한 탓인지 환자들의 불만 제기가 적지 않은 곳이기도 하다.

환자들의 가장 큰 불만은 역시 진료비다. 이 병원에는 정해진 진료비 자체가 없다고 한다. 손님에 따라 부르는 금액이 다르고, 현금 결제가 아니면 아예 진료를 거부한 것으로 밝혀졌다.

때문에 이 병원을 찾았다가 불쾌한 경험을 가진 이들이 인터넷에 불만을 올리는 일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병원의 유명세는 좀처럼 식지 않고 있다. 일부 연예인들이 이용하고 있을 뿐 아니라 돈 있는 사람들만 이 병원을 이용한다는 일종의 'VIP 의식'이 생기면서 오히려 '단골손님'이 더 늘었기 때문이다.

병원? 성형 시술원!

며칠 전 R병원을 직접 찾아갔다. 간호사는 대뜸 "어떤 부분의 시술을 원하는 것인지, 어떻게 시술하기를 원하는지 정확하게 밝혀달라"고 요청했다.

"간단한 코 수술을 하려 한다"고 하자 간호사는 "간단한 수술일 경우 카드로 하는 것보다 현금으로 결제하는 게 훨씬 저렴하다. 그렇게 하겠냐"고 물었다.

카드로 결제하겠다고 버티자 간호사는 "잠시 기다리라"며 의사가 있는 진료실로 들어가더니 5분 후에 나와 "현찰 계산이 아니면 다른 병원을 찾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카드로 결제하면 다른 병원에 비해 비용이 많이 들 수 있다"며 사실상 진료를 거부했다.

간호사는 의사에게 카드 손님을 어떻게 처리할지 물어본 듯했다. 간호사의 말에 따르면 이 병원을 찾는 손님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인 성형수술일 경우 현금 결제하는 것이 원칙처럼 돼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그 정도 능력이 안 되는 손님은 아예 받지 않겠다는 뜻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 병원은 화상을 입고 찾아온 환자에게까지 현금 결제를 요구했고, 환자가 난색을 표하자 마찬가지로 다른 병원을 추천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병원의 간호사들 중에는 연예인 뺨치는 외모를 갖춘 이들도 있다. 이들 역시 이 병원에서 시술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말하자면 간호사 겸 '샘플'인 셈이다.

청담동에 위치한 L성형외과의 탈세 방법은 병원 탈세의 '교과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 병원의 의사는 명문대 출신으로 환자들의 수술 기록을 없애는 방법으로 탈세했다.

이 병원은 환자가 현금으로 수술비를 지불할 경우 진료 기록을 아예 남겨두지 않는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의사가 이 부분을 환자에게 공개적으로 공지하며 수술 진료기록 삭제에 동의를 구한다는 점이다.

문제는 수술 이후다. 의사들이 진료기록을 작성하지 않을 경우, 환자는 수술 후유증 등 문제가 발생했을 때 병원 측으로부터 사후 보상을 받을 수 없다.

한 의료계 인사는 "병원의 진료 기록은 의무다. 진료 기록이 없으면 환자가 아무 것도 주장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해당 병원으로부터 추가 치료를 받기도 힘들다"며 "생명의 소중함을 생각한다면 진료 기록 없이 수술하는 모험을 감행해서는 안 된다"고 조언했다.

이 병원에서 수술한 적이 있다는 한 환자의 증언에 따르면 이곳에서는 카드로 결제하는 환자들에게는 수술비 할인을 거의 해주지 않고 현금으로 결제하면 수술비를 대폭 할인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이 병원의 주요 고객인 부유층의 경우 수술비를 할인 받기 위해 대부분 현금 결제를 선택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세청의 한 관계자는 "성형외과병원의 진료비는 대부분 의료보험 대상에서 제외된다. 그런 만큼 의료보험공단에 진료비를 청구할 일이 상대적으로 적다"며 "진료기록 조작 등에 의한 탈세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국세청은 앞으로 강남지역 성형외과 병원 등 고소득을 올리고 있는 주요 병원들에 대해 수시로 세무조사를 벌여 탈세를 원천적으로 뿌리뽑을 방침이다.



윤지환기자 jj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