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오후 2시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 노무현 전 대통령 비자금 발언과 관련한 조사를 받기 위해 검찰에 나오고 있다. 조영호기자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차명계좌가 발견됐다는 발언으로 유족들에게 고소당한 조현오 전 경찰청장이 검찰에 소환조사를 받았다. 조 전총장은 조사를 받은 뒤 기자들에게 "유족들에게 심려를 끼쳐 미안하다"고 사과했지만, 자신의 앞날을 고려하면 미안하다고만 하고 끝낼 일은 아니다. 사자(노 전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 혐의로 기소될 각오도 해야 하기 때문에 자신에 대한 변호를 게을리 할 수 없는 형편이다.

그래서 검찰 주변과 야권 일각에선 "조 전 청장과 노 전 대통령 측이 이번 사안의 타협안을 놓고 물밑에서 조율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조 전 청장은 최근 검찰 조사에서 "차명계좌 발언은 경찰 내부 보고를 근거로 한 것으로, 권양숙 여사의 여비서 계좌에서 10억원 이상의 수표가 발견됐다는 보고였다"는 취지로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또 일부 언론에 "명의인과 계좌번호를 다 까겠다"고 했던 당초 태도와는 달리 계좌 주인및 번호를 제시하지는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대신 조 전 청장은 검찰의 '박연차 게이트' 수사 기록을 확인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은 조 전 청장이 차명 계좌에 대해 구체적으로 진술할 경우, 이를 노 전 대통령 수사 당시 대두됐던 경주현 삼성종합화학 회장의 딸 경연희씨 비자금세탁 연루 의혹과 연결시키는 부분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정치권에서는 "검찰이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과 관련해 상당한 정황을 파악하고 경씨의 입국 시기를 조율하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하지만 검찰은 노 전 대통령 차명계좌 존재에 대해 공식적으로는 '확인하지 못했다'는 입장이다. 모든 부분을 다 조사했지만 차명계좌의 존재는 모르겠다는 다소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검찰의 이러한 자세에 대해 그대로 받아들이는 이는 드물다. 검찰은 차명계좌 여부에 대해 일부 진실을 알고 있으면서 모든 것을 조 전 청장의 입에 맡겨버리는 듯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다. 정치적으로 아무래도 부담스럽기 때문일 것이라는 게 검찰 주변의 분석이다.

해외 검은돈의 실체

검찰의 한 관계자는 "노 전 대통령의 차명계좌에 대해 '있다', '없다' 말하기는 힘들다"며 "조사 중이던 상황에서 피조사자 신분인 노 전 대통령이 사망했기 때문에 모든 게 중단됐다. 수사기관의 입장에서는 조사가 끝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는 것 아니겠나"라고 말했다.

여권을 중심으로 한 정치권에서는 조 전 청장에 대한 조사가 노 전 대통령의 딸 정연씨에 대한 조사와 맞물릴 것으로 보고 있다. 정연씨는 비자금으로 미국의 콘도를 매입한 의혹을 받고 있는데, 경씨는 이 과정에 개입하고 미국 내 로열패밀리 비자금을 관리한 인물로 지목되고 있다.

그래서 경씨에 대한 검찰 수사가 차명계좌의 실체를 밝혀내는 열쇠가 될 것으로 보는 시각이 적지 않다. 검찰은 현재 경씨 측에 조사를 위한 입국을 종용하고 있지만 경씨 측은 이에 응하지 않고 있다.

이번 사건의 제보자로 알려진 전직 카지노 매니저 이달호씨 형제는 "폭스우즈 카지노 호텔 특실에서 경씨가 정연씨에게 몇 차례 전화를 걸어 (아파트 잔금) 100만달러를 보내라고 요청했다"고 주장했다.

경씨는 노 전 대통령 측으로부터 돈을 받아 노 전 대통령의 딸 정연씨가 차명으로 콘도를 구입할 수 있게 해준 인물로 의심받고 있다. 경씨는 노 전 대통령 측으로부터 돈을 받아 이를 세탁해주고 그 중 일부로 도박을 했다는 의혹이 제기돼 여러 차례 언론에 오르내린 인물이다.

이씨는 또 "경씨의 친구들은 '권양숙 여사로부터 일련번호가 나열된 새 돈 100만달러가 든 가방을 받았다'는 얘기를 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씨는 이 모든 의혹을 부인하고 있다. 이씨의 주장에 대해 경씨는 "권 여사를 만난 적이 없다"며 의혹을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경씨가 입국하는 즉시 경씨가 해외에서 소모한 것으로 알려진 도박자금의 출처가 어디인지 그리고 정연씨로부터 천문학적인 돈을 받아 환치기 한 것이 사실인지 여부 등을 집중 추궁할 계획이다.

문제는 경씨의 입국 여부. 총선이 끝나고 곧 대선정국으로 들어간다는 점을 감안하면 경씨의 입국은 당분간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경씨로서는 자신이 정치적으로 이용될 수도 있다고 생각할 것이기 때문이다.

앞서 사건을 수사 중이던 대검 중수부는 이씨 형제로부터 이 사건을 접수해 조사하던 중 총선정국과 맞물리자 정치 수사 등의 논란을 피하기 위해 잠시 보류하기도 했다. 그리고 총선이 끝난 이후 다시 사건 조사를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먼저 사건의 핵심인 경씨를 다각도로 압박해 소환하려 하고 있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다. 기업수사와 더불어 민간인 불법사찰, 현 정권 실세에 대한 조사 등과 같이 큰 사건이 겹친 때문이다.

조 전 청장 궁지에 몰리나

검찰 주변에서는 "검찰이 경씨 소환 조사에 소극적인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검찰 관계자는 "소극적이라기보다 수사를 하게 되면 득보다 실이 많다는 판단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경씨에 대한 조사를 하게 되면 어차피 노 전 대통령 쪽으로 수사 방향이 잡힐 것인데 이렇게 되면 정치적으로 복잡한 논란만 가열될 뿐이다.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을 상대로 수사해야 하는데 그렇게 해서 얻을 게 뭐 있겠나"라고 말했다.

검찰 내부에서는 조 전 청장 조사를 두고 회의론이 우세하다. 노 전 대통령 수사와 관련, 검찰은 조 전 청장으로부터 주목할 만한 진술을 받기 힘들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조 전 청장은 차명계좌와 관련해 정치적으로 여러 부분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만에 하나 조 전 청장이 차명계좌에 대해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 내용을 그대로 밝힐 가능성이 낮다고 보는 것은 그래서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차명계좌는 다른 사람 명의로 된 통장이기 때문에 생각보다 연결고리를 규명해 내기가 힘들다"라며 "찾아냈다 해도 정말 다른 사람의 통장인지 자기가 명의만 빌려서 계좌를 사용했는지 명확히 가리기가 어렵고 재판에서도 잘 인정되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조 전 청장이 차명계좌에 대해 밝힌다 해도 그것이 실제 노 전 대통령의 차명계좌인지 증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섣불리 밝힐 수 없다는 의미다.

또 차명계좌 발언에 대한 조사는 사실 여부보다 정치적 사안에 가깝기 때문에 검찰도 부담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차명계좌에 대한 규명은 살아있는 사람에 대한 조사가 아닌 만큼 상대편을 불러들여 조사할 수도 없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검찰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게 정치권의 분석이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이 문제는 어차피 들춰봐야 정치적으로 역풍을 맞을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에 검찰이든 조 전 청장이든 조심스럽기는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말했다.



윤지환기자 jjh@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