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위고하 막론한 ‘수평적 횡령놀음’ “이젠 감시시스템 갖춰져 있다”

신용협동조합(이하 신협)에서 발생한 한 여직원의 '간 큰 횡령' 사건이 충격을 주고 있다. 횡령액이 무려 66억6,000여만원에 달해 일반인들에게는 입을 딱 벌어지게 하는 규모다. 하지만 금융권은 그다지 새삼스러울 것 없다는 입장이다. 여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동안 신협에서 대규모 횡령 사건이 끊이지 않아서다.

노인고객 통장 노려

지난달 10일 경기 광주경찰서에 한 여성 A씨가 찾아왔다. 그녀는 광주시 퇴촌면 소재 퇴촌신협 여직원이라고 소개한 뒤 "고객 예금 32억원을 횡령했다"며 자수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검찰 조사결과 여직원 A씨는 32억원이 아니라 무려 66억6,800만 원을 횡령한 것으로 드러났다. 검찰은 A씨와 피해자들의 대질조사 등을 통해 당초 자수액보다 훨씬 66억여원의 횡령 사실을 밝혀 냈으며, 다른 직원의 관여 내지 공모 혐의 여부에 대해서도 계속 수사할 방침이다.

검찰은 A씨가 횡령액 66억원 중 대부분을 조합원 예금 돌려막기로 상환했고, 10억원 정도만 주식투자를 하다 실패하는 바람에 '자신이 (돈을)날렸다'는 주장에 대해 신빙성이 없다고 보고 계좌 추적 등을 통해 쓰임새를 캐고 있다. 나아가 가능한 한 빨리, 그리고 많이 횡령액을 환수한다는 계획이다.

A씨가 고객 돈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출납 업무를 전담하게 된 1998년부터.고교를 졸업한 직후인 1993년 퇴촌신협에 입사했으니 신협의 업무에 관한 한 전문가가 된 뒤였다.

A씨는 고객들이 1~3년 단위로 목돈을 맡기는 정기예탁금만 골라, 고객에게 주는 통장에는 제대로 액수를 기입하고 신협 원장에는 예탁금의 10분의 1, 혹은 100분의 1만 기입하는 식으로 고객과 신협 양쪽을 모두 속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A씨의 먹잇감은 주로 인근의 농촌 노인들이었다. 은행 업무를 잘 모른다는 점을 악용, 금액을 통장에 직접 적어주는(수기 방식) 등의 수법을 써서 돈을 빼돌렸다. 이렇게 13여년 동안 A씨가 빼돌린 돈은 무려 32억원. A씨는 이 가운데 12억원을 주식투자와 생활비 등 개인 용도로 사용했다고 진술했다.

모든 사기 사건이 그렇지만, 횡령액이 점차 커지면서 돌아오는 예탁금은 소위 언제 터질 지 모르는 '폭탄 돌리기'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A씨는 어쩔 수 없이 예탁금 일부를 빼내 만기가 돌아온 예탁금에 채워 넣는 '돌려막기'까지 감수해야 했다. A씨는 예탁금 만기가 돌아오면 다른 직원이 눈치 채지 못하도록 여름휴가도 가지 않고 열심히(?) 출근해 돌려막기를 하곤 했다.

급기야 올해 들어 A씨는 보통예금에도 손을 대기 시작했다. 주식투자 실패 등으로 더 이상 '돌려막기'도 어려워졌기 때문이다.

지나친 욕심은 언제나 불행을 부르고,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 신협의 한 고객이 지난달 24일 통장 잔고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1,500만원이 인출됐다가 다시 입금된 사실을 확인해 신협에 신고한 것이다.

신고를 받은 신협이 자체 감사에 착수하자 A씨는 모든 걸 포기하고 지난달 10일 변호사와 함께 경찰에 출두해 13년간 고객 87명의 통장계좌에서 모두 32억원을 인출한 사실 일체를 자백했다.

회장부터 직원까지 횡령

보통 사람에게는 입이 떡 벌어질 규모의 횡령액임에도 금융업계는 이상하게도잠잠하다. 새삼스러울 게 없다는 입장이다. 여기엔 그만한 이유가 있다. 그 동안 신협에서 횡령 사건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자신의 업무용 컴퓨터 단말기를 이용해 전산을 조작하는 수법으로 고객 예금 4억여 원을 빼돌린 충북 제천 소재 모 신협 직원 B씨가 지난해 3월 경찰에 덜미를 잡혔다. B씨는 2004년 7월 자신의 업무용 컴퓨터 단말기를 이용해 허위 정보를 입력한 뒤 전산을 조작해 자신과 가족명의의 계좌로 2,000만원을 이체하는 등 지난 해 5월까지 6년간 269차례에 걸쳐 총 4억700만원을 챙겼다.

앞서 지난 2010 4월에는 조합원 명의로 수억원을 대출받아 남편의 사업자금 등으로 쓴 서울 모 신협 직원 C씨가 붙잡히기도 했다. C씨는 2003년 말부터 올해 초까지 신협에서 자금 관리와 여ㆍ수신 업무를 총괄하면서 대출 관련 전산 자료를 허위로 입력하는 수법으로 조합원 21명의 명의로 44차례에 걸쳐 총 5억4,000여만원을 대출받아 가로챘다.

신협에서 벌어진 횡령 사고의 주범은 비단 직원만이 아니었다. 지난 2006년에는 고객돈 수십억원 횡령한 이사장 D씨가 꼬리를 잡히기도 했다. D씨는 대출거래약정서 등을 위조해 2,000만원을 대출받는 등 모두 12차례에 걸쳐 8억여원 가량을 타인 명의로 대출받아 자신의 배를 채우는 데 썼다.

신협의 횡령 사고 리스트엔 '회장님'도 이름을 올렸다. 지난 2002년 박진우 전 신협중앙회장이 수억원의 중앙회 자금을 정상적인 절차를 밟지 않고 업무처리비 등으로 사용한 혐의로 입건된 것.

이뿐만이 아니다. 지난 1999년에는 황창규 전 신협중앙회장이 58억원의 대출금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된 바 있다. 모두 억! 억! 억! 억대를 넘기는 사건들이다.

이처럼 신협의 횡령 사건은 심각한 수준이다. 이는 지난해 국정감사에 보고된 '신용협동조합 금융사고 현황'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00년부터 지난해 1월까지 총 354개 조합에서 319건의 횡령 사건이 발생했고 그 규모는 무려 1,808억원에 달한다. 한 달에 약 2.6건의 사고가 발생했고, 평균 횡령액은 매달 15억원 정도다.

그렇다면 신협에서 횡령이 끊이지 않는 까닭은 뭘까?

그 이유에 대해 금융권은 내부통제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실제 A씨는 검찰 진술에서 신협내에 감시 장치가 없어 횡령이 가능했다고 진술했다. 다른 피의자들도 한결같이 신협은 온라인 전산망이 구축돼 있지 않은 데다 입출금 업무를 혼자 담당했기 때문에 별다른 의심 없이 범행을 저지를 수 있었다고 했다.

그러나 신협은 이를 착시현상에 불과하다는 주장한다. 신협 측 관계자는 "그 동안 조합 내부를 투명하게 들여다 볼 시스템이 없었는데, 2006년 상시 감시 시스템이 갖춰지면서 작은 금액의 사건까지도 적발돼 결과적으로 금융사고가 늘어난 것처럼 보인다"고 해명했다.



송응철기자 sec@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