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의로 교통사고를 내고 보험금을 타낸 대규모 사기조직이 구속돼 조사를 받고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설마 그 사람이….(내연녀)"

"살인을 저지를 사람이 절대 아니다.(아내)"

실성한 듯 입을 닫은 내연녀와 "그럴 리가 없다"던 아내. 그들에게 조직폭력배 출신 박모(46)씨는 정말 자상한 남자였다. 그러나 박씨는 보험금 20억원을 타내려고 아내와 친동생, 처남의 목숨을 빼앗은 연쇄 살인마였다.

경기 동두천에 사는 박씨는 건실한 사업가로 알려졌다. 40평대 아파트 두 채를 가진 박씨는 장모를 잘 모시는 사위로 소문났다. 그의 '재테크 비결'은 가족. 돈이 필요할 때마다 아내와 동생 등을 교통사고로 위장해 살해한 다음 보험금을 타냈다.

첫 희생양은 아내였다. 동두천 지역 모 폭력조직 자금줄이었던 박씨는 자신이 30세였던 1996년 당시 아내였던 김모(당시 29세)씨를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그는 폭력배 후배 유모씨와 전모씨를 불러 "보험사기로 돈을 마련해야겠다"면서 "내 마누라에게 작업(살해)해라"고 지시했다. 유씨는 "어떻게 형수를 죽이냐"며 자리를 박차고 나갔지만 전씨는 경기 양주시 복개천 주차장에서 김씨의 목을 졸라 죽였다. 박씨는 시신을 싣고 차를 몰다가 교통사고를 위장해 보험사로부터 사망 합의금과 의료비 명목으로 1억 4,500만원을 받았다.

아내 목숨과 바꾼 돈은 사채업과 주점 자금으로 쓰였다. 사채업자로 변신한 박씨는 당시 28세였던 동생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평소 친분이 있던 보험설계사를 통해 동생 이름으로 생명보험을 3개나 계약했고, 동생 역시 살해한 다음 교통사고로 위장할 계획을 세웠다.

에어백이 있는 대형차를 타던 동생에게 "기름값이 많이 나온다"는 이유로 중형차를 사줄 정도로 주도면밀했다. 형은 "돈을 받을 곳이 있는데 같이 가자"고 말했고, 형을 따라나선 동생은 형수와 마찬가지로 양주에서 살해당했다.

박씨가 운전한 차는 중앙선을 넘어 교통신호를 기다리던 차를 들이받았고, 보험사는 조수석에 있던 동생 시신을 확인한 뒤 형에게 보험금 6억원을 건넸다.

형은 동생 목숨과 바꾼 돈으로 새 아내를 맞아 살림을 차렸다. 새장가를 간 박씨는 2005년 온라인게임 리니지를 즐기다 주부 최모(41)씨를 만났다.

최씨는 자신을 위해주면서 돈까지 펑펑 썼던 박씨에게 끌렸다. 내연 관계를 맺은 최씨가 남편과 불화를 호소하자 박씨는 손아래 동서 신모씨에게 범행을 제안했다.

"남편 앞으로 보험을 들고 교통사고를 내 죽게 하고 보험금으로 함께 살자." 박씨의 속삭임에 최씨는 자신을 사랑하는 줄로만 알았다. 최씨는 2006년 1월 남편이 먹는 한약에 수면제를 타 잠들게 했고, 박씨는 신씨를 시켜 자동차로 남편을 들이받았다. 마음이 약해진 신씨가 충돌 직전 자동차 핸들을 튼 덕분에 남편은 불행 중 다행으로 목숨을 건졌다.

세 번째 희생양은 재혼한 처의 남동생이었다. 내연녀의 남편을 제거하지 못하자 박씨는 석 달 뒤인 2006년 4월 처남 이모(당시 32세)씨에게 눈길을 돌렸다.

박씨는 처남인 것처럼 속여 사망보험에 가입했다. 보험금은 친족만 받을 수 있기에 수령자를 장모로 지정했다. 일정한 직업이 없었던 손아래 동서 신씨는 "큰돈을 주겠다"는 말에 또다시 끔찍한 일에 동참했다.

처남 이씨가 수면제를 넣은 드링크를 마시고 정신을 잃자 박씨와 신씨는 둔기로 내리쳐 살해한 다음 차량 조수석에 태우고 교각을 들이받는 교통사고를 냈다. 처남 목숨 값으로 받은 돈은 총 12억 5,000만원이었다.

수상하게 여긴 경찰이 박씨를 여러 차례 조사했지만 증거가 부족했다. 완전 범죄로 남을 뻔했던 연쇄 살인 사건에 대한 실마리는 교도소에서 나왔다.

아내를 살인할 당시 범행에 가담하지 않았던 유씨가 올해 초 '교통사고를 위장해 보험금을 탔다'고 경찰에 제보했다. 유씨 제보를 토대로 장기사건수사전담팀은 연쇄 살인 증거를 하나씩 모았다.

자동차 모의 충돌 실험을 통해 "동생이 사망할 때 시속 80㎞로 달렸다"는 박씨 주장이 거짓임을 알아냈고, 성문(聲紋) 분석을 통해 박씨가 처남인 것처럼 속여 보험에 가입했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또 내연녀 최씨와 휴대전화로 범행을 공모했고, 최씨가 동네 의원에서 수면제를 샀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서울지방경찰청은 석 달 동안 잠복 수사한 끝에 아내와 친동생, 처남을 교통사고로 위장해 살해하고 나서 보험금 20억원을 챙긴 혐의로 박씨와 신씨 등을 구속했다고 지난 21일 발표했다.

범행 일체를 부인하던 박씨는 경찰이 증거를 내놓자 공소시효가 지난 아내 살해 사건과 미수에 그쳤던 내연녀 남편 사건만 인정했다. 그러나 공범은 혐의 내용을 대부분 인정했다. 박씨는 조사 과정에서 노래를 흥얼거리며 담당형사에게 '감방에 갔다 나오면 꼭 찾아오겠다'고 협박까지 했다.

남편이 동생을 죽였다는 사실을 몰랐던 아내 이씨는 경찰에게 "살인할 사람이 아니다"며 남편을 두둔했고, 장모도 아들 목숨을 뺏은 사위를 용돈을 많이 주는 훌륭한 사위로만 여겼다. 잘못을 깨닫고 속죄했던 내연녀 최씨는 남편을 장애인으로 만들었던 박씨가 희대의 살인마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망연자실했다.



이상준기자 jun@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