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 후보론은 지역주의적 발상이자, 생명력을 다한 정치공학적 접근

정세균 상임고문은 인터뷰가 진행된 1시간 동안 특유의 온화한 미소 속에서도 은근한 자신감을 감추지 않았다. 정 고문은 "여야를 통틀어 정치와 경제를 아는 유일한 후보가 정세균"이라며 "정책통 브랜드가 국민들에게 어필된다면 제대로 평가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윤관식기자
대기업 임원·장관·당대표 등 화려한 경력 하나씩 쌓아 올려

영남후보론은 지역주의 기반… 국민들은 정책·인물 더 중시해

여·야 통틀어 정치와 경제 동시에 아는 유일한 후보
경제 성장동력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 분수처럼 돼야
어려움을 겪어본 사람만이 어려운 시대 극복 가능

어지간한 자리는 다 거쳤다. 대기업 임원, 장관, 당대표 두 차례에 5선 국회의원. 대한민국에서 대통령 빼고는 다 해봤다 해도 크게 지나치지는 않을 듯하다.

지난달 26일 당찬 출사표를 밝힌 정세균(62)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경력은 실로 화려하다. 그러나 어느 한순간 이 자리에 선 것은 아니다. 정 고문이 자신의 이력서에 나름대로 자부심을 갖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 고문은 그의 신조(성실)처럼 '스텝 바이 스텝(Step By Stepㆍ한걸음씩)' 이력을 쌓아왔다.

'외유내강' 정 고문은 지난 4ㆍ11 총선에서 정치적 승부수를 던졌다. 지역구인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을 떠나 서울 종로에서 출사표를 밝혔다. 그리고 정 고문은 여당 거물인 홍사덕 전 의원을 제압하는 쾌거를 올렸다. 종로 승리로 정 고문은 '당대표급'에서 '대선주자'로 위상이 크게 올라갔다.

이번 대선에서 정 고문은 어쩌면 유일한 호남 출신 '유력' 주자가 될지도 모른다. 지난 17대 대선 후보였던 정동영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지난 9일 대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정동영 고문은 정세균 고문과 함께 전북 출신이다. 또 광주 전남을 대표할 만한 '유력 주자'는 아직까지 보이지 않는다.

대선 출마 선언 후 눈코 뜰 새 없는 일정을 소화하고 있는 정 고문을 지난 10일 오전 국회 의원회관에서 만났다. 인터뷰가 진행된 1시간 동안 정 고문은 특유의 밝고 온화한 미소 속에서도 은근한 자신감을 감추지 않았다.

-정동영 고문의 불출마 선언으로 이번 대선에서 정 고문이 유일한 '유력' 호남 주자가 될지도 모르겠다. 어떤 각오로 경선에 임하고 있나.

"호남만으로도 안 되지만, 호남 없이도 정권 교체는 안 된다. 정권 교체라는 절대적 과제를 이루기 위해서는 호남 민심을 결집시키는 것도 나의 책무 중 하나다. 호남에서 서울로 지역구를 옮긴 것도 강점이라고 생각하고 이를 잘 살려보겠다."

고등학교 때 교정에서 친구들과 함께. 정세균(가운데)은 친구들 사이에서 늘 리더였을 만큼 남다른 구석이 있었다.
-일각에서는 '노무현 효과'를 거론하며 '영남 후보론'을 앞세우고 있다.

"노 전 대통령이 선거를 치른 것은 벌써 10년 전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실제로 지난 10년 동안 국민들의 의식은 많이 변했다. 영남 후보론이라는 게 정치공학적인 접근인데 그것은 생명력을 다했다. 우리 국민들은 재판(再版)을 좋아하지 않는다. 영남 후보론이라는 것은 지역주의에 기반한 발상인데 국민들은 지역주의보다는 정책, 인물, 성향을 더 중시한다."

-기업 임원, 5선 의원, 장관, 당대표 2차례 등 콘텐츠 면에서는 어느 후보에게도 밀리지 않는 반면 브랜드 파워가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다.

"정세균의 브랜드는 아직도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한 것 같다. 대한민국의 소득 수준, 의식 수준이 높아진 만큼 이제는 정책통 브랜드가 평가 받을 때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친노라고 하는 문재인 김두관 후보, 수도권을 기반으로 하는 손학규 후보의 기세가 만만치 않다. 본선에 진출하기 위한 필승전략은 무엇인가.

"정책으로 승부를 걸 것이다. 또한 내가 가장 확실한 정체성을 갖고 있는 후보다. 나는 민주당에서 한 발짝도 떠난 적이 없다. 민주당의 대표적인 지도자는 김대중 노무현 전 대통령인데 그분들을 잘 모셨을 뿐 아니라 인정도 받았다. 당연히 민주당다운 후보가 정세균이다. 당 밖으로 눈을 돌리면 국내외적으로 매우 어려운 시기다. 대외 환경이 이렇게 나빴던 적도 없었던 것 같다. 이럴 때는 검증되고 준비된 후보가 필요하다. 여야를 통틀어 정치와 경제를 동시에 아는 후보는 정세균밖에 없다."

-대선 출마와 함께 내건 슬로건과 주요 정책을 다시 한 번 설명한다면.

"대선 슬로건은 '국민이 편안한 나라'다. 굳이 자살률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아이들은 공부 때문에, 청년들은 직장 때문에, 30~40세대는 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너무 힘들다. 편안한 국민이 별로 없다. 국민이 편안한 나라의 핵심은 빚 없는 사회다. 빚 없는 사회의 출발은 사교육 폐지다. 삶이 어렵다 보니 애를 낳지 않고 그 결과 대한민국이 노쇠 공화국이 되고 있다. 이대로는 안 된다."

-분수 경제론은 정 후보를 함축하는 단어 중 하나다. 이를 쉽게 풀이한다면.

"MB 정부의 신자유주의에 입각한 '낙수 경제론'에 대한 반대급부로 나온 이론이다. 경제 성장의 원동력이 대기업과 부자가 아닌 중소기업과 서민이어야 한다. 분수처럼 동력이 밑에서 위로 올라가야 진정으로 잘 사는 나라가 된다. 기본적으로는 분배를 강화하자는 거다. 그렇게 되면 복지 수요도 많이 줄어든다. 분수 경제를 달리 표현하면 경제민주화다. 내가 경제민주화 주장의 효시다. 분수 경제론은 경제민주화의 정세균 버전인 것이다."

-야권 주자들의 지지율은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에 비해 크게 떨어지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이며, 상황이 이런데도 대선에서 야권이 승리할 수 있다고 보는가.

"선거라는 것은 크게 인물과 구도다. 현재만 보면 박 전 위원장의 지지율이 높기 때문에 그리 간단치는 않다. 중요한 것은 고정 지지보다 확장성이다. 1대1 구도가 되면 우리 당 후보는 확장력이 커질 것이다. 박 전 위원장은 고정 지지층은 두꺼운 반면 확장력은 약하다."

-민주통합당의 대선 경선 룰을 두고 후보들 간에 입장 차이가 있다. 이와 관련한 정 고문의 의견은 무엇인가.

"동원만 최대화하려 할 게 아니라, 경쟁의 질도 생각해야 한다. 과거에 양적인 측면에만 치중하다 보니 부작용이 컸다. 시대의 트렌드 중 하나인 모바일 투표를 부정할 수는 없다. 다만 문제 없이 하자는 거다. 경선의 질을 높이기 위해 국민 검증단을 만들어서 후보들을 제대로 검증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본선에서 박 전 위원장과 정 고문 간의 1대1 구도가 형성됐다고 가정해보자. 두 사람의 가장 큰 차이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나.

"나는 따뜻한 가슴을 갖고 있다. 지금처럼 양극화가 심한 상황에서 중산층을 복원하고 취약계층을 보호하려면 따뜻한 가슴이 필수다. 박 전 위원장과는 근본적으로 살아온 궤적이 많이 다르다. 나는 하루에 12km씩 걸어서 학교에 다녔고, 검정고시로 고교에 진학했다. 또 가정교사를 하면서 대학에 다니는 등 나름대로 스토리가 있다. 어렵게 살았던 게 자랑은 아니지만 어려움을 겪어본 사람만이 지금처럼 어려운 시대를 극복할 것이라 생각한다."

-링 밖의 안철수 교수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민주당 내에서는 안 교수를 포함한 이른바 원샷 경선과 민주당 후보 선출 후 안 교수와 플레이오프를 치르는 투샷 경선 이야기가 나온다.

"정권 교체를 위해서 안 교수는 반드시 필요한 자산이다. 어떤 형태로든 안 교수가 정권 교체에 기여하도록 길을 열어놓는 게 중요하다. 자꾸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정권 교체의 자산을 훼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안 교수 본인의 의사를 존중하고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다."

-MB의 실정 때문에 새삼스럽게 대통령의 자질과 자격이 거론되고 있다.

"지난 번 대선에서는 실수했다고 생각했던 분들이 많다. 다른 것은 몰라도 (MB가) 경제는 살릴 줄 알고 (국민들이) 다른 모든 과오를 덮어주지 않았나. 대통령은 균형감각을 갖고 있어야 한다. 자기 편만 챙기면 안 된다. 공자님 말씀처럼 정치는 신뢰가 중요하다. 지금 상황에서는 경험 많고 준비된 대통령이 나와야 한다."

-정 고문이 생각하는 시대정신은 무엇인가.

"유능한 민주주의가 절실하다. 달리 표현하면 '더 큰' 민주주의다. 오랫동안 정치적 민주주의를 추구했는데 현정권 들어서 많이 훼손됐다. 정치적 민주주의 복원을 필두로 경제, 사회, 문화 민주주의로 폭을 더 넓혀야 한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창조적 계승을 강조하고 있다.

"민주정부 10년 동안 국가의 균형 발전, 남북 평화, 복지 향상 등 중요한 과제를 잘 수행했다. 하지만 부족한 점도 있었다. 어쨌든 신자유주의 정책을 수용하다 보니 양극화가 커졌고 비정규직 문제도 심화됐다. 지금은 스마트 시대다. 과거 지도자들의 철학과 정책을 답습하는 게 아니라 시대에 맞는 창조적 계승이 필요하다. 민주정부 10년 동안 부족했던 부분을 잘 살펴서 극복하는 게 창조적 계승이다."

-정 고문의 젠틀맨 이미지, 다양한 경험, 능력 등에 후한 점수를 주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임팩트가 약하다고 지적하는 사람들도 있다.

"사실 정세균은 참 괜찮은 사람인데 아마 톡 쏘는 양념이 없어서 그런 게 아닐까. '정책 브랜드'라고 하는 게 어필하는 맛이 덜하다. 맛을 내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 지금이 태평성대라면 내가 아니라도 괜찮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위기가 올 수 있고, 그것을 잘 극복하지 못할 경우 미래가 없기 때문에 정세균처럼 준비된 사람이 필요하다."

-끝으로 국민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정치와 경제를 아는 정세균이다. 정세균이 여야를 통틀어 정치와 경제를 아는 유일한 후보다. 지난 총선에서 내 스스로 호남 기득권을 버리고 종로를 선택해서 '박근혜 시대를 열겠다'던 홍사덕 전 의원을 누르고 야당에 24년 만에 승리를 안겼다(보궐선거 제외). 사실 종로 승리는 좀 평가 받았어야 했는데 당이 패하는 바람에 아쉬웠다. 그런 점들을 눈여겨봐주면 감사하겠다."

"엘리베이터? 에스컬레이터 인생!"


'산골'장수 출신… 중학은 검정고시… 고등학생땐 교내 매점서 빵 팔기도

대학생때는 가정교사하며 학비 벌어 DJ 권유로 정치… 홍사덕 꺾고 5선

최경호기자

정세균은 촌놈이다. 끼니 걱정 한 번 안 해본, '부잣집 도련님' 같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선입견일 뿐이다.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만큼 고생을 많이 한 정세균이다.

정세균은 6ㆍ25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산골 오지인 전북 장수에서 태어났다. '무진장(무주 진안 장수)'은 정세균의 상징이자 그를 대변해주는 단어다.

정세균의 집안은 너무 가난했다. 때문에 정세균은 중학교 진학 대신 검정고시로 중학과정을 마쳐야 했다. 고등학교 때 정세균은 교내 매점에서 빵을 파는 '빵돌이'였지만 3년 내내 장학금을 놓치지 않을 만큼 공부를 잘했다.

정세균은 1971년 고려대 법학과에 입학했고, 그 후 격렬하게 유신 반대운동을 했다. 그리고 1974년에는 총학생회장을 지냈다. 대학 때는 가정교사로 학비를 벌었다.

대학을 졸업한 뒤 정세균은 쌍용그룹 계열사에 입사해 시멘트 영업, 기계 부품, 신발 등 국제 영업의 최전방에서 활약했다. 정세균은 미국 지사에서도 10년 가까이 근무했다.

'기업인' 정세균이 '정치인'으로 변신하게 된 것은 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권유가 직접적인 계기가 됐다. 정세균은 1996년 제15대 국회 입성을 시작으로 지난 4ㆍ11 총선까지 내리 5번 금배지를 달았다.

정세균은 4ㆍ11 총선 때는 고향인 무진장이 아닌 '대한민국 정치 1번지' 종로에서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의 후견인인 홍사덕 전 의원에게 압승을 거뒀다.

재ㆍ보궐선거를 제외하고 야당 의원의 종로 승리는 1988년 이후 24년 만의 쾌거였다. '종로 대첩'은 정세균이 대선주자로 발돋움하는 데 든든한 디딤돌이 됐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에서 두 차례나 당대표를 지낸 정세균은 대화와 타협을 중시하는 젠틀맨이다. 당직자들 사이에서도 섬세하고 부드러운 정세균의 인기는 높다. 그런 정세균이지만 2009년 여당의 미디어법 강행 처리에 반발해 강경 투쟁을 주도했을 때는 서슬이 퍼런 투사로 변신했다.

정세균은 "기업에서 말단 사원부터 임원까지 올라갔다. 정세균은 엘리베이터가 아니라 에스컬레이터다. 벼락출세한 사람이 아니다"며 "당에서도 대변인 빼고는 다 해본 게 정세균이다. 탄탄한 실력을 갖고 있다는 자부심이 있다. 지금 우리나라에는 나처럼 한 걸음씩 걸어온, 준비된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힘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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