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지난 10일 서울 영등포 타임 스퀘어 광장에서 대선 출마 선언 후 지지자들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다. 오대근기자
슬로건을 우리말로 풀면 표어쯤이 적합할 듯하다. 표어는 특정 단체, 기업, 인물의 가치관, 지향점, 사상 등을 간결하게 표현한 것이다. 따라서 슬로건은 기본적으로 쉬우면서도 강렬한 인상을 남겨야 한다.

1992년 미국 대선에서는 민주당의 빌 클린턴 후보가 '문제는 경제야, 바보야(It' economy, Stupid)!를 들고 나왔다. 짤막하면서도 인상 깊은 그 구호는 미국인들의 표심을 깊이 자극했고, 결국 클린턴을 백악관으로 안내하는 길잡이가 됐다.

12월 19일 대선을 앞두고 예비주자들의 슬로건 전쟁이 치열하다. 이번 전쟁은'손학규 효과'로 촉발됐다. 손학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은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워 평범한 직장인들과 중산층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다.

같은 당의 경쟁자인 김두관 전 경남지사 측은 "그 구호 하나로 손 고문의 지지율이 5%는 올라간 것 같다"며 부러움을 감추지 못했고, 문재인 상임고문은 한술 더 떠 "손 고문의 '저녁이 있는 삶'이란 구호는 정말 좋았다. 제가 만일 민주당 대선후보가 된다면 그 슬로건을 빌려 쓰고 싶다"고 했다.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측도 손 고문의 슬로건에 적지 않은 자극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박 전 위원장 측 관계자는 "복지와 노동 문제를 두루 담은 슬로건"이라며 "다들 그 슬로건에 충격을 받고 그보다 나은 것을 내놓기 위해 고민하고 있다"고 털어놓았다.

정세균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지난 8일 국회 정론관에서 정부개혁방안으로 '스마트 정부'에 대한 공약을 발표하고 있다. 손용석기자
박근혜의 '내 꿈이…'

박근혜 전 위원장 측은 지난 8일 대선 슬로건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공개했다. 박 전 위원장 캠프의 변추석 미디어홍보본부장은 "시대적 과제인 변화, 박 전 위원장의 정치철학을 상징하는 민생, 유권자가 원하는 개인화 등을 키워드로 슬로건을 만들었다"며 "기다려온 변화 박근혜, 국민의 삶과 함께 가는 박근혜, 내 삶을 위한 선택 박근혜 등이 더해져 이 슬로건이 나왔다"고 설명했다.

또한 캠프 측은 박 전 위원장을 상징하는 이모티콘은 당의 상징색인 빨간색 풍선 안에 '박근혜' 이름의 초성인 'ㅂㄱㅎ'과 스마일을 한데 모아 시각적으로 형상화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나 박 전 위원장 측의 '야심작' 공개 직후 논란이 불거지고 있다. 같은 당의 경쟁자인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 측은 "박 전 위원장을 상징하는 이모티콘이 임 전 실장의 아이콘과 거의 유사하다"며 "우리 캠프는 지난 5월부터 명함과 봉투 등 모든 공보물에 이 아이콘을 사용해 왔다"고 주장했다. 임 전 실장 측은 사용중지 가처분 신청 등 법적 대응도 검토하고 있다.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에 대해서는 야당에서 표절 의혹을 제기했다. 민주통합당 김기식 의원은 페이스북에 "작년에 제가 시민운동가들과 함께 만든 단체 명칭이 '내가 꿈꾸는 나라'"라며 "복지, 경제민주화도 베끼더니 슬로건마저 베끼는 것 같다"고 주장했다. '내가 꿈꾸는 나라' 측은 보도자료를 통해 "무단 사용을 결코 동의할 수 없으며 당장 사용 중단을 요구한다"고 촉구했다.

김두관 전 경남지사가 지난 8일 오후 전남 해남군 땅끝마을에서 대선 출마를 선언하고 있다. 해남=연합뉴스
손학규의 '저녁이 있는 삶'

'저녁이 있는 삶'은 대통령 임기 내 연간 근로시간을 2,000시간으로 줄이겠다는 손학규 고문의 정책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구호다. 당대표였던 지난해 교섭단체 연설 관련 토론을 하던 중 손 고문이 영국 유학 시절 경험을 떠올리며 "유럽은 상대적으로 저녁이 있는데 우리는 너무 많은 노동시간에 얽매여 있다"고 말한 게 계기가 됐다.

'저녁이 있는 삶'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손 고문은 최근에는 자신의 보육정책을 '맘(Mom) 편한 세상'으로 일목요연하게 구호화했다. 이 또한 20~40 젊은 세대들에게 크게 어필되면서 '대박' 반열에 올랐다.

문재인의 '우리나라 대통령'

문재인 고문은 출마 선언에서 '우리나라 대통령'을 키워드로 들고 나왔다. "출마 선언문에 슬로건을 담자"는 의견도 있었지만 "정책을 보다 구체화한 뒤 그에 걸맞은 슬로건을 내자"쪽으로 결론 내렸다.

현재까지 문 고문 측 대표 슬로건은 '우리나라 대통령'이지만 공식 슬로건은 아직 발표되지 않았다. 문 고문 측은 캠프에 선거대책위원장 인선이 완료되는 대로 공식 슬로건을 내놓을 계획이다. '우리나라 대통령'에 대한 평가는 다소 추상적이고 밋밋하다는 게 대체적이다.

김두관의 '내게 힘이…'

후발 주자로 경선에 뛰어든 김두관 전 지사는 '내게 힘이 되는 나라. 평등국가'를 슬로건으로 내걸었다. 특히 '평등국가'는 김 지사의 좌우명인 '민불환빈 환불균(民不患貧 患不均ㆍ백성은 가난을 걱정하는 게 아니고, 고르지 못함을 걱정한다)'과 일맥상통한다.

김 전 지사 측은 개인의 노력만으로 안 되는 것은 국가가 나서서 해결해줘야 한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김 전 지사 측 관계자는 "성장의 과실을 서민과 중산층에게 나누는 권력을 지향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설명했다.

정세균의 '편안한 나라'

정세균 고문이 선언한 '빚 없는 사회, 편안한 나라'는 간결하면서도 이해하기 쉽다는 평을 듣는다. 정 고문은 "요즘에는 편안한 국민이 거의 없는 것 같다"며 "편안한 나라가 되려면 빚 없는 사회가 우선이고, 빚 없는 사회를 만들려면 사교육부터 폐지해야 한다"고 힘줘 말했다.

정 고문의 슬로건은 자신의 전문성(경제, 정책)을 담았다는 측면에서 후한 점수를 받는다. 정 고문은 "앞으로 대한민국이 큰 위기에 직면할 수도 있다. 때문에 부채를 해결하는 것이 시대 과제가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나라, 정치, 통합, 화병…

임태희 전 실장의 '걱정 없는 나라', 김태호 새누리당 의원의 "낡은 정치의 세대교체', 조경태 의원의 '민생통합 대통령, 국민통합 대통령', 김영환 의원의 '울화통 터지는 나라, 국민 화병을 고치겠다', 김문수 경기지사의 '함께 갑시다, 위대한 대한민국' 등은 중요한 시대적 과제에 대한 강한 해결 의지를 담고 있다.

이들 주자들은 이른바 '메이저'들에 비해 다소 열세인 게 사실이다. 따라서 선명성에 초점을 맞춘 인상이 짙다. 일반적으로 유력 주자는 보편성과 안정감을 강조하는 반면 후발 주자는 강렬한 이미지를 추구한다. 같은 전략으로는 역전승을 꿈꿀 수 없기 때문이다.

야권 주자 캠프 관계자는 "잘 만든 슬로건 하나가 백마디, 천마디 말보다 나은 것 아니냐"며 "현재까지는 손학규 고문 측의 슬로건이 가장 돋보인 가운데 이를 넘어서기 위한 다른 주자들의 아이디어 경쟁이 계속되고 있다"고 귀띔했다.

슬로건 보면 시대가 보인다


보통사람·신한국 창조·준비된 대통령…

최경호기자

과거 대선 슬로건은 정권교체, 민주화, 정치개혁 등 거대담론이 주를 이뤘지만 이번 대선을 앞두고는 개인의 삶으로 초점이 이동되는 듯하다. 이는 극심한 사회 양극화에 따른 서민들의 고단한 삶이 시대의 화두이자 극복 과제이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국가보다는 개인에 '방점'을 찍은 슬로건은 박근혜 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장, 손학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이 사용하고 있다. 민주통합당 정세균 상임고문, 김영환 의원, 임태희 전 대통령실장의 슬로건도 개인 삶의 질을 중시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문재인 민주통합당 상임고문의 '보통사람이 주인인 우리나라 대통령', 김태호 새누리당 의원의 '낡은 정치의 세대교체, 조경태 민주통합당 의원의 '민생통합 대통령, 국민통합 대통령'은 굵직한 정치적 화두와 메시지를 담았다.

후보 간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개인을 강조하는 현상은 과거와 비교하면 엄청난 변화다. 가까이는 2007년 제17대 대선, 멀리는 1997년 제15대 대선 때만 해도 슬로건이라고 하면 '당연히' 정치 경제 사회 등 거대담론을 담아야 했다.

헌정사상 첫 여야 간 수평적 정권교체가 이뤄졌던 제15대 대선에서 김대중 후보는 '준비된 대통령', 2002년 노무현 후보는 '새로운 대한민국', 2007년 이명박 후보는 '국민 성공시대'라는 슬로건을 들고 나왔다.

현재의 관점으로 보면 다소 무겁게 느껴질 수도 있으나, 당시에는 시대정신이 잘 반영된 슬로건으로 평가됐다. 97년에는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라는 사상 초유의 국난을 맞았고, 2002년에는 '서민' 노무현 대 '귀족' 이회창 구도가 형성됐다. 또 제2의 IMF 사태가 우려됐던 2007년에는 경제 살리기가 절체절명의 과제였다.

한정훈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아직까지는 예선전 단계이기 때문에 주자들로서는 구체적인 정책을 제시하기보다 당원이나 대중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전략이 우선"이라며 "주자들의 슬로건이 과거에 비해 부드러우면서도 감성적으로 변한 것은 개인 삶의 질을 중시하는 시대상의 반영으로도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슬로건 제작자는 '캠프 핵심 중 핵심'


디자인전문가 등 참여…임태희·김문수는 직접 제작도

최경호기자

각 주자의 대선캠프에서 핵심 중 핵심은 슬로건을 만드는 사람이다. "지나치게 이미지에 치중한 정치" "마케팅에 몰두한 나머지 정책은 실종됐다"는 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현실적으로 슬로건은 승패를 좌우할 요소 중 하나다.

박근혜 전 위원장 캠프에는 조동원 새누리당 홍보기획본부장, 변추석 국민대 디자인대학원장(캠프 미디어홍보본부장) 등이 합류해 있다. 조 본부장은 '침대는 과학입니다'라는 광고 카피로 유명하고, 변 원장은 '2002년 한일월드컵 공식 포스터'를 제작했다.

'슬로건 전쟁의 유발자' 손학규 고문의 캠프에는 민주노총 정책국장 출신의 손낙구 특보와 메시지 담당 김계환 비서관, 김경록 전 부대변인 등이 아이디어 발굴에 여념이 없다. 손 대표의 메시지를 '저녁이 있는 삶'이란 구호로 만들자고 제안한 사람은 손 특보와 김 비서관이다.

문재인 고문 측에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선거 캠페인을 맡았던 전문 카피라이터 정철씨, '접시꽃 당신'의 도종환 의원(시인) 등 전문가들이 슬로건 발굴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정세균 고문과 김두관 전 지사의 슬로건은 참모들과의 오랜 공부 끝에 나온 산물이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을 한마디로 압축해서 표현했다는 점에서 긍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런가 하면 임태희 전 실장, 김문수 지사, 조경태 김영환 의원 등은 자신이 직접 슬로건을 만든 케이스다. 임 전 실장은 청와대에서 나온 뒤 4개월 간 전국일주를 한 끝에 아이디어를 얻었고 김 지사는 평소 소신을 담담하게 슬로건에 담았다. 조 의원과 김 의원도 각고의 노력 끝에 슬로건을 낳았다.



최경호기자 squeeze@hk.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