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훈이 지난 26일 '8·15 독도횡단 프로젝트' 기자간담회에서 록밴드 피아, 서경덕 교수와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있다.
불우한 어린시절 한때 자살 시도… 대학때 밴드활동 하며 새삶 찾아
백억대 기부하고도 아직 월세방… 초기엔 일부서 "쇼한다" 비아냥
"내 희망은 잘 죽는것… 순간순간 최선"

'기부천사' 가수 김장훈의 선행이 국제무대에서 인정받았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수여하는'자원봉사상(The President's Volunteer Service Award)'을 수상한 데 따른 것이다.

백악관은 김장훈의 한국 내 기부 총액이 150억원에 이르고 미국의 정론지에 꾸준히 공익 광고를 한 점, 미국 공연의 개런티를 미국 재활단체에 기부한 점 등이 한미우호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한 것으로 알려졌다.

실제 김장훈은 선행을 많이 한 스타로 유명하다. 지금까지 1백억대 이상의 기부를 해왔다. 그러면서 '기부천사'라는 별명도 얻었다.

김장훈의 선행은 '현재진행형'이다. 지금 이순간도 봉사활동이나 기부 등을 위해 전국을 바쁘게 오가고 있다. '다 갖는 것은 죄악'이란 마음으로 나눔에 임한다는 김장훈. 그가 지나온 날들을 살펴봤다.

2008년 2월 팬들과 함께 태안 기름유출 사고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김장훈
불우한 어린 시절에 일탈

김장훈은 1965년 1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김장훈은 사실 어린 시절 부잣집 아들이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등지고, 어머니의 사업실패로 차압이 세 번 들어오면서 순식간에 가난해지고 생활이 피폐해졌다.

편모 가정에서 김장훈의 어머니는 홀로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당연히 김장훈은 늘 혼자일 수밖에 없었다. 중ㆍ고등학생 시절 김장훈이 방황하게 된 가장 큰 이유다. 그러던 고2 시절 김장훈은 도박판에서 발단된 폭력사건에 휘말려 퇴학을 당했다.

이후 김장훈은 집을 박차고 나왔다. 손을 대보지 않은 일이 없었다. 이런 저런 일을 합치면 거쳐간 직업만 스무 가지가 넘었다. 그러나 좀처럼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 김장훈은 급기야 자살시도까지 했다. 힘들어서가 아니라 외로워서였다.

그런 김장훈이 우울의 늪에서 벗어난 건 대학교에 들어가 밴드 활동을 하면서다. 그 전까지 김장훈은 전인권과 김현식을 흠모하고 동경하며 음악가의 꿈을 키워왔다. 분식집 DJ로 노래하고 항상 방에서 담요를 뒤집어쓰거나 항아리에 대고 노래를 불렀다.

광주시와 미국 뉴욕주 낫소카운티시, 한미공공정책위원회는 공동으로 지난달 21일 미국 낫소카운티시 아이젠하워 공원에서 '일본군 위안부 기림비'제막식을 가졌다. 기림비에 새겨진 그림은 위안부가 학대받는 사진을 바탕으로 가수 김장훈과 한국홍보전문가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제작했으며 위안부 희생자의 고통과 처절함 피를 상징하는 붉은색 화강암으로 제작됐다.
김장훈은 고등학교 졸업학력 검정고시에 합격한 뒤 경원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 진학해 밴드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모든 게 해소됐다. 이 때부터 잘 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밴드를 하면서 삶의 이유를 찾은 김장훈이지만 경제적인 사정은 녹록지 않았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혼자 힘으로 학교를 다녀야 했으니 두 말할 나위가 없다. 밥을 사 먹을 돈이 없어서 모르는 가수 공연의 쫑파티를 찾았다. 뒤풀이 장소를 미리 알아낸 뒤 가수가 들어오면 스태프인척 하고 끼니와 술을 때우는 식이었다.

"궁핍했지만 행복했었다"

경제적으론 궁핍했지만 김장훈은 행복했다. 음악이 있어서였다. 좋아하는 음악을 하루 19시간씩 붙들었고, 발성 연습도 10시간씩 했다. 김장훈은 그 때가 자신의 인생의 가장 행복한 순간이자 전성기였고, 가장 돌아가고 싶은 시절이라고 회상한다.

그러던 1988년 김장훈은 가수로 데뷔하게 됐다. 꿈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나 가수생활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다. 장장 7년을 무명 가수로 보내야 했다. 벌이가 없어 전혀 생활이 되지 않았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수여한 대통령 자원봉사상 증서
무명생활 7년째에 접어드는 해, 김장훈은 결심을 했다. 대중가요의 길로 들어서기로 한 것이다. 한 발 양보해서 살림살이가 조금이라도 나아진다면 상관없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렇게 나온 게 3집 '노래만 불렀지'와 4집 '나와 같다면'이다.

상업과 타협한 것 아니냐는 비난이 여기저기에서 쏟아졌다. 그러나 김장훈은 그 해 공연만 200회를 넘게 하는 등 대중가수로서 승승장구했다. 그러다보니 팬들도 점차 김장훈의 흔들리지 않는 열정을 인정하게 됐다. 30대까지 그렇게 살았다.

김장훈은 대중가수로서 최고 전성기이던 1998년 돌연 미국으로 떠났다. 초심의 순수를 찾고 싶어서였다. "좋은 차, 좋은 집에 사는 사람이 어떻게 아무것도 없이 음악에만 매달렸던 열정을 계속 유지할 수 있겠느냐"는 생각이 김장훈의 등을 떠밀었다.

모든 영화를 뒤로하고 미국행을 결정한 김장훈의 손에는 3000달러가 전부였다. '노래를 찾든가 죽든가' 사생결단의 심정이었다. 주변에선 인생을 왜 모험처럼 사냐고 질책했다. 그러나 김장훈은 묵묵히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김장훈은 1년도 안돼 한국으로 돌아왔다. 공황장애 때문이었다. 미국에서 제대로 말도 못하고 불편하고 재미없는 생활을 반복하다 보니 자연스레 생긴 병이었다.

김장훈이 지난 26일 광복절을 맞아 진행되는 '8ㆍ15 독도횡단 프로젝트'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김장훈은 이를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언젠가 무대 올라가 '아~, 이 절망의 상태에서 노래하면 대박이겠다'며 머릿속으로 몇 시간 동안 공연을 했다고 한다. 김장훈은 언젠가 다시 미국으로 가게 되면 약이 아닌 사탕을 들고 오리라는 다짐을 하며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삶의 자세가 완전히 바뀌었다"고 김장훈은 말한다.다른 삶을 살아보자고, 너그럽게 살아보자고 마음 먹었다는 것.

이후 김장훈은 선행을 많이 한 스타로 더욱 유명해졌다. 그 동안 1백억원대를 기부해왔던 선행이 알려지면서 '기부천사'라는 별명도 얻었다. 반면 김장훈은 이런 기부금액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인 월 120만 원짜리 월세방에서 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김장훈이 처음 기부활동을 시작한 건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1997년이다. 당시 김장훈은 결식 아동들을 위해서 기부를 처음 해봤다. 다 갖는 건 죄악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김장훈은 나눌 때 가장 큰 행복을 느낀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러나 처음엔 공격도 많이 받았다. '눈길을 끌기 위해 쇼를 한다'는 비난이었다. 그러나 김장훈은 아랑곳 않고 소신을 지켰다. 7년간 인터넷 게시판 등은 보지도 전해 듣지도 않았다. 이에 대해 김장훈은 "불편한 시선이 겁나서 해야 할 일을 안 했다고 먼 훗날 후회하는 게 더 겁난다"는 이유를 들었다.

김장훈은 꾸준히 기부활동을 했고, 특히 독도를 홍보하기 위한 기부에 힘을 쏟았다. 한국홍보 활동가인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과 함께 세계 언론사에 '일본해'로 표기된 것을 '동해' 표기로 정정요청을 했다. 사비를 털어 월스트리트저널에 '동해' 표기가 옳다는 전면 광고를 내기도 했다. 이로 인해 월스트리트 저널은 10년 만에 처음으로 일본해 보다 먼저 동해라고 표기해 그 성과를 인정받았다.

"한꺼번에 10억원 기부도"

김장훈은 태안 기름유출 사건 때도 수억원을 기부했다. 뿐만 아니라 자원봉사자들과 단체로 태안 봉사활동을 위해 수 차례 방문하기도 했다. 김장훈은 대한민국의 과학기술에도 관심이 많아, 과학발전을 위해 카이스트 응원 광고를 사비로 게재했다. 카이스트는 이런 김장훈을 위해 콘서트 무대장치를 설계 설치해 주었으며, 무대 장치에 관한 수업도 실시했다.

2010년 12월에는 10억원의 거액을 기부하면서 그의 선행이 다시 주목을 받았다. 당시 김장훈은 "손가락질을 받더라도 연예인의 기부는 알리는 편이 낫다"라며 자신의 소신을 밝혔다. 다른 유명인들의 기부를 자극한다는 이유에서다.

이런 애국, 기부 행위가 알려지면서 김장훈은 좋은 평가를 받았다. 정치를 잘 할 것 같은 연예인 1위에 뽑혔고, 대통령 표창 수여자로 선정되기도 했다. 또 2009년 대한민국 나눔대상 통일부장관상을, 이듬해인 2010년엔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 나눔봉사부문을 수상했다.

지난해 2월 22일 뉴욕타임스(NYT)에 게재된 한국 방문을 홍보하는 전면광고
급기야 김장훈은 지난 21일 '미대통령자원봉사상'을 수상했다. 김장훈의 선행이 국제사회에서 인정받은 셈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주는 이 상은 미국 정부가 각 지역 내 봉사 활동을 촉진하기 위해 설립한 '국가와 지역 사회를 위한 재단법인(Corporation for National & Community Service)'에서 수여하는 상이다.

그러나 정작 김장훈 본인은 자신의 기부천사 이미지가 부담스럽다고 손사래를 친다. 당장 이번 '미대통령자원봉사상'만 하더라도 "내가 왜 이 상을 받는지 모르겠다"며 몸을 낮췄다. 대통령 표창도 '나보다 훌륭한 사람이 많다'는 이유로 거절했다.

김장훈의 희망은 '잘 죽는 것'이란다. 의외의 이 말은 사실 돈ㆍ명예ㆍ사랑 등 영원한 게 없는 만큼 매 순간순간 최선을 다하며 살겠다는 의미다. 그래서인지 누구보다 아끼지 않고 나눔을 실천하는지도 모른다.

김장훈은 지금도 크고 작은 기부와 자원봉사를 위해 쉬지 않고 전국을 바쁘게 오가고 있다. 기부ㆍ무대ㆍ가수 활동, 공연 연출, 독도 홍보 등에 열을 올리고 있는 그는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김장훈의 '아름다운 활동'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이다.

NYT광고 빚만 7억원… "밤업소 투어로 벌어 갚겠다"


송응철기자

가수 김장훈이 기부와 봉사활동 등 선행으로 7억원 상당의 빚더미에 앉은 것으로 알려졌다.

김장훈의 소속사인 공연세상은 "미국 뉴욕타임스 위안부 관련 등 광고비용에만 약 7억원의 빚을 지고 있다"며 "계약이 완료된 광고 두 편의 출연료를 받더라도 부족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김장훈은 현재 진행 중인 행사와 계획하고 있는 기부 활동에 필요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밤업소 투어를 결정했다. 8ㆍ15 독도 횡단, 쌀 나눔 운동본부의 120만명 무료배식 약속 실천 등이 대표적이다.

김장훈은 지난 5월 한 달 동안 30여개의 대학 축제 및 기업 행사 무대에 올랐다. 그러나 이미 진행한 행사와 계획하고 있는 행사를 위해서는 자금이 턱없이 부족해 밤업소 투어에 나서기로 결정했다.

각종 행사와 광고집행으로 인한 빚도 청산해야 한다. 김장훈이 중증장애아동병원 건립을 위한 꽃배달 사업, 대학생 자원봉사단인 'V원정대'와 함께 기부 문화를 전파하는 '캠퍼스 도시락데이', '연평아리랑' 행사 등에 많은 비용을 투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김장훈의 '밤업소 투어'를 반기지 않는 팬들도 있다. 국민가수인 김장훈이 밤무대에 서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김장훈이 팬들에게 "올해만 봐달라"고 당부한 이유다.

김장훈은 "이제와 생각해보면 5만 관객이 모여든 서울 올림픽 주경기장에서 공연도 했고, 100석의 소극장 공연도 해봤다"며 "무대가 크든 작든, 밤업소에서 공연을 하든, 가수에게는 똑같이 노래를 하는 소중한 무대일 뿐"이라고 전했다.

이어 김장훈은 "불러주는 곳이 많음에 감사하고, 올해 계획한 모든 것들을 완수하고 내년 1월 한 달 동안 나를 위한 휴가를 주려 한다"며 "주변에서는 많은 걱정을 하지만 전혀 문제없고 빚은 갚으면 된다"고 덧붙였다.



송응철기자 sec@hk.co.kr